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크론보르 성(Kronborg castle)이 있는 헬싱괴르(Helsingor)로 가는 기차를 탔다. 헬싱괴르는 덴마크 동부 셰란 섬 북동부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50분 거리다. 영어 이름은 엘시노어(Elsinore). 스웨덴의 헬싱보리와 외레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인구 5만 정도의 작은 도시다. 500년 전에는 스웨덴의 공격으로부터 덴마크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주말이어서인지 기차 안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만이 띄엄띄엄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 중 빈자리 하나를 찾아 앉았다. 어제까지 75킬로미터 트래킹을 마친 터였다. 멍하니 창 밖 경치를 보거나 책을 펼치면 푹 곯아떨어질 것 같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곳에서 꾸벅꾸벅 졸기 싫었다. 요리조리 포즈를 취해가며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티칵 티칵...
"너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뭔지 알아? <로미오와 줄리엣>이 4대 비극에 왜 안 들어가는지?"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대학 시절 8월의 어느 날이었다. 영문과에 다니던 친구 J가 홍릉 갈빗집에서 주문한 냉면을 기다리면서 나에게 불쑥 물었다. 그날 우리는 햄릿에 관한 자료를 구하러 카이스트 도서관을 갔었다. 리포트를 쓰기 위해 햄릿 자료가 필요했던 J가 나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을 한 터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 다니던 시절이었다. 자그마는 나무 서랍을 열 때마다 퀴퀴하게 삵은 종이 냄새가 새어 나오는 열람실 자료부터 뒤져야 했다. 친구와 모든 것을 함께했던 그런 시절이기도 했다.
홍릉 쪽으로 정문이 있는 카이스트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바닥은 에어컨 바람으로 바짝 차가워진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로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신사와 하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은 숙녀들이 검은색 구두 소리를 또각 또각 내면서 우리 옆을 지나다녔다. J는 열심히 자료를 찾았지만 원하는 것을 끝내 찾지는 못했다.
J는 한 학기에 셰익스피어 한 편을 원어로 읽고 분석하는 것이 한 과목이라고 했다. 학점을 날로 쉽게 먹는다는 내 말에 J는 영문학이 정말 어렵다며 발끈했다. 대한민국에는 영문학 박사가 없다나 뭐라나. 그 당시 대학교수들 모두는 해외에서 '영문학'이 아니라 '언어학' 박사 학위를 딴 거라고 했다.
홍릉 갈빗집은 초등학교 1학년 즈음까지 가족들과 자주 갔었던 외식 장소였다. 아마도 그때는 소갈비가 지금처럼 그리 비싸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갈빗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서로가 "어서 옵셔"를 외쳐가며 손님들을 끌던 꽤 번잡한 식당가였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가 살던 돈암동과는 차로 15분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갈 때는 어떻게 갔는지 모르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 고생한 기억은 또렷하다.
택시는 우리 가족을 잘 태워주지 않았다. 영화 <택시>에 나왔던 '브리샤' 모델은 너무 작아서 우리 다섯 식구가 다 타기가 어려웠거나, 홍릉에서 돈암동까지는 너무 가까운 거리여서 승차 거부를 했을 것이다. 여러 택시를 보내고 나서야 마음씨 좋은 기사 아저씨를 만나거나, 택시비 더블을 불러야만 했다.
J와 나는 냉면을 시켰다. 갈비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대학생으로서는 꿈도 못 꿀 가격표가 붙어있었다."<로미오와 줄리엣>이 4대 비극에 못 끼는 이유는 비극의 시작이 마음속에서 시작되지 않아서란 거지. 4대 비극,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 왕>은 스스로가 파멸로 가는 길을 택했다는 거야.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가 막을 수도 있었는데..."
영문학도 J의 말은 거기까지만 해도 그럴싸하게 들렸다.
"근데 말이지 너 그거 알아?"
"또 뭐?"
"햄릿이 실존 인물이고 셰익스피어가 가상 인물이래."
"뭐? 그게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리야?"
스마트폰으로 바로 검색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그런 자료도 아니었다.
"말 같지도 않는 소리 집어치우고 냉면이나 먹자"
30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 실제 햄릿의 크론보르 성(Kronborg Castle)으로 가고 있다. 이 성 북쪽 건물 입구 근처에는 셰익스피어의 흉상이 있다. 이 흉상 아래의 소개 글에는 "셰익스피어는 덴마크 설화에 나오는 암렛(Amleth) 왕자 이름의 마지막 글자 'H'를 앞으로 옮겨 햄릿(Hamlet)을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다.
1601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햄릿'은 사실 원화(原話)가 있었다는 것이다. 1514년 덴마크 역사가인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의 설화집 '덴마크사'에는 햄릿의 원화로 보이는 암렛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이미 1589년에는 런던에서 햄릿 연극을 상연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크론보르 성에 갔었는지 안 갔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셰익스피어가 이끌던 극단 글로브씨어터 소속 배우들이 이곳 크론보르 성에서 6 개월간 연극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셰익스피어가 직접 방문을 했든 안 했든 크론보르 성의 자료들을 모아 희곡의 무대로 썼고, 이야기는 덴마크 설화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높다. 햄릿이 셰익스피어의 순수 창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크론보르 성 지하 터널로 들어갔다. 으스스 한 소리가 섞인 성곽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지하터널 입구를 쿠웅 닫았다.검은 터널 안은 500년 전 숨결을 담은 듯 퀴퀴하면서도 차가운 공기가 살갗을 감쌌다. 터널 천장은 세월을 뚫고 머리 위로 물방울을 툭툭 떨어뜨렸다. 캄캄한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발 아래쪽에서 촛불 모양의 작은 불빛이 켜졌다.
연극이 시작됐다.햄릿이 아버지 유령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원래는 한밤중에 망루를 배경으로 무대를 꾸며야 하지만 지하 터널의 어둠을 이용했다. 홀로그램으로 된 하얀 유령이 어둠 속에서 피어 올랐다. 햄릿과 아버지 유령의 대화가 시작됐고 관객의 숨결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성 안뜰 한 쪽 구석에는 햄릿 연극 시간표가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는연극 시작을 알리는 메신져가 서있다. 시간표에 따라 키 2미터에 몸무게 150킬로 거구에서 뿜어 나오는 목소리로 성 전체가 떠나갈 듯 연극의 시작을 알렸다.배우들은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크론보르 성 곳곳을 돌며 공연을 했다. 관객들도 무대를 따라가며 선 채로 연극을 구경했다. 나는 사이사이 연극 관람을 빼먹고 성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디가 희곡에 나왔던 곳이라는 건지 전혀 감도 오지 않았다.
햄릿이 실존 인물이었다면, J의 말처럼 셰익스피어는 가상의 인물이었을까? 셰익스피어의 음모론 은 18세기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른 사람이 썼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에 관한 저술이 수없이 많지만 그의 삶을 면밀히 다룬 평전이 단 한 권도 없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 죽기 전까지 37편의 희곡과 154편의 시를 남겼다. 시의 경우 2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가 죽은 다음에 발표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사생활은 더 미스터리다. 태어날 날과 죽은 날은 물론 그의 삶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작품 이외에는 온통 베일투성이다. 셰익스피어는 세계 여러 나라를 배경으로 방대한 지식과 어휘를 사용하여 작품을 썼다. 셰익스피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은 별달리 읽을 만한 서적도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중학교에 해당하는 그래머스쿨을 졸업했을 뿐 부모와 아내 자식 등 온 가족이 문맹이었다. 물론 해외에 나간 적도 없다.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의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영국 내 유명 인사 287명이 공식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만약 그가 허구의 인물이라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누가 썼을까? 많은 후보들이 있지만, 성경처럼 여러 명에 의해 씌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 하기에는 세계 곳곳을 배경으로 평민부터 귀족의 삶과 문화 언어 등 해외에 가보거나 귀족이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사실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리어왕은 스코틀랜드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탈리아에 그 역사적 사실과 장소적 배경이 실제로 존재한다. 셰익스피어는 헬싱괴르(Helsingor) 항구와 크론보르 성(Kronborg castle)을 한 단어로 합쳤다. 바로 '엘시노어'(Elsinore) 성이다.
"To be or not to be ..." 우유부단함의 대명사 햄릿은 당시까지만 해도 신의 영역이었던 삶과 죽음 대한 명제를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기를 원하는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였다. 햄릿은 결코 우유부단하지도 않았다. 숙부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정확한 증거를 잡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 시간을 끈 것이 실수였을 뿐이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문득 3년 후에 또 인생의 무엇을 확인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100% 확실한 것은 없다. 그의 작품을 읽고 느끼는 감동이 셰익스피어의 본질일지 모른다. 나는 최근 햄릿을 두 번이나 읽었다. 대학로에서 연극도 봤다.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다. 젊은 날 스쳤던 이야기가 눈 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가 내 가슴을 뛰게 했다. 크론보르 성은 올 거라고는 커녕 그 존재 자체도 몰랐던 곳이다. 쓰러져 있는 불에 탄 듯 검붉은 벽돌 뭉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원어로 햄릿을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햄릿의 원제는 <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이다.
여행 팁
- 크론보그 성(Kronborg castle) 정보: 덴마크 헬싱괴르(Helsingør) 시에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고성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무대로 유명한 곳이다. 한적한 바닷가 낮은 언덕 위에 서 있다.
햄릿의 무대였다는 이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 역사적인 의의도 큰 곳이다. 바다 건너 스웨덴이 보이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16~18세기 북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덴마크 사람들에게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성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1574년 프레데릭 2세(Frederick II) 때이다. 1585년 웅장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공되었으나, 1629년 화재로 예배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의 재건으로 1639년에 옛모습을 되찾았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한 탓에 여러 차례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그 때마다 보수 과정을 거쳐 1924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1658년 스웨덴의 침공으로 성이 함락된 뒤,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견고한 수비벽에 외곽의 망루까지 덧붙여지면서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은 이미지를 굳혔다. -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 해마다 8월이면 크론보그성 열린 극장에서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이 열린다. 자세한 내용은 www.hamletsenen.dk 를 참조하면 된다. 리차드버튼, 로버트쇼, 크리스토 플러머, 주드로 같은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비비안 리도 오필리아로 공연을 했다.
-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성안에는 매점이나 레스토랑이 없다. 오랜 시간 관람 할 분은 간단한 음료나 간식등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