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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Jun 15. 2018

혼자서 지금까지 잘 자란 줄 알았지

  화목한 가정이란 누구나 기대하는 실체없는 이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


내가 너만 아니었으면 네 아빠랑 결혼 안 했어

내가 엄마 속을 뒤집을 때마다 들었던 레퍼토리 중 하나인 이야기,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마음에는 생채기가 남은 문장이다. 엄마의 결혼과 내 존재가 무슨 상관인지, 왜 그렇게 나를 달달 볶지 못해서 안달인지 어렸을 땐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가 감정이 좋지 않을 때마다 무방비 상태에서 들어야 했던 좋지 않은 단어들은 답이 없는 질문처럼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아버지를 닮아 융통성이 없어, 기분이 나쁜 이야기를 들으면 곱씹고 또 생각하면서,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야 하는지 소화하기 위해 시간이 꽤 필요한 사람으로 자랐다.


가장 예민했던 사춘기 때, 부모님이 자주 싸워서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혹은 공포심에 늘 시달렸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님이 나의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보기 좋게 부서졌다. 부모의 부재가 인생에 찾아올 수도 있고, 믿을 사람도 없는데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나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냐고 누가 물으면 아무런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것만 같다. 지금은 그나마 부모님이 기력이 쇠하셔서 덜 싸우시지만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은 늘 외면하고 싶다.


아버지의 30대, 장가가는 날


아버지는 부부 싸움할 때 모습으로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분명히 어렸을 때 앨범을 뒤져보면 아버지 회사에 따라가서 내가 찍힌 사진이 제법 있는데, 엄마의 심리적인 대리 남편 역할을 해야 했던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마음속에서 버리기로 선택했던 것 같다.


싸울 때마다 부모님이 내뱉는 때론 찰지고 험한 막말은 “밥은 먹었니”와 닮은 일상어였기에 내 삶에서도 왕왕 튀어나온다. 자라면서 쌍욕은 밥 먹듯이 들어서 한 귀로 듣고 흘리는 연습은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욱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며, 말이 안 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주입식으로 들었기에 그런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아버지란 존재는 “돈을 버니까 소중한 가족을 저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구나" 싶어 일하는 여성이 꼭 돼서 내 앞가림은 절대로 남편이 아닌 스스로 해야 된다고 다짐하며 살았다. 자라면서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알아서 잘 살았으면 싶지만 꼭 내 생각대로만 되진 않았다. 성인이 되고 독립한 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때늦은 후회를 할까 봐, 일부러 안부전화도 하면서 사랑해보려 애써 노력했지만 제풀에 꺾였다. 부모님과 대화는 늘 낯간지럽고 민망하다.


태어나면서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존재였다는 느낌은 나와 부모님 사이의 어떤 거리감을 만들었다. 진짜 힘든 일이 아니고선 부모님에게 속내를 쉬이 드러내지 않는 딸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부모님이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어쩌면 살아내기 위해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는 묻어버렸다. 가족이 있으니 외롭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 외로움을 쥐어짜는 인간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가장 친밀해야 할 관계에서 경험한 불신은 관계를 맺는 다수의 타인을 대하는 방법에도 적용됐다. 일로 만난 사람은 일로 끝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만난 상대방에겐 큰 기대함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을 도구처럼 대하는 내가 있었다. 종종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또 멀어지는 관계는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나니 혼자일 때, 당연했던 독립적인 성향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거리감이 남편과 나 사이에 작은 균열을 만드는 것 같다. 원래 나는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고, 받거나 버림받고 싶지도 않았다. 내 안의 냉혹한 감시자가 있으니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다칠 일도 없고 아쉬움도 없다고만 여겼다.


마냥 씩씩할 것 같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요”라는 말로 착한 사람인양 얕은 관계를 맺으면서 돌아서면 마음이 꼬여서 쉽지 않았다. 때론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도 휘둘렸다.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눈물이 나는 장면이 아닌데 눈물이 났다.


"화목한 가정이란 누구나 기대하는
실체없는 이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by 나의 두 사람, 김달)

가정에서 부모의 하나되지 못함은 자식 입장에서 책임감이 막중한 첫째라는 정체성이, 헤어지면 안되는데 하는 두려움을 다독이며, 19년을 보냈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부모와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크게 요동하지 않는 환경이 나를 살렸다. 이십대 초반에는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서도 근로장학생, 학교 신문사 기자활동을 하면서 부모가 주는 용돈으론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보려고 애썼다. 그때부터 나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었다.


열심히 해야만 부모라는 울타리를 가뿐하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외국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으련만, 독립을 한 후에도 부모는 결혼 그리고 출산, 남편 등 언제부터 그랬다고 부딪히고 잘되라는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했다.


얼마 전에 출산교육을 들으러 갔다가 아기를 낳는 영상을 봤다. 마음이 먹먹했다. 내가 낳는 장면도 아닌데 계속 보고 있었으면 울고 나왔을 것만 같았다.

내 나이 30대 중반


왜 그랬는지 생각을 해보니, 나는 지금까지 아무런 도움도 없이 혼자 잘 자랐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지낸 게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못하는 것인지 안하는 것인지, 뱃속 태아의 성별이 나와서 알려줬을 때도 비수가 되는 한마디를 날렸다.


너랑 똑같은 자식 낳아서
고생 한 번 해봐라

자녀가 생기길 엄마는 성모마리아에게 가서 그렇게 기도를 드렸다고 했더니, 막상 생기니까 고생을 하라니, 모든 말을 다 진심으로 받으면 나는 엄마랑 살 수가 없다.


부모님은 고향애, 나는 서울에서 타향살이 중이니 어느 정도 유지되는 거리감이 혼자서 잘 자랐다고 여기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사회생활해서 내가 모은 돈으로 결혼을 했고, 부모님과 떨어져 있으니 혼수 준비도 알아서 나 혼자 했다고만 생각했다. 찬찬히 돌아보면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늘 혼자인 것 같이 굴어도 절대 혼자가 아니었다. 어떤 기준이나 평가의 잣대를 들이밀었을 때, 못난 부모라도 자식을 대하는 마음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아빠도 엄마도 내가 첫째라 육아도, 사랑을 가르쳐주는 것도 처음이어서 서툴렀을 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것만 같다. 이제 내가 부모가 되어야 하는 입장이 되니 철이 드는 걸까 아니면 상처가 나으려고 하는 걸까.


부모가 자식인 나에게 해준 좋은 것들은 왜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쥐어짜야 겨우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상처받은 것들만 마음에 비수처럼 꽂혀서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결국 부모의 진심을 왜곡하고, 어그러진 채로 비련의 여주인공 놀이를 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되지 않으면 혼자서 살아온 시절을 버틸만한 힘을 잃어버릴까 봐 또 무서워서 부모님께 매몰차게 뒤돌아선 내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아니었으면 엄마와 아빠가 한 가족이 되어 내 밑으로 딸 둘과 아들 하나까지 얻지 못했을 텐데... 아무렇게 내뱉은 엄마의 말 뒤에 숨은 속내는 ‘자식 때문에 지지고 볶아도 산다’는 말이 생략된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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