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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만장자 홍사장 Dec 25. 2018

이런 나도 해낼 수 있다는 걸

그냥 내가 바뀌면 될 것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관심 받는 것을 좋아했다. 요즘 단어로 표현한다면 일명 '관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먹고 살기 바빴던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조금이라도 더 사랑과 관심을 받기위해서 본능적으로 몸에 베였나보다. 어렸을 적에는 어머님을 따라 시장가서 장을 보는 게 그렇게 좋았고, 어머님이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항상 옆에 붙어서 도와 드릴 것이 없나 기웃거리곤 했다. 또한 아들이지만 딸들만큼 어머니와 수다 떠는 걸 좋아했고, 아버지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갔었다.


 이러한 관종의 특성이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관심을 받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다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점차 변했던 것 같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러한 성향이 건들거림을 표출되었다. 등교하는 패션(?)이 과감해졌고, 노는 물도 한층 더 높아졌다. 오죽했으면 1학년 때 나의 대해 "밤일하는 놈"이라고 소문이 난 적이 있다. 학교 일과가 마치면 저녁부터 나이트나 주점에서 일하는 그런 ‘노는 아이’인 줄 알았다고 한다. 다행히 소문의 당사자와 친해져 오해를 풀 수 있었지만 그만큼 나는 남들 보기에는 엇나간 사람처럼 보였나보다. 그래도 그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웃기지만 그렇게 봐줄수록 더욱 뿌듯했었다. 속으로는 '너희들은 나를 그렇게 보지만 나는 그렇게 엇나간 사람도 아니라 공부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그런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학창시절은 최대한 튀는 행동을 하며 남들과 다른 평가를 받고 싶어 했다. '이렇게 살아도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어'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런 행동들도 책임이란 명목으로 조금씩 수그러 들기 시작했다. 나는 달라진 것은 없는데 갖춰야 할 것들이 계속 외부에 입혀지기 시작했고, 조직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형화되는 교육에 빠져 들어 어느새 일원화되어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내 자신은 껍데기 속에 넣어 놓다보니 삶이 참 따분하게 느껴졌다. 남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닌, 재미없는 삶에 대한 한탄의 한숨이 나오게 되었다.


 26살부터 시작된 조직생활이었다.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를 표현하는 것도 회사 명함이었고, 나에게 돈을 주는 것도 회사였으며, 내가 하루에 12시간을 살아가는 곳도 회사였다. 24시간 중 회사를 떼어놓고 살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쌓여있는 내일의 일을 걱정하면 눈을 감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10년을 회사란 곳에 메여 있었다. 5년만에 한번의 이직을 선택하여 다른 조직을 찾아갔지만 사실상 조직이란 울타리는 거기서 거기인건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열정이란 것을 불 태울 수 있겠지만,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일이란 것을 알아채는 순간 그 불씨의 원동력은 잃게 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무엇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최초의 질문에 답을 찾기에는 회사라는 조직은 참 어렵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한 방향을 봐야하고 그 방향을 바라봤을 때 거기에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의 뒷통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뒷통수만 바라봐야한다는 사실은 그리 달갑지는 않다.


 아직도 나에겐 예전 학생 시절의 기질이 남아 있나보다. 남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너무나 갑갑하고 뛰쳐나가고 싶다. 찢어진 청바지도 입고, 머리에 염색도 하고 손목에 타투도 세기고 싶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행동을 통해 관심을 받고 싶은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그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조직 밖의 세상에 내가 직접 발 벗고 나가서 경험해보고 싶다. 분명 어떤 이는 걱정을 하고, 어떤 이는 손가락질 할 것이다. 사실 나는 그 시선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자신들과 다름을 평가하는 그 시선들 말이다. 그것보다 더 쾌감을 느끼는 것은 그 다름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게 해줬을 때이다. '어라? 저렇게 해도 잘 사네?' 라는 어이없는 표정을 보고 싶고, '나는 잘 살고 있어요'라는 당당한 표정을 그들에게 지어주고 싶다. 그것을 내 몸을 직접 보여주며 체험해보고 싶은 어찌보면 철없는 아이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10년동안 조직생활을 해오면 내 자신 중 많은 것을 숨기고 살아왔다. 은연중에 표출된 것도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내지는 못했다. 내가 바라보는 곳은 회사에서 꿈을 이룬 사람들이 아니다. 회사 밖에서 자신만의 일을 하면서 당당하게 꿈을 이룬 사람들이다. 걔 중 몇 번을 실패해서 힘들어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성공을 쟁취하여 떵떵거리면 살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분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바람 잔 날 없는 곳에서 매일을 풍파와 싸워야하는 것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갇혀있는 내 모습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선은 많이 변했다. 안쓰러웠던 시선이 지금은 존경스러움으로 변했고, 배워야 할 사람들로 바라보고 있다. 남을 위해 충성스럽게 싸우는 것과, 나 자신을 위해 당당하게 싸우는 것에는 분명히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아직 나는 느껴보지 못한 그 뿌듯함과 성취감을 그들은 이미 느꼈을 것이고 그것으로 더욱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부럽다.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 나도 그들처럼 나를 위해 풍파에 맞서 싸워야하는 대향해로 배를 돌리고 싶다. 함선처럼 위엄있고 거대하진 않겠지만, 신속하고 단단한 나만의 보트로 나만의 길을 개척해보고 싶다. 반드시 내 손으로 그 거대한 함선을 사고 말겠다. 그 함선에 내 가족들을 태우고 앞으로 있을 풍파에도 끄떡없는 단단함으로 지켜줄 것이다.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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