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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cElephant Mar 11. 2020

나를 인식하는 방법

타인이 아닌 내가 주체이기를

한 초등학교 교사가 트위터를 통해 학급에서 실시한 '자신의 눈에 대해 설명해보자'는 활동의 결과를 공유한 적이 있다. 여자아이들은 '눈이 작다', '쌍꺼풀이 없다' 등으로 적은 반면, 남자아이들은 '0.3이다'라고 적었다고 한다. (이민경, <탈코르셋> 중)



내 눈은 ‘무쌍’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쌍꺼풀이 없었겠지만 ‘무쌍’을 인식한 건 대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쌍꺼풀 진하게 있는 친구도 여럿 됐는데 그 애들의 눈과 내 눈의 차이점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인식하기 전까지 내 눈은 무쌍도 아니고 홑꺼풀도 아니고 그냥 눈이었다. 대학생 때 정확히 어떤 계기로 내 눈을 다시 보게 됐는지 기억은 잘 안 난다. 아마 연애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잘 보이고 싶은 이성이 생기면서 거울을 뜯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뻐 보이고 싶고 매력적이고 싶었다.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거울 속의 나는 어디가 부족한지 살폈다. 밋밋하고 부은 것 같은 내 눈이 보였다. 쌍꺼풀이 있는 눈은 크고 시원해 보이던데 내 눈은 왜 이렇지? 하고 생각했다. 콧등 중간이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도 너무 싫었다. 내 외모의 아쉬운 점만 보였다.


꾸밈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화장도 안 하고 하이힐도 안 신고 옷도 수수하고 편한 걸 입었다. 화장 잘하는 손재주나 패션센스가 나에겐 없었다. 관심이 없다 보니 잘해 보고자 하는 노력도 귀찮았다. 크게 아쉬움도 없어서, 대학생 때도 회사 다닐 때도 연애할 때도 그냥 편하게 다녔다. 나를 불편하게 한 건 이따금씩의 주변 사람들이었다. 사회생활을 위해서 화장이나 복장에 신경 쓰면 좋겠다고 하셨던 회사 팀장님, 눈 화장은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던 회사 대리님, 화장을 왜 제대로 안했냐고 화를 내셨던 예전 남자 친구 어머니. 알겠다, 죄송하다 하하 웃었지만 ‘나 잘 못 한 건가?’ 주눅 든 마음은 오래갔다. 잘 꾸미는 친구들이 부럽고 나도 맘먹고 해 보자며 열의를 불태우기도 했다. 귀찮은 마음이 어디 안 가서 금방 해이해지긴 했지만.


내가 훨씬 보수적인 업계에서 일했거나 주위 사람들이 계속 노골적으로 원했다면 화장을 열심히 했을지도 모른다. 없는 실력이지만 하다 보면 늘었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근데 이 가정을 통해 탈코르셋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주변 환경이 요구했다면 나는 달랐을 거라고 가정하는 건, 입지만 않았지 코르셋을 질질 끌고 다닌 격 아닌가? 나는 코르셋을 착용한 적이 없으니 굳이 탈코르셋을 할 것도 없다,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정말 나의 선택인가?


'스스로 한 선택’ 이란 범주는 난해하다. 결정은 스스로 했어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혹은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른 채) 했다면 그게 정말 본연의 선택이겠나. 하지만 인간이 타인으로부터 자유롭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애초에 스스로라는 단어는 어불성설 일지도. 100% 혼자만의 결정은 없다 해도 최대한 자발적이기 위해서는 주변 시선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냐가 관건이다. 환경적으로 주어질 수도 있고, 천성이나 의지가 좌우하기도 한다. 나는 과연 ‘나’에 가까울까 ‘타인이 정해준 나’에 가까울까?  화장 안 하는 나는 스스로 화장이 싫어서 안 한 게 아니라 안 해도 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거다. 나는 그걸 부정할 수 없다.




내 몸을 자연 상태 그대로 인식하는 것에 탈코르셋의 의의가 있다. 논란과 갈등의 일면들이 존재하지만 익숙한 것을 깨뜨리는 일에는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 탈코르셋은 행동으로 옮길 때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긴 머리가 불편하다는 걸 알아야 샤기컷을 하는 게 아니라, 샤기컷을 해봐야 긴 머리가 불편한 걸 알 수 있다는 설명에는 절반의 지지는 의미 없음, 상상만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는 없음을 덧붙일 수 있겠다.


탈코르셋에 대한 책 한 권 읽은 걸로 다 알 수는 없다. 제대로 알고 싶지만 많은 층위의 목소리들 사이에서 어디를 중심으로 잡아야 하는지 갈팡질팡 한다. 탈코르셋, 더 나아가 페미니즘을 알아가는 건 나 자신부터 똑바로 쳐다봐야 하는 작업이라서 그냥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더 늦기 전에 해야 하는 이유는 나에게 딸이 생겼기 때문이다. 딸에게 '아빠 닮아서 쌍꺼풀 생기면 좋겠다'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나를 후회한다. 아이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이 타인에서 비롯되지 않기를 바란다. 타인의 시작은 부모이고, 나는 아주 예민해져야 한다.  



... 양육자는 여성의 외모 규범을 만드는 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 각자의 몸에 대한 경험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커다란 원인 중의 하나는 양육자로부터 자신의 몸이 평가되는 방식이다. (이민경, <탈코르셋>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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