유형전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클래식한 무기
모름지기 입대를 한 장병들이라면 '정신전력'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국력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 중 하나인 군사전력(무력)은 또다시 유형전력과 무형전력으로 나뉜다. 유형전력은 눈에 보이는 전쟁력으로서 병력, 무기, 장비, 물자 등이다. 반면, 무형전력은 군인정신, 사기 등과 같이 부여된 임무를 능동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조직화된 전투의지이다. 군에서 정신전력에 대해서 장병들에게 교육을 할 때에는 베트남전의 사례와 이순신 장군의 심리전 등을 예시로 자주 든다.
영화 '명량'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상당한 심리전의 대가임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배 12척에 불과한 조선 수군은 남해에 들이닥친 와키자카의 강력한 수군을 앞에 두고 패색이 짙었다.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병사들에게 당근과 채찍의 메시지를 적재적소에 전달하여(심지어 적의 정신전력을 이용하기도 한다.) 불가능해 보였던 전쟁의 승리를 쟁취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리 유형전력이 뒤져도 무형전력을 최대한으로 가동하면 바늘구멍 같은 가능성도 확실성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다는 교훈은, 이솝 우화같이 매우 유치하고 당연해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낙담하는 이들에게 절대적인 희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의 육체는 정신에 많이 지배된다. 아무리 냉동탑차 안의 온도가 따뜻해도, 그 안에 갇힌 사람이 여기는 얼음굴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 있다. 시험이 아무리 쉽게 출제되어도, 과도한 긴장감은 정상적인 뇌운동을 저하시켜 문제의 정답률을 떨어뜨릴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일들이 눈앞에 닥쳐도 내가 생각하기 나름에 따라 그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신태용 감독이 대한민국 A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자마자 눈 앞에 놓였던 과제는 월드컵 지역예선 통과였다. 한국에게 강한 이란과의 홈 경기,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원정경기는 그에게 상당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협회 자체의 문제를 제외하고라서도, 신태용 감독은 이해할 수 없는 선수 선발과 전술로 두 경기 모두 0:0의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이며 월드컵 진출을 '당했다.' 특히, 언론과 축구팬들이 대노한 부분은 바로 의욕없는 선수들의 경기력과, 좋지 않은 퍼포먼스로 우즈벡과의 경기를 마치고 나서 시리아-이란의 경기 결과를 아직 모르면서 헹가레를 쳤던 소위 '무개념'의 모습들이었다.
우리나라 스포츠팬들은 예로부터 '투철한 정신력'을 강조했던 언론과 사회적 풍조에 익숙해져있다. 실력이 미천했던 우리 스포츠 선수들은 정신력과 악바리같은 투지로 실력을 보완하고자 했다. 지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유교적 덕목이 몸에 익어있어, 팬들도 선수도 그러한 모습을 바라고, 보여왔다. 그 노력의 최고 결정체가 바로 2002 월드컵 4강 신화이다. 세밀한 부분에서 축구 강국에 비해 한참 수준이 모자란 대한민국 국가대표를 이끈 히딩크 감독은 당시 트랜드였던 4백 포메이션을 이식하는데도 실패한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강한 체력과 압박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것은 성공을 거두어 월드컵이 끝난 지금까지도 2002 월드컵의 선수들은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뛰고 노력한 결과 이룩한 4강 신화"로 기억되고 있다.
15년이 지난 지금 2002 월드컵 4강 신화는 현재 비난 받고 있는 국가대표팀의 비교 대상이 되었다. 아니, 그 이후의 국가대표팀들은 지는 경기를 할 때마다 '2002 멤버들은 죽도록 뛰었다.', '선배들의 악바리 근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와 같은 정신력에 대한 질타를 한 경기도 빼먹지 않고 받았다. 유럽축구 중계가 보편화가 된 2000년대 중반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현재 국가대표 주장 기성용은 몇 년 전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경기 후 팬분들이 해 주시는 피드백이 더이상 정신력이 아니라, 이날 전술은 어떠했고 경기 내용은 어떠했고를 평가하는 내용이었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대가 바뀌어서 젊은 축구팬들이 많음에도 그들은 기성 세대들과 같이 정신력을 고집하니 그들도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축구팬(요즘은 야구팬도 마찬가지)들이 국가대표를 볼 때 정신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선수들이 국가대표에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국가대표의 의미가 어떤 의미일까. 스포츠 선수가 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노력했고, 그 목표의 최고 정점은 국가대표일 것이다. 국가를 대표해서 세계의 무대에서 여러 강국들을 상대하는 명예로운 자리. 그 무게감이 있는, 엄정한 마음이 들어 입고 있는 유니폼의 무게조차 무거워 보이는 그 두려운 자리를 과연 지금 국가대표 선수들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문제다. 국가대표의 자리가 언제부터인가 병역의 회피 수단으로 여겨지지는 않는지가 팬들도, 언론도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현 국가대표들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올림픽, 아시안게임과 같은 병역 혜택이 포상으로 걸린 대회에는 국가대표 차출에도 먼저 응하고, 구단이 만류하면 발 벗고 나서서 설득하는 선수들이 그러한 매리트가 없는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설렁설렁 뛰지 않는가가 지금까지 언급한 정신력 문제다. 몇몇 선수들은 이러한 비난에 억울하다는 후문이다. 자신들은 매경기 열심히 다해서 뛰는데 팬들이야 말로 너무하지 않느냐라는 생각일 터.
이 시점에서 가장 나쁜 건 협회겠지만, 현재 표면에 놓인 이러한 선수-팬과의 갈등의 말로는 지난 콜롬비아-세르비아와의 평가전 직전의 분위기였다. 무관중 경기를 하자는 여론이 팽배했던 11월 초, 축구 기사에는 썩어빠진 멘탈을 가진 선수들과 감독은 필요없다는 댓글이 가득했고, 시위와 청원이 뒤따랐다. 마음이 착찹해진 협회와 신태용 감독은 스페인 A대표팀 코치였던 그란데, 미냐노 코치를 동반 영입했다. 신 감독도 대단한 것이, 이러한 여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다 했다. 지난 러시아, 모로코와의 평가전에서 실패한 변형 3백 전술도 버리고 이번 평가전에서는 4-4-2를 들고 나와 성공적인 경기력을 보였다.
물론 신 감독이 고민한 전술 연구의 성과도 있다. 손흥민을 살리기 위해 쳐진 스트라이커에 이근호-이정협과 같이 정교함은 떨어지지더라도 활동량이 많은 공격수를 붙여줬고, 2002년과 같은 전방 압박을 주문하여 강팀들이 쉽게 우리의 골문을 노리지 못하게 신체적인 부담을 줬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체크 포인트는, 힘들더라도 "한 발 더 뛰는 축구"를 했다는 것이다. 바로 정신전력의 재점화다. 선수들은 이전과는 달리 최대한 압박의 끈을 놓치지 않았고, 이 평가전 두 경기가 마치 토너먼트 경기인 것 같이 최선을 다해 뛰어다녔다. 이들의 정성어린 경기력에 콜롬비아의 하메스도, 세르비아의 이바노비치도 어려운 경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정신전력은 우리의 제한된 실력과 전술을 커버하기에 부족한 자원일까? 어느정도 한계는 있겠지만 아무 없는 말은 아니다. 콜롬비아전의 경기력은 마치 0-1로 졌지만 멋진 경기를 했던 2002년 독일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상대가 팔카오-콰드라도와 같은 공격의 엔진들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를 감안하고서라도 경기를 충분히 지배할 만한 퍼포먼스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선수들의 달라진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 러시아와의 평가전에서 김주영이 자책골을 2개나 기록하고 그 이후의 실점의 빌미도 제공했을 때 그의 눈빛은 갈 곳을 잃었다. 수비 위치를 정확히 잡지도 못했고 상대를 따라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눈 앞에 가득했고 경기 이후의 질책을 전반 30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멘탈로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 반면, 콜롬비아-세르비아와의 경기에서 선수들은 사생결단을 한 눈빛으로 경기에 임했고, 그 결과 당당할 수 있었다.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2골을 넣은 손흥민은 경기 후 믹스트존에서 차범근을 만나 말 없이 한참을 울었다. 최근 질책을 받은 것에 대한 부담을 보여주듯, 그리고 이 경기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승리를 바랐는지 보여주듯이 말이다.
더이상 정신전력은 과거 헝그리 정신 세대가 기반 없이 외치던 공허한 말들이 아니다. 우리가 유형전력에 대한 한탄만 한다면 정작 유형전력이 갖춰져도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남 탓만 할 것이다. 강한 팀일 수록 강한 정신력으로 경기에 임한다. 최근 월드컵 진출에 기적과 같이 통과한 아르헨티나. 우리는 세계 최고인 리오넬 메시가 조국을 월드컵에 올려두기 위해 에콰도르와의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 플레이하여 3골을 기록한 뒤 인터뷰한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월드컵에 나갈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솔직히 너무 힘들었다. 에콰도르에게 선제골을 줬을 땐 죽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승리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월드컵에 진출할 자격을 증명했다. 아르헨티나는 이렇게 위기를 겪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원하는 성과를 만들겠다. 신께 정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