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7
오늘은 도서관에 못 갔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악기 점검을 받으러 바삐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가, 고양이 약을 먹이는 것을 깜빡한 탓에 다시 돌아가고, 여차저차 다시 나와 궁디팡팡 캣페스타에 들러 부모님 댁 고양이를 위한 간식을 사러 나왔다가, 맡겨 놓은 악기를 찾으러 다시 예술의 전당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바보 같기 짝이 없는 동선이었다.
도로에 내다 버린 시간이 인생의 절반 이상일 것이라는 어느 경기도민의 자조 섞인 농담처럼, 오늘 하루 지하철에 멀뚱히 서서 내다 버린 시간만 3시간 정도가 된다. 다행히 내겐 전자책이 있지. 음하하. 덤벼라 지루함이여.
3시간 정도 지하철에 서서 전자책 2권을 읽어 재꼈다. 한 권은 유튜버 할말넘많의 <따님이 기가 세요>이고 다른 한 권은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김치 공장 블루스>까지. 무얼 독후감 주제로 써야 하나 고민했는데, <날씨와 얼굴>의 한 줄 리뷰를 쓰러 갔다가 이런 리뷰를 보았다.
“내 주변의 선지자적 소수가 정의라는 착각, 특별해 보이고 싶은 꼴값”
아, 오늘의 독후감은 이 책으로 해야겠다.
이슬아 작가는 작가 본인의 저서가 아닌 작품에서 먼저 봤다. 무슨 책에서였더라, 여하간 아끼는 에세이스트의 에세이에 그의 인터뷰집을 인용한 것을 보고 언젠간 읽어봐야지 했었다.
그런데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인터뷰집을 읽으려고 마음먹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읽으려다가 (진짜 재밌을 것 같았음) 왠지 인터뷰집을 먼저 읽는 게 ‘의리’ 일 것 같아서 그마저도 미뤘었다. 결국 그의 칼럼집을 먼저 읽게 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다.
제목을 본 순간 최재천 박사가 <개미와 공작>을 추천하면서 제목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던 것이 생각났다. 개미는 협동을, 공작은 성의 진화를 각각 대표하는 존재로서 제목에 그 이름을 얹는다.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도 그와 같이 멋지다. 날씨는 기후 위기를, 얼굴은 우리를 대표한다. 결국 기후위기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을 하는 책일 것으로 예상했다. 마침 나는 환경 보호 운동의 일환으로 제로웨이스트에 관심을 갖고 이리저리 알아보는 중이었기에 책을 고르는 데 일말의 거부감도 없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자꾸만 마음이 찔리더니 종래에는 눈물이 찔끔 났다.
이상하게도 <날씨와 얼굴>은 기후 얘기를 하다가도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째서 ‘고기’ 먹는 일을 반성해야 할까. 이주 여성 노동자 얘기는 왜 할까. 소수자 얘기는 또 뭘까. 기후 문제와 페미니즘은 어떤 상관관계일까. 사실 나부터가 읽는 도중 ‘기후위기 얘길 하는 책이라면서 주제가 너무 사방으로 튀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모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는 인류가 자연을 무참히 약탈한 결과이고, 위에 나열한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주제들의 몸통 역시 ‘약탈’이기 때문이다.
나는 육식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동물 복지가 지금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그러니까 이상은 저기에, 몸은 여기에 있는 괴리감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괴리감은 죄책감으로 작용한다. 예전엔 어떤 비거니즘 책을 읽다가 ‘남편이 육식하는 모습을 보니 구역질이 났다’와 같은 강력한 문장을 읽고 내가 욕을 먹은 것처럼 속이 상해 아예 책을 덮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육식과 채식 이야기를 할 때 어느 정도 불편해하는 것을 이해한다.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내 마음 불편하기 싫어서 동물 복지를 위해 육식을 중단한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실천하지 못한 스스로의 죄책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필요가 몹시 있다. 죄책감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인정하고, 다음에 장 볼 때에는 육류 코너 앞에서 잠시 망설이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부가 동물의 이야기를 했다면, 2부에는 동물이 아닌 사람 약자들의 이야기를 한다. 저소득층, 소수자, 노동자, 이주 여성… 너무 많은 얼굴이 말한다. 한 번도 내 시야에 들어온 적 없는 얼굴들이다. 분명 수도 없이 마주쳤을 텐데, 그것 참 기괴한 일이다.
살면서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한 모든 노동이 노동자의 얼굴로, 목소리로 화면에 존재했다. 아무 일 없이 굴러가는 것 같던 오늘 하루는, 땅 위의 수많은 얼굴 없는 노동자가 있기에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굴러간다는 사실.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집을 반드시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슬아 작가의 문장은 뭐랄까 선이 굵은 아크릴화, 그중에서도 나이프로 그린 나이프화 같다. 자글자글한. 표면이 만져지는 듯하고 힘도 느껴지는데 군더더기가 없다. 나는 이런 간결한 문장을 너무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단번에 팬이 되었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어차피’와 ‘최소한’의 싸움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과 그래도 최소한 이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절멸하지 않고 싶다는 의지였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기후 위기의 원인으로 무분별한 공장식 축산을 꼽는다. 작가는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개인의 방안 중 하나로 비건을 제시했다. 또 사회가 약자를 어떤 방식으로 약탈하는지 알려준 다음,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들이 연대한 사회로서의 결과물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토록 평범한 글이 ’ 특별해 보이고 싶은 꼴값‘으로 읽힌다면, 자신이 수호하고 싶은 것이 어느 쪽인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죄책감 때문에 상처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소한의 이념을 행하는 사람들더러 꼴값 떤다고 욕해서는 안 된다. 단지 그게 옮은 방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당신을 욕보인 적이 없다. 당신을 욕보인 것은 당신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