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은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던 시쓰기였다
1848년 에밀리 디킨슨은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에게는 아버지가 자신을 다시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2학년이 되자 115명의 반 학생들 가운데 단 23명이 돌아왔다. 당시 여성들은 대부분 대학에 다니지 않았고 학위 과정을 마치는 경우는 더 적었다.(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정원, 85쪽)
시인이자 정원사였던 에밀리 디킨슨. 초여름 관련 정원 이야기 중에 위에 발췌한 구절이 내 눈에 들어왔다. 115명의 학생들 가운데 23명만 다시 공부를 이어갔다는 말, 여성들 대부분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진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도 꾸준히 시를 썼던 디킨슨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호기심이 커졌다.
<모두가 예쁜데 나만 캥거루> 해설에 보면, "56세에 신장병으로 추측되는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시인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은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던 시쓰기였다"라고 이야기한다. 평생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무언가는 환경과 상황을 모두 뛰어넘는 걸까. 에밀리 디킨슨은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신기한 작가다. 난 평생 무얼 놓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걸까 돌아보게 됐다.
감응의글쓰기 후속모임에서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을 돌아보며 관련 글감을 나눈 적이 있다. 내가 글쓰기를 잘하고 싶어서 계속하는 일로 소개한 건 '시읽기'와 '음악듣기'였다. 쓰는 감각은 시각과 청각으로 공감각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글과 관련한 글감을 정리하면서 내 마음에 묻혀둔 한 지점을 만났다.
'나, 아직도 글을 쓰고 싶은 인간, 사람이구나.'
그리곤 정신을 놓고 에디터 관련 직무를 검색했고 지원했다. 가장 잘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직업 그걸 찾아야 한다. 쓰는 그 자리에 있고 싶다는 실낱 같은 욕망. 에밀리 디킨슨은 평생 시를 놓지 않았다는 구절에서, 내가 놓지 않고 싶은 것도 글쓰기와 일이었다. 물론 아직도 나는 망설인다. 글쓰는 그 일을 다시 계속해도 되는 건지 스스로에게 묻지만 답이 보이지 않는다.
쓰는 자리에 있어야 유리조각처럼 부서진 그곳에 다시 생기가 돌 것 같다. 쓰기의 상처는 쓰는 일로 회복하고 싶다.
평생 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창업, 사업, 내 일 이런 걸 품고 있다. 얼마 전에 면접본 곳에서 사무직으로 꿈꾸는 비전을 질문받았다. 명확하진 않지만 내 사업을 하고 싶어서 회계 쪽으로 업무 지원을 했다고 답했다. 회사 입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다. 자기 사업하겠다는 얘를 들일 필요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내가 뽑히지 않더라도 회사는 많고 일하고 싶은 사람도 꽤 많다. 연봉이 낮아서 지원자가 많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은 지원자가 선호하는 곳이었다. 면접은 서로의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자리라고 했다. 매주 월요일 명상을 한다길래 좋아서 지원했지만 사적인 대화가 명상을 곁들여 오간다길래 식겁했다.
어쩌면 나는 직무나 회사가 아니라 직업, 창직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마음에는 문이 많아 -
나는 그저 노트할 뿐 -
혹시라도 달콤한 "들어오세요" 들릴까
귀를 쫑긋하고 있을 수밖에 -
퇴짜 맞더라도 슬프지 않아
내겐 늘 있는 일이니까
어딘가, 거기 존재하는
지존(Supremacy)-
에밀리 디킨슨의 고백이지만 나 역시 "퇴짜 맞더라도 슬프지 않아"라고 주문을 외운다. 불합격 결과를 받으면 하루가 걸려서 회복됐던 일이 한두 시간이면 해결되고 만다. 과거와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 현재, 지금, 여기를 살아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