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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Oct 24. 2023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23.08.19



도서관에서 에세이 코너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나에 대해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음식에 관련된 책 표지를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디저트, 그것도 ‘빵’이나 ‘케이크’라는 글자가 들어있으면 뭐가 됐든 일단 집고 보는 편이다.


나는 빵을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것들이 주는 이미지를 좀 더 좋아하는 듯하다. 빵이 주는 푸근하고 고소한 이미지. 코 끝에 걸쳐지는 꼬수운 냄새. 폭신한 촉감, 따듯한 온도. 케이크류가 가진 알록달록한 색감과 아름다움… 이런 이미지에 가득 둘러싸인 하루를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이런 나의 취향을 꼭 만족시켜 주는 책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부터 제목까지. 저자의 직업이 번역가라는 것을 알고 난 뒤로는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생강빵’이 주는 느낌과 ‘진저브레드’가 주는 느낌의 차이를 속시원히 긁어줄 것 같았다.


어쩜 제목을 이렇게 잘 지으셨어요?




이 책은 그야말로 이미지로 가득한 메뉴판이다. <빵과 수프>인 전채요리에서 시작해서 <주요리>를 거쳐 <디저트와 그 밖의 음식들>로 마무리한다. 앞서 빵이 주는 이미지에 홀려 읽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콘비프, 바닷가재 샐러드 같은 메인 요리와 함께 소개받는 소설들도 정말 재미있다. 메뉴마다 어울리는 이야기 하나씩을 소개받는 느낌이랄까.


등장하는 소설들은 대부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하이디>나 <소공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작은 아씨들>… 분명 읽었던 소설인데, <소공녀>에 등장하는 건포도빵은 왜 초면인 걸까? 그가 빵을 나누어주는 장면은 선명한데도 말이다.


좋아하는 작품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 보면 처음엔 그냥 지나쳤던 디테일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오늘은 저자가 발견해 둔 여러 가지 디테일을 내게 ’ 떠먹여 주는 ‘ 날이었다. 그것도 엄청 여러 가지의 맛있는 디테일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처음 들어보는 소설을 음식으로 소개받는 재미도 쏠쏠하다.


’ 클라레 컵‘ 과 함께 등장하는 오헨리의 <아르카다이아의 단기 투숙객들>이라는 소설은 이 아름다운 디저트보다 내 구미를 더 당기게 만들었다. 일주일 동안의 꿈같은 ’ 호캉스‘와 반짝이는 사랑 이야기. 그 달콤한 묘사와 함께 그려진 클라레 컵 일러스트까지! 당장이라도 호캉스를 떠나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또 ‘차가운 멧도요 요리’라는 생소한 음식과 함께 등장하는 익숙한 소설가의 이름, 아서 코넌 도일. 그의 <독신 귀족> 역시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의 교집합을 찾는 것도 재미있지만 나는 이렇게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책을 소개받는 것도 못지않게 좋아한다. 너무너무 즐거웠다.



내가 가장 좋아한 메뉴는 ’ 돼지고기 파이‘와 함께 곁들인 <세인트클레어 시리즈>이다. 이 책에서는 <세인트클레어의 말괄량이 쌍둥이> 편을 소개하는데, 시리즈 소설인 것으로 짐작한다. 세인트클레어 시리즈는 옛 여자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 소녀 소설이다. 말괄량이 소녀들이 기숙학교에서 말썽을 부리는 내용인 것이다.



어린 시절 나도 짧게나마 기숙사 생활을 했었다. 그곳에서 우리도 용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몰래 닭강정이나 토스트 따위를 배달해 야식으로 먹었었다. 사감선생님 눈에 띄지 않게 목욕 바구니에 현금을 올려두고 끈을 묶은 다음 창문 아래로 살살 내리면, 배달온 사장님이 음식과 거스름돈을 바구니에 넣어 올려주는 식이었다. 입가에 양념을 잔뜩 묻히고 수다를 떨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맛있는 냄새 풀풀 나는 향수에 잠기는 것도 좋았지만, 저자가 사감 선생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새삼 다정했다.


으레 이런 기숙학교 소설에서 사감 선생님은 주인공의 앞길을 막는 깐깐한 악당 정도로 치부되고는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사감선생님은 ‘여학생 시절에 딱 그런 야식 파티를 한 적이 있었던’ 어른으로 등장한다.


사감 선생님은 바닥에 어질러진 야식의 잔해 -그러니까 돼지고기 파이-를 보고도 못 본 척해주고, 자신의 유년 시절 추억을 돌이키는 주체적 인물로 묘사된다. 그 마음 씀씀이에 괜히 감동받는 것은, 이제 내가 어른의 반열에 들어섰기 때문일까.




메뉴와는 관계없이 <마틸다>에 관한 이야기도 정말 좋았다. 공교롭게도 아직 <마틸다>를 읽지 않은 입장에서 신선한 소개방식이었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마틸다>를 통해 책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이 겪는 수난, 지적 호기심이나 성취를 갈구하는 여자 아이들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벽에 대해 이야기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책을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을 열렬히 반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저자나 마틸다가 겪는 억압을 내가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런 열려있는 부모님도 이따금 내가 ‘기가 너무 센 여자아이‘인 것을 걱정하고는 했으니,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우겨보고 싶다.


왜냐하면 ’ 책 한 권과 따듯한 음료를 가지고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는 두 사람 무리에 나도 끼고 싶기 때문이다. 꼭 그런 고난이 없어도 두 사람은 쉽게 나를 받아들여줬겠지만.


“마틸다가 결국 새로운 삶을 꾸리고 ‘독서 저녁 식사’를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았겠거니 상상하는” 저자를 상상하는 나. 아, 오늘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책으로 꾸려야지. 책을 읽는 여자들의 유대감이 이라고 뻔뻔하게 우겨본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읽어나가기가 참 아쉬운 책이었다. 오랜만에 취향에 꼭 맞기도 했고, 이런 고전 소설을 내게 맞는 눈높이로 추천받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책 덕분에 새로 읽어보고 싶은 위시 리스트가 또 늘었다. 야단 났다. 월급 직전이라 통장이 바닥인데 말이다. 다행히 내겐 도서관이 있으므로… 돌아가는 길에 도서 검색대에 들러볼 작정이다.


또 뭐든 음식과 연결시키기를 좋아하는 세상의 모든 ‘먹보’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아기자기한 일러스트부터 메뉴 선정까지, 저자는 소설과 음식 파티에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은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소개한 <작은 아씨들>의 ‘에이미’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 맛있는 소설의 세계에서 새로운 취향을 건져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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