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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Nov 02. 2023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23.08.26

사방에 회의주의가 만연하다. 안 그래도 내 주변엔 나랑 비슷하게 인류를 싫어하는 인간으로 가득한데, 24일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한 시점에 우리는 더더욱 말을 잃었다.


그냥 (그) 인간이 먹고 죽어라, 인류는 망해야 한다, 지들 입에만 안 들어가면 끝이냐, 해양 생물들은 무슨 죄냐, 그런 담론들이 오갔고 나는 격렬히 긍정했다. 신이라는 게 있다면 왜 가만있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우리는 항상 다른 집단을 학살해 왔으니 이제와 신에게 불만을 성토한다면 그의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할수록 인류가 싫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까지 미워진다.


왜 살아있어? 세상은 점점 암울해지기만 하는데.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자의식이 과하다. ‘슬기로운 사람’이라니? 어느 슬기로운 자가 자기 집에 제 손으로 불을 지른단 말인가? 호모 멍청엔 스가 따로 없다.



그러니 서고에서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발견한 순간 이 얇은 책을 꺼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퓰리처상 작가가 묻고 어쩌고… 그런 멘트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삶의 의미가 뭔지 말해주겠다는데. 그에 대해 100명이 치열하게 토론해 보겠다는데(사실 그런 내용은 아니었지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윌 듀런트에게 한 남성이 찾아온다. 그는 당신이 내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한다다. 듀런트는 이런 런 말을 해주지만 남자는 설득당하지 않은 기색이 역력한 채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황당할 뿐이었다. 그냥 미친놈 아니야?



그러나 듀런트는 자살하겠으니 삶의 의미를 알려달라는 메시지를 수도 없이 받았다고 한다. 오랜 고민 끝에 혼자서는 절대 답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편지를 썼다. 삶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신 답을 해줄 수 있을 법한 100명에게 편지를 돌렸다.


일부는 답장을 하지 않았고, 일부는 장난을 쳤으며(내가 보기엔 그냥 싸가지가 없었다), 일부는 자기 저서를 홍보했고, 나머지 일부는 진지하게 답을 했다.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는 이 질문과 대답을 엮은 책이다. 근래 읽은 책 중에 가장 치열한 생각을 하게 했다.



듀런트의 엄청나게 잘 쓰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운지 정리가 되는 것 같아서 그의 질문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우리가 젊은 시절 품었던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꿈은 누구나 알듯 인간의 무한한 물욕 앞에서 하루하루 스러져 가고 있습니다. 모든 발명품이 강자를 더욱 강하게 하고 약자를 더욱 약하게 합니다. 모든 새로운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빼앗고 전쟁의 공포를 증식시킵니다. (중략) 철학이라는 전자적 관점하에서, 삶은 지상의 벌레일 뿐인 인류의 발작적 번식이요 머지않아 제거될 행성의 피부병이 되었습니다. 삶에서 확실한 것은 오로지 패배와 죽음뿐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책의 출간 연도가 1920-1930 임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때 서구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의 발전이 정말 인류를 행복하게 했는지를 의심하고 비판했던 시기이다. 어쩌면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듀런트는 일부러 회의적인 부분을 강조해서 질문지를 쓰고 편지를 돌렸다. ‘사람들이 진지한 문제를 회피하려고 기대곤 하는 피상적 낙관주의를 차단한 상태’에서 문제를 논하고 싶었다고 한다. 사실 그가 당대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에게 편지를 썼다고는 하는데,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읽었다.


각 분야의 지식인들은 그들이 몸담은 분야나 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개성적인 답변들을 내놓았다. 나는 그것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어떤 사람의 유쾌함이 부러웠고 어떤 사람의 진중한 통찰이 멋있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만큼 매력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내게 기억이 남는 답장 몇 가지를 꼽아보았다.


우선 헨리 멩켄. 그의 답장은 유쾌하고 명료했다. 자신은 인생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고난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삶이 대체로 즐거웠다고 평한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적합한 일’과 ‘가정적인 애정’ 두 가지를 행복의 수단으로 꼽았다.



두 번째로는 피아니스트 오시프 가블로비치의 답장이다.


그 역시 헨리 멩켄과 비슷한 답을 했다. 바로 예술과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행복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포함한 인류에 대한 시각은 비관적이다. 몇 명이 행복하고 건강하다고 해서, 수천 명의 사람이 구제 불능인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이 과연 예술을 이해할까?라고 소리쳐 묻는 것 같았다.)



세 번째는 헬렌 윌스. 몇 안 되는 여성의 답변이라 더욱 인상 깊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삶에서 완벽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만족스러운 시험 결과를 받기 위해 애쓰는 것, 거실에 둔 조각상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에서 느끼는 감동을 직접 설명하는데, 글이 참 좋았다. ‘인생에 관해 깔끔하고 완벽한 결론을 갖는 것은 젊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며 한 발 물러나는 모습도 보인다.



어쨌든 사람들의 대답을 종합해 보면, 삶의 구성요소를 식별하고 그것에 우선순위를 매길 줄 아는 사람들은 대게 삶의 목표가 확실했다.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었다. 행복하고 또 자기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대체로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헨리 멩켄이나 오시프 가블로비치, 헬렌 윌스 모두 말이다.


언급한 세 사람 이외에도 삶에 대해 멋진 논평을 한 인물들(정확히는 편지들)이 많았고, 그것들에 모두 공감하진 않았지만, 나로서는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여전히 우리는 길을 잃은 미아이다. 그러나 가고자 하는 목표지점이 명확하다면? 또는 길을 헤매면서도 크고 작은 행복을 맛볼 수 있다면? 미아인 채로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가 말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질문을 남기는 책은 오랜만이다. 항상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한 책들을 주로 읽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진리는 이것이다!' 확신하고 온점을 찍어버리는 책들도 물론 좋지만, 끝까지 내게 질문을 던지는 듀런트의 이 책 한 권이 내게는 무척 소중했다. 사람들의 갖가지 답변을 읽어보고 우리는 자신만의 답장을 써야 한다. 책을 모두 읽은 다음 다시 듀런트가 100인에게 돌린 질문지를 읽어보자. 당신은 어떤 답변을 하고 싶은가? 혹은, 어떤 답변을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 우리에게 '자살하고 싶으니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시오.' 하는 인물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으로 그를 살게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나만의 답장을 쓰는 일에 한동안 집중할 예정이다. 비록 듀런트에게 보낼 수는 없겠지만, 최종 수신인은 바로 내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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