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처받을 것이 두렵다. 그래서 타인과 가까워지지 않으려 한다.
두 번째로 생각난 나의 강력한 단점이자 너무도 안타까웠던 부분은 바로 타인에 대해서 내가 기본적으로 냉소적이고 냉담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째서 이런 성격형성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어린 시절을 되짚어봤다.
(어린 시절 자꾸 소환해서 미안...)
굳이 과거를 자꾸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내가 과거에 겪었던 그 사건들이 나로 하여금 상당히 정신적으로 커다란 트라우마 내지는 상처를 입혔고 그에 대한 내 나름의 반응으로 지금의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듯이, 해서 나는 과거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해보았고 신기하게도 내 단점과 관련된 일들이 뭐가 있을지를 떠올려보면 생각이 나지 않거나 막연한 게 아니라 확실한 상황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에게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셨다.
아버지는 상당히 다혈질이고 괴팍한 성격을 지니셨는데 어머니께 듣기로는 아버지의 친부인 할아버지께서도 그런 성향이셨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내가 어린 시절 이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에 나는 할아버지를 직접적으로 겪을 기회가 없었다.)
기억나는 한 장면은
아버지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머니를 슬리퍼로 때리고 있었다.
소파에 누운 채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와 남동생은 아무런 대책없이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좀 더 적극적이었거나 용기가 있었다면 어머니를 감싸안으면서 아버지더러 그러시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상황에 겁에 질려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아버지에게 맞는 어머니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 뒤로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신체를 폭행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사실 위의 사례도 내 기억이 맞다면 저때 한 번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언가 본인이 생각한 것과 일이 다르게 흘러가면
괴팍한 성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시면서 본인의 옷을 찢거나 무척 격렬한 감정을 토해내면서 울부짖거나 하는 행동을 반복하셨다.
처음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너무도 두렵고 안타깝게 느껴졌지만 그런 일들을 여러 차례 겪게 되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행동양식 하나를 은연중에 터득하게 됐다.
그게 바로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저 남의 일인 것처럼,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태도였다.
그것이 내 내면에서 타인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로 깔리게 되었고, 해서 나는 커서도 기본적으로 인간을 대할 때 내가 절대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타인이 내게 친해지려고 내 삶에 간섭을 하게 되면, 선을 넘었다고 느끼면서 무척 불안해졌다.
내게 있어서 기저심리는 타인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타인이 내게 아무런 간섭이나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타인과 나를 철저히 분리하고 단절시키는 거였다.
그래야만이 타인이 무슨 짓을 하든(악을 내지르든 폭력을 행사하든 욕을 하면서 겁을 주든) 내가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내 안타까운 성격 형성에 대한 근원은 내가 과거에 겪었던 일들에서 기원했고, 나는 비로소 이제서야 그것들을 깨닫고 직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과거를 되짚어보자, 놀라운 사실도 한 가지 깨달았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건 그때 한 번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순간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그 당시의 영상이 재생되듯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제 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인지라, 그 사실을 떠올리면 가슴이 섬뜩해지기까지 한다.
부모로서 내가 아이에게 폭력적이거나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겪게 하면, 그걸로 인해 아이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부모되기가 어려운지가 새삼 실감이 났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하지만 잘못된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니, 앞으로라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각성하며 조심하고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과거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나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나름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학급임원도 했었으니까.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부터 미묘하게 점차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해갔다.
내가 기억나는 건 그당시 학급에 나와 비슷한 이름을 지닌 기가 센 여자아이가 있었고 나는 그 아이에게 무척이나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부터 소극적으로 움츠러들게 되었던 것 같다.
그것이 계속해서 쭉 이어졌고, 어느새 나는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 방어적인 태도로 대인관계를 맺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내가 고2까지 이과였다가 고3때 전과해서 문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밥을 먹을 때, 마땅히 먹을 친구가 없어서 난감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랑 고2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중 한 명이 나를 챙겨줬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의 이름은 지금도 기억한다. 성씨까진 가물가물한데 이름과 얼굴이 무척 선명하다. (혜주였다. 이름도 참 예쁘다.)
그 순간을 떠올려보면, 사람이 타인에게 갖는 약간의 관심이 얼마나 타인에게 힘을 주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게 된다.
나도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매인 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단절된 삶을 살 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이고 사람을 향한 애정어린 시선을 지니고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부정적 경험으로부터 내 자신을 분리하는 것.
그게 결국엔 내가 타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하고 냉랭한 태도에서 벗어나 타인을 따스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이젠 알고 있다.
문득 과거의 경험이 자꾸만 현재의 나를 옭아매는 걸 떠올리고 있자니, 한 가지 사례가 떠올랐다.
[학습된 무기력]에 관해 언급할 때에도 주로 언급되는 이야기이다.
서커스단에서 키우는 코끼리는 어릴 때부터 단단한 나무기둥에 묶어서 키운다고 한다.
코끼리는 당연히 그 속박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지만, 어린 시절에는 힘이 부족한지라 도통 벗어날 수가 없다.
부정적인 경험이 누적된 코끼리는 나중에 덩치가 커져서 훨씬 힘이 세져도 제 몸집보다 작은 나무에 매인 채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나는 문득, 그 코끼리가 나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어쩌면, 몸도 마음도 여러가지 경험도 훨씬 많이 경험한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어린 시절에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해보자, 이젠 나를 얽어매는 그깟 나무기둥따위 시원하게 뿌리뽑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못하겠는가. 충분히 할 수 있다.
다만 내가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여태 살아왔던 행동양식을 바꾸기가 번거롭기 때문에 변화의 순간을 망설이며 주춤대고 있는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젠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변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야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