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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Aug 04. 2018

그림을 그리며 생각한 것

퇴사하고 그립니다 - 일러스트레이터 아방쌤과 함께 드로잉 20시간


    

기록은 누군가의 기록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


작년 11월부터 나는 1인 미디어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를 마음에 품었다. 회사에서는 텍스트만 쓸 줄 아는 척하고 누군가 좌지우지 하지 않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었다. 삶의 순간마다 무언가에 빠지는 소재가 다양한 편인데 한 가지 주제에 빠져 열정이 충만할 때,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을 타깃팅 해서 도움을 주고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회사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텍스트만으로 표현하는데 한계도 느꼈다. 글도 쓰고 영상 편집도 가능하면 같은 조건에서 봤을 때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평생 다닐 회사도 아닌데 그곳만 믿고 다니다 이곳을 떠나게 될 때 개털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사비를 털어 포토샵, 일러스트, 프리미어를 컴퓨터학원에서 수강하기 시작했다.      


뉴미디어와 SNS 플랫폼이 열리면서 텍스트뿐 아니라 영상과 편집, 디자인까지 하는 이들이 필요한 시대로 바뀌었고 일단 하면서 생각은 다음에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 역시 발 빠르게 워드프레스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고 나는 디자인과 텍스트 편집을 다루는 일로 업무가 바뀌었다.      


정식 업무가 끝나고 나는 오후 8시에 시작하는 컴퓨터 강의를 들으면서 회사에 수강 사실을 공유하지 않았다. 원소스 멀티유즈를 외치는 전략가 J이사가 내가 무언가 배운다는 사실을 알면 한 명이 감당하는 일도 많은데 추가로 일을 더 시킬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유튜브로 포토샵 연습하고 있다고 얼버무리긴 했지만 뭔가 배우는 티는 났다. 업무가 끝나면 전 날 배운 기능을 복습하거나 나만의 콘텐츠를 기획했다. 갑자기 하지 않았던 야근을 2개월 정도 밥 먹듯이 할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학원에서 가르치는 건 기본적인 내용이었지만 나에겐 신세계였다. 웹디자이너가 할 만한 일을 나도 해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이미지 편집을 웹디자이너에게 맡기면 매번 일이 늦어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작업물을 받아야 해서 불편했다. 내가 머릿속에 상상한 이미지를 스스로 구현하고 싶은 갈증이 일하면서 늘 있었는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서 유레카였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배우면서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다. 학원에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가 하는 특강도 열심히 찾아들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글을 쓰는 일은 하지 않고 이미지나 디자인 편집으로 뛰어들 것만 같은 열정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텍스트와 이미지 편집을 혼자 하려면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렸다. 원래 하던 방식대로 매일 3개씩 콘텐츠를 업데이트하는 게 일이라 예전처럼 텍스트만 겨우 만지고 있었다. 시간은 부족했고 J이사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외치며 자꾸 쪼아댔다.


뭐든 토해내야 하는 월급쟁이 입장에서 오디오 콘텐츠를 기획하다가 편집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아서 하다 말았다. 회사에서 일에 대한 자율성이 압박으로 바뀌면서 무언가 시도하고 싶은 욕구가 사라져 갔다. 때마침 나와 친한 이들이 줄줄이 퇴사를 하면서 비전이 보이지 않는 그곳을 나도 나왔다.      


나는 퇴사를 기념하며 배우고 싶었던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취미 미술 10주 과정 코스를 등록했다. 손으로 그리는데 익숙하지 않은 발로 하는 낙서처럼 드로잉을 시작했다. 홍대 호미화방까지 가서 A4용지 120그램짜리 스케치북과 4B와 HB 연필, 지우개, 36색의 색연필까지 구매했다. 살면서 이런 기회가 아니면 가볼 일 없는 화방에 가니 드로잉 관련 종류만 수십 가지여서 마냥 신기했다.      


첫 수업하는 날,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선망하는 브랜드 마케터 뀰이 매일 사인펜으로 그림일기를 그리는 것처럼 기록해보고 싶다는 목표를 말했다. 때마침 불러가는 배에 대고 말을 거는 태교는 오글거리고 임신한 기간 동안 먹었던 음식을 그림으로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뀰이 글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주된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였다.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쉽고 빠르게 이해시키기 위해 처음에는 사진을 사용했다가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이 가능한 그림을 글에다 고명처럼 얹기 시작했다. 롤모델인 뀰의 SNS에 들어가 그녀가 쓰는 사인펜을 사려고 이태원 디앤디파트먼트까지 가서 똑같은 제품을 구매하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그림을 그리면서 해보지 않으면 모를 감각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글은 세밀하고 자세하게 논리적인 문장으로 표현할수록 섬세한 결이 살아난다. 그림은 주인공인 피사체가 돋보여야 주위에 더불어 그린 것들이 살아난다.


그림도 글처럼 그리는 사람의 편집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림 그리는 일 역시 관찰력과 자신만의 관점이 중요했다. 매주 2시간씩 한 공간에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이들마다 자신의 스타일이 달라서 신기했다.     


10주, 시간으로 계산하면 20시간이지만 주 1회 가지 않았던 화실 밖 일상에서 습관처럼 그리려고 노력했다. 매일 먹는 음식이 점점 비슷해지면서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타올랐던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볼 틈도 없이 흥미는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퇴사하기 전에는 즐겁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돈이 아까워서 끝까지 열심히만 했다. 그랬더니 남는 건 경험 같은 체험이고 자기계발에 비춰봤을 때 남는 게 별로 없었다. 퇴사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재미있지 않으면 멈춰도 괜찮았다. 가르치는 선생님은 정당한 대가를 받았고 수강생의 열심과 자유도에 따라 가능한 취미였기 때문이다.  

   


취미 미술로 수강한 클래스에서 어떤 사람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커리어 전환을 위해 걸렸던 시간이 8개월이었다고 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뿐 커리어 전환을 꿈꾸지 않았다. 무언가를 배울 때 의욕과 열정이 넘쳐서 나는 결과만 보고 과정의 값을 계산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는 나 자신이 보인다. 급한 성격에 맞게 결과가 빨리 나와야 하는데 드로잉을 하면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흥미를 잃어버린 걸까. 세상에 내 생각대로 되는 일은 돌이켜보면 거의 없지 않나.      


나는 돈과 시간을 지불하며 그림, 글쓰기를 경험하며 '정확히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를 증명하고 싶었다. '표현한다'는 동사는 누군가에게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매일 시간의 무게를 견디어야 가능한 일처럼 다가온다.


그림을 그리면서 낙서 같지만 글과 덧붙여 표현할 도구를 얻었다. 이젠 남은 건 꾸준히 시간을 들여 나만의 기록을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잘 그릴까 고민할 시간에 스케치북을 꺼내 그려보고, 이렇게 하면 잘 쓸까 머리 굴릴 시간에 엉덩이를 붙인 채 글을 남겨야겠다.



아방쌤 드로잉 수강 인증샷

어쩌면 나만을 위한 그림 그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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