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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니 Jun 21. 2023

[부암동파밍클럽 6/17] 무르익은 계절의 시간

텃밭에서만큼은 무르익어감을 매 순간 자연을 통해 배워가고 있다.

절기상 하지인 6월 21일.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오늘 전국에 여름비가 내린다. 하지 전후로 주로 감자를 수확한다. 부암동텃밭은 다른 곳보다 기온이 낮아서 아직 감자꽃도 피지 않았고 감자 알이 그리 굵지 않아서 언제 수확할지 생각하고 있다.


/ 아침텃밭열기


지난주 토요일, 노냥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단오 행사가 있었다. 공간의 노후로 발전기금 차원으로 부모들이 십시일반 아나바다처럼 경매와 무인판매를 진행했다. 그 일환으로 작은 채소가게가 열렸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침 7시 30분에 텃밭에 다녀왔다.


새벽녘 이슬이 촉촉하게 작물보다 맺혀 있었다. 날이 무더운 건 사실이지만 자연은 온습도를 조절하면서 그렇게 알아서 작물을 키워주고 있었다. 땅이 촉촉해서 잡초를 뽑는 행위도 수월했다. 함께 하는 텃밭메이트 솔방울의 곡괭이 예찬론에 나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부암동텃밭은 청계산처럼 잡초가 무성한 곳은 아니다. 그래도 잡초는 어떤 땅이든 존재한다. 아이를 돌보러 또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빠르게 곡괭이질을 했다. 일손으로 셋째동생도 데려가서 작물 수확을 맡겼다. 필요한 순간 동생이 집에 오는 신기한 일이 발생한다. 그 전날 잠을 자고 간다고 해서, 일찍 일어나는 친구라 텃밭에 데려갔다.


모자가 필요 없을 정도로 아침녁텃밭은 활기찼다. 1시간 정도 있으니 오전 8시부터 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랑과 이랑에 자리한 잡초를 뽑았다. 방울토마토의 곁순은 없는지 열심히 하나씩 살폈다. 텃밭메이트 솔방울에게 생강이 싹이 났다며 자식자랑하듯이 알렸다. 생강은 처음 키워보는 거라 막 알리고 싶었던 심정이었다.


완두콩은 수확해서 땅을 비워야 하는데 아직 열매가 남아있길래 다음으로 미뤘다. 대신 열무를 내놓기 위해 뽑았다. 실하게 잘 컸다. 다행히 터전 채소가게에서 팔렸다. 무농약, 무공해, 무경운이 빛을 발하는 순간인가. 아니다. 자연이 거저 키워줬다. 생각보다 잘 자란 열무가 신기했다.


혹시 몰라 비트도 수확했다. 조금 더 알이 여물어야 했다. 3월에 심을 때 비트도 궁금한 작물 중 하나였다. 사실 나는 비트를 잘 먹지 않는다. 텃밭은 호기심을 창작하기에 참 좋은 판이다. 브로콜리도 잘 자라고, 적양배추는 열심히 자라는 중인데 장마가 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 텃밭 허브와 풀들의 폭풍성장


올해는 꽃도 텃밭에 참 많이 심었다. 캐모마일은 모종으로 작게 시작했는데 6월쯤 오니까 키가 크고 비바람에 제 몸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자랐다. 다음번에 캐모마일을 심을 때는 땅을 더 넓게 보고 심어야겠다. 중간에 옮겨주기도 애매할 정도로 크게 자란다. 캐모마일 옆에 캣박하를 심었는데 서로 경쟁하듯이 자라고 있다.


레몬밤도 제 목소리를 마구 낸다. 조금 잘라주긴 했지만 그 시기를 놓친 기분이다. 오히려 로즈마리가 텃밭에서 잘 자라질 못해서 자리를 옮겼다. 로즈마리는 바람통로가 중요한데, 퇴비 박스 옆에 뒀더니 잎만 무성해지고 위로 크질 못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위치를 바꿨다. 잘 자라고 있을까, 몸살을 좀 앓겠지만 잘 커줄 것이라 생각한다.


뒤편에 체리세이지와 라벤더, 마가렛, 레몬밤타임도 군락을 이루듯 폭풍성장하고 있다. 작년에 내가 기른 허브로 차를 만들어내면 어떨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걸 올해 조금이지만 실험해보고 있다. 캐모마일은 수확해서 말려두었다. 캐모마일꽃의 맛은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맛이다. 조금 다른 건 국산 캐모마일이라는 점!


캐모마일은 무당벌레가 좋아한다. 나중에 너무 큰 캐모마일을 수확하고 꽃마다 무당벌레 유충이 많아서 버렸다. 무당벌레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노지월동이 가능한 야생화 에키네시아 4포트도 드디어 꽃망울이 보였다. 아마 이번주에 텃밭에 가면 예쁘게 피었을 듯하다.


다년생 그라스 스티파 포니테일은 요즘 제 미모를 뽐내느라 바쁘다. 작은 모종일 때는 대머리아저씨 같더니 풍성해지고 꽃을 피우며 완숙한 모습을 드러낸다.


텃밭의 한 페이지가 지나가고 있다. 이제 가을텃밭에는 무엇을 심을지 미리 그림을 그리고 상상해봐야 한다. 이곳에서 배추가 잘 자랄지 모르겠다. 열무나 얼갈이가 잘 자라니 크게 상관없어 보이기도 한다.


/ 텃밭에서 나도 무르익어가는 중


무르익다: 과일이나 곡식 따위가 충분히 익다 / 시기나 일이 충분히 성숙되다

부암동텃밭에서 청계산의 영광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배우는 건 많았다. 작물은 몸살을 앓아가면서 그곳에 적응해 갔다. 나란 인간도 그런가 질문하면 선뜻 그렇단 답을 내리기 어렵다. 나는 도망치기 바쁜 인간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무르익으면서 텃밭은 제 얼굴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마치 저를 보세요라고 크게 말하는 느낌이다. 보게 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 텃밭에 존재한다. 잡초를 뽑고 벌레를 치우는 일은 힘에 부친다. 그럼에도 텃밭 채소가 내게 건네는 수확의 기쁨은 그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다. 수확한 채소로 매일 밥상을 차리면서 보이지 않는 풍성함을 먹고 마신다. 어디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풍족함이다.


텃밭을 하면서 비가 싫었던 나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달라졌다. 작물에게 보약 같은 비가 내리면,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지 상상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바람과 햇빛 그리고 비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시기나 일이 충분히 성숙되어 무르익는다는 동사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올해 텃밭에서도 몸소 경험했다.


현실에서 내 일은 무르익기보다 도태되고 노화되어 가지만 텃밭에서만큼은 무르익어감을 매 순간 자연을 통해 배워가고 있다.

아침텃밭열기
(좌) 텃밭 들꽃 양동이갬성 (우) 열무와 예쁜 비트 3개
방울토마토의 반란. 왜이렇게 큰 것인가
얘는 진짜 방울토마토 익어가고 있다
빼꼼한 콜리플라워
(좌) 자리를 옮긴 로즈마리 (우) 6월 어느날 텃밭
(좌) 캐모마일허브차 (우) 캐모마일 꽃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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