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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길 Nov 20. 2018

<큰 배낭 메고> 제주

낭만트레커브랜든 in 한라산 둘레길,  길보다 사람

<피엘라벤 폭스 2018 제주> 트레킹에 참가했다. 폭스 트레킹은 스웨덴 아웃도어 브랜드 피엘라벤이 주최하는 국제 행사가 아니라 피엘라벤 코리아에서 따로 진행하는 국내 행사다. 공식 명칭도 국제 행사는 <피엘라벤 클래식>이고, 국내 행사는 <피엘라벤 폭스>다. 한라산 둘레길 다섯 개 구간 총 길이 80킬로미터. 사려니숲길을 뺀 수악길에서 천아숲길까지 네 개 구간 62.5킬로미터를 2박 3일간 걸었다. 내년부터는 스웨덴, 덴마크, 미국, 홍콩에 이어 다섯 번째 국제 행사로 승격 예정이라고 한다.


제주도는 너무 추워

둘째 날 하원마을 야영장. 6명이 빙 둘러앉아 위스키와 막걸리, 맥주를 각자 취향대로 대로 마셨다. 시월의 밤이 내리는 만큼 기온도 따라 내려갔다. 패딩 없는 밤이 깊을수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내일 컨디션을 위해 먼저 일어섰다. 텐트 안 헝클어진 짐들 사이에 침낭이 반듯하게 누워있다. 뜨거운 물통에 데운 침낭 속은 한겨울 온돌방 아랫목 이불 속처럼 뜨끈했다.

텐트에서 듣는 한밤의 숲 속 소리는 가깝다. 100미터 밖  졸졸거리는 얌전한 개울도 등 뒤에서 으르렁대는 사나운 계곡처럼 들린다. 이웃 텐트에서 아이의 전화 소리가 들렸다. "여기 너무너무 추워. 한겨울이야. 엄마". 괜히 와서 고생한다는 짜증과 후회가 목소리에 한껏 배었다. 애써 태연한 척 아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막 침낭에 누웠어. 조금 춥지만 괜찮아." 오늘까지 40킬로미터를 걸어왔다. 내일 23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한다.


새로운 만남

<홍콩 클래식>에서 눈인사로만 스쳤던 소리, 승영, 병지, 성오. 그리고 회장과 같이 움직였다. 다섯 명은 <스웨덴 클래식>에서 만나 똘똘 뭉친 사이다. 2일 차에는 임금이 합류했다.
소리와 성오는 4년 차 부부다. 소리는 "덴마크 클래식"만 가면 4개 피엘라벤 클래식을 완주하는 여자 그랜드슬래머가 된다. 대부분 소리는 시키고 성오는 따른다. 그래도 소리를 향한 성오 눈에는 사랑이 담겼다. 소리도 가끔은 챙긴다. 
승영은 단발 머리에 썬글라스가 잘 어울린다.  딱 보면 깔끔떠는 차도녀지만 보드, 서핑, 백패킹을 좋아하는 당찬 아가씨다. 뒤틀린 무릎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참을 만큼 독한 면도 있다. 결승점을 통과하고 나서야 무릎이 퉁퉁 부었다고 말한다. 병지는 감색 상하 캡 한 벌이 잘 어울릴 정도로 기럭지가 길다. 스웨덴 사람 안드레아스 옆에 섰을 때도 나처럼 오징어가 아니다.

임금은 <홍콩 클래식>에서 출발 전후 숙소를 같이 쓴 사이다. 티타늄 팩은 물론 삼각대 300그램, 스토브 25그램. 모든 장비를 35리터 배낭에 때려 넣을 수 있는 장비 고수다. 40대로 보기엔 새치가 허옇지만 피부가 20대다. 회장은 세 번째 만남이다. 2년 전 <피엘라벤 폭스 송호>에서 뒤풀이를 같이했고, 작년에 <피엘라벤 클래식 홍콩>에서 스쳤으며, 이번에 제주에서 함께 걸었다. 몸에 밴 유머는 분위기 메이커다. 회장답게 <피엘라벤 클래식> 그랜드슬램을 올해 달성했다.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니야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니야." 방수 시계라도 바닷물에 들어가면 고장 난다는 임금을 반박하려는 찰나 회장이 독사처럼 끼어들었다. "형님 대신 말했어요" 소리와 승영이 흉내 대박이라며 배꼽을 움켜쥐고 웃는다. 독사 같은 사람. 어찌 그리 나를 잘 집었나. 한때 사장 앞에서도 "아니 아니야"를 쾅쾅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다 고쳤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편한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안 좋은 버릇이 툭 튀어나오나 보다.

누군가의 말에 토를 달려고 할 때마다 그들은 "아니 아니야"를 앞에 끼워 놀렸다. 몹쓸 내 버릇을 놀리는 걸까. 나에게 반박 당할 이의 무안함을 미리 막는 배려일까. 어느 편이든 자칫 싸할 수 있는 분위기를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그들의 재치가 편하고 좋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만남. 거친 자연 속에서 솔직한 자연의 모습으로 만난 사이.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믿는 동료이고 친한 친구다.


한라산 둘레길

제주에는 368개의 오름과 21개의 올레, 5개의 둘레가 있다. 오름은 제주 곳곳에 솟구친 용암 굳은 길이고, 올레는 해안을 따라가는 바닷길이고, 둘레는 한라산을 끼고 도는 숲길이다. 둘레는 짤막짤막하게 잘 다듬은 오름이나 올레와는 다르다. 백패커가 갖는 거친 숨소리가 있다. 중간에 빠지는 길이 없다. 한 번 들면 끝을 내야 한다. 돌오름길 둘레를 빼면 모두 10킬로미터가 넘는 길이다

16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62.5킬로미터를 걸었다. 빽빽한 삼나무 숲은 눈 길을 가렸고 울퉁불퉁한 너덜 돌멩이는 발길을 챘다. 앞뒤 행렬이 멀어지나 싶더니 어느덧 우리뿐이다. 풉풉 내뱉는 앞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뒷사람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유혹했다.


친구의 조건

결승점에 일찍 도착한 백패커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뒤에 들어오는 다른 백패커에게 박수를 보낸다. <피엘라벤 클래식>만의 암묵적인 룰이다. 완주 축하를 받는 백패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다. 어떤 이는 두 팔을 번쩍 쳐들고, 어떤 이는 비명 가까운 소리를 지르고, 어떤 이는 어리둥절해 하고, 어떤 이는 북받쳐 울고, 어떤 이는 씰룩쌜룩 춤을 춘다. "아까 내가 박수 받을 땐 괜찮더니 지금 왜 이렇게 울컥하죠?" 박수를 보내며 승영이 말했다.

속속 들어오는 트레커들을 향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터벅터벅 들어오는 어린 백패커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저 친구일까? 아니면 저 뒤에 오는 저 어린 친구?' 간 밤에 텐트 속에서 추위에 떠는 목소리로만 만난 친구.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그냥 나이 어린 친구다. 이번 행사에 멋모르고 참가한 어린 친구들이 여럿이다.

까딱하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무릎이 뒤틀리며, 어깨가 시리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며, 추위에 떠는, 어찌 보면 돈 내고 하는 고행 길. 어른도 쉽지 않은 2박 3일 62.5 킬로미터 백패킹 루트다. 어린 친구는 자기를 향한 요란한 박수 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눈물을 글썽인다. '얼마나 집에 가고 싶었을까?' 어린 친구의 울먹임을 바라보면서 나는 입술을 꾸욱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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