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사 이야기
테라스에 잠시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젖어가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으리라. 그야말로 무연히, 아무 생각 없이 사방으로 나를 열어놓은 채…… 그때의 행복감, 그때의 자유를 나는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
내가 두 번째로 다녔던 회사는 선릉역 근처에 있었다. 강남 물이란 게 그런 건가, 처음엔 모든 게 번듯하고 있어 보였다. 모던한 스타일의 신식 건물, 출근할 때마다 양복 입은 직원분이 건물 입구에서 인사를 해주셨다. 야근은 정말 징글징글하지만 불 꺼진 회의실에서 전면 유리창으로 내려다본 테헤란로는 괜히 울컥하게 멋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민낯에 청바지에 운동화만 신고 다니던 나에겐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은 동네였다.
그 회사가 낯설었던 건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국계 회사여서 영어 사용이 필수였기 때문에 나하고는 인연이 없을 곳이었다. 하지만 마침 그곳은 인력이 급했고 외국인 직원들이 많이 퇴사해서(이게 훗날의 복선이었을지도...) 영어는 꼭 필수가 아니게 됐다. 그 빈틈을 내가 비집고 들어간 거다. 백수 될 위기를 벗어난 건 감사했지만, 막상 입사하고 나니 영어 잘하는 사람들에 대한 괜한 열등감에 주눅 들었다. 유학파도 많고 다 엄청 똑똑하고 부티나 보였다.
물론 그게 아니란 걸 깨닫는데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뭐야! 영어만 할 줄 알지 일은 엄청 못하잖아? 그지 같은 인간들도 너무 많잖아! 산으로 가다 못해 결국 폭파된 프로젝트와 사랑과전쟁, 그것이알고싶다에 나올 거 같은 얽히고섥힌 인간관계. 요즘 말로 할말하않?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비슷하다는 걸 느끼며 나는 아주 잘 그곳에 적응했다.
낯설어서 서럽던 초반이나, 이내 익숙해졌던 나중이나, 나의 소소한 즐거움은 점심 먹고 선정릉 근처 한 바퀴를 휙 걷고 오는 것이었다. 선정릉 외벽을 따라 언덕을 쭉 걸어 올라갔다가 다시 터벅터벅 내려오는 길. 동료랑 같이 걸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혼자 걷는 걸 더 좋아했다. 퇴근하고 바로 지하철을 안 타고, 선정릉을 지나 반대편 언덕 아래로 쭉 내려가 강남구청역까지 걸어가는 것도 좋아했다. 7호선을 타면 안 갈아타도 되니까 좋다며 그 꽤 되는 거리를 걷는 게 좋았다.
프로젝트가 접히면서 내가 있던 팀도 완전히 사라지고, 난 입사 8개월 만에 그 회사를 나와야 했다. 끝은 유쾌하지 못했지만 난 가끔 그 회사를 다닐 때 걸었던 거리를 생각한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은회색 건물들과 깔끔하고 멀쑥한 차림의 사람들, 선정릉 덕분에 초록 나무는 충분했고. 이어폰 꽂고 음악까지 더하면 오피스 드라마의 한 장면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세 번째로 다녔던 회사는 숙대 근처였다. 작은 회사였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나만 너무 평범하고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또!! 주눅이 들었더랬다. 티 안 내고 열심히 다니긴 했지만, 결국 또 엄청 적응 잘하긴 했지만 한동안은 역시나 퇴근길이 쓸쓸했다.
뭔가 결핍이 생기면 배움을 찾는 게 특기. 그때 난 드로잉 클래스를 픽했다. 회사와 멀지 않은 해방촌에 스터디 공간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퇴근하자마자 회사 앞에서 마을버스 타고 굽이굽이 산동네를 올라갔다. 나는 그때 해방촌이라는 곳을 처음 가봤는데 옛스러운 동네 구석구석 젊고 사랑스러운 가게들이 보이는 곳이었다. 마을버스가 버겁게 느껴지는 높은 경사로를 올라 산 끝에 닿을 것 같은 정류장에 도착하면 그곳이 내가 수업을 듣는 곳이었다. 버스 문이 열리면 노을이 스며드는 감색 하늘이 탁 나타났다. 남산타워가 코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고난했지만 가장 응축된 시간을 보낸 회사였다. 스타트업의 (나름의) 개방성 때문인지, 사람들과의 합이 맞아서였는지, 가장 게임 개발다운 일을 했던 곳이었다. 비록 우리의 프로젝트는 완성되지 못한 채 접혔지만 어느 게임회사에서건 그건 흔한 일.
중간에 회사는 역삼으로 이사를 갔고 내가 그 회사를 다니는 기간의 절반 이상이 역삼에서 다녔지만, 내가 그 회사를 떠올리는 풍경은 남산 타워가 가까웠던 그 동네다. 아침 출근길은 왠지 떨리고, 늦은 퇴근길은 괜히 서러울 때였지만 남산 타워를 보며 걷는
길이 정다웠다. 일주일에 한 번 해방촌 언덕을 올라 보던 남산타워는 지금도 똑같은 느낌일까? 점심시간 맛있는 식당 찾아 땀 뻘뻘 흘리며 헤매던 숙대 근처 골목들은 백종원 선생님이 다녀갔던 것 같은데. 회사 친구랑 저녁마다 같이 줄넘기했던 학교 운동장도 여전할까.
괜찮으려 애썼던 회상 생활 한구석, ‘무연히’ 걸었던 그 풍경들. 회사를 좋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회사를 다니며 걸었던 풍경들을 난 너무 사랑했나 보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일했을까 후회하면서도 그때의 그 풍경들을 생각하면 첫사랑처럼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하다.
좋은 것들과 사랑들이 내게는 너무 많다. 그걸 잊지 말 것, 늘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할 것., 그리고 환대하고 응답할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이며 모든 일이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