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악산
유난히도 따뜻했던 겨울이 지났다. 5개월 만에 백패킹이다. 사실 백패킹이라기보다는 캠핑에 더 가깝다. 파주 감악산 잣나무 숲 임도를 따라 10여 분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 번 백패킹의 목적은 걷기보다는 사진 찍기였다. 올 겨울은 예년과 달리 집구석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더불어 인스타그램도 개점휴업이다. 허세 사진이 필요했다.
겨울이 지나는 감악산 잣나무 숲은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린다는 소문과 달랐다. 조그만 백패킹 텐트 몇 동만이 잣나무 사이사이에 하나둘씩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텐트는 마치 겨울 땅 속을 뚫고 올라온 몽글몽글한 버섯 같다. 잣나무 숲은 언제나 어디나 좋다. 자연의 냄새가 몸속 깊숙이 들어온다. 머리는 속세를 잊고 가슴은 자연을 느낀다. 서울에서 가까운 파주임에도 강원도 오지 어디쯤에 있는 듯한 먼 여행의 느낌은 덤이었다. 허세 사진을 찍기에는 딱이었다.
삼각대를 세 개나 챙겼다. 풀프레임 미러리스, 스마트폰, 고프로를 이용해 여러 각도에서 동영상을 제대로 한번 찍어 볼 요령이었다. 어설픈 콘셉트와 스토리도 준비했다. 렌턴 주둥이에 종이를 덧대 그럴듯한 조명도 만들었다. 좁은 쉘터 안에서 요리조리 촬영 각도를 재가며 각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을 깔고, 프라이팬을 꺼내고, 스토브에 불을 붙였다. 카메라와 삼각대도 한쪽 구석에서 '레디고'를 기다리는 찰나였다.
"저기요, 잠시 합석해도 될까요?" 집에서 담근 과실주라며 이웃 텐트에서 한 분이 오셨다. 마른 몸매에 나보다 한 서너 살쯤 많아 보였다. 같이 온 분들은 이미 1차를 끝내고 한 잠 주무신단다. "아, 네 네 그러시죠. 뭐" 우리 모두는 벌떡 일어났다. 촬영을 위해 꽉 짜였던 비좁은 자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자리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 카메라와 삼각대를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허세 영상을 찍기에는 글러먹은 시추에이션이었다.
포도주인지 매실주 인지 애매모호한 담근 술을 위한 찬사가 이어졌다. "오! 맛 좋은데요", "와우! 직접 담그신 거예요", "아! 파는 것보다 훨씬 낫다" 나와 동료들은 한 마디씩 거들었고 한 잔씩 마셨다. 그분이 김치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잠시 비웠다.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씩 시작했다. "너무 달아서 싫어", "난 달달하니 괜찮은 것도 같고", "파는 게 더 낫다", "텁텁하기도 하고" , "오늘 영상은 다 찍었군 ㅜㅜ"
그분은 커다란 가위와 김치 한 접시를 가지고 곧 돌아오셨다. 손바닥만 한 1회용 포장 김치와 새끼손가락만 한 가위를 가지고 다니는 우리와는 스케일이 달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포기김치를 거대한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냈다. 손에 묻은 김치를 입으로 닦아가며 다시 백패킹 자랑이 이어졌다. 대부분은 먹는 것과 장비에 대한 이야기였다.
머릿속에는 놓쳐버린 영상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담근 포도주가 떨어지고 우리가 가져온 술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그분도 아쉬운 듯 제 자리로 돌아가셨다. 덕분에 인스타그램을 위한 허세 사진은 날아가 버렸다. 모처럼 만에 나온 백패킹에 만족해야 했다. 밤새 겨울비가 내렸다. 투닥투닥 투닥.
집에서 밤새 젖은 텐트를 말리고 있을 때였다. 사진 한 장이 내 스마트폰으로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내가 찍혔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아침 숲 속의 사진이었다. 밤새 내린 겨울비가 만들어 낸 아침 숲이다. 그렇게 사진 한 장이 얻어걸렸다. 준비한다고 나올 수 있는 그런 사진이 아니었다.
가는 길
내비게이션에서 파주 적성면 감악산 낚시터 레져타운(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감골길 48)을 찍고 가면 된다. 감나무 숲까지는 사륜 SUV도 올라갈 수 있기는 하지만 임도부터는 걷는 것이 좋다. 그래 봐야 10~15분 정도다
차로 10여 분 거리에 감악산 출렁다리 주차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