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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cElephant Feb 10. 2020

무연히 걸었던 풍경

나의 회사 이야기

테라스에 잠시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젖어가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으리라. 그야말로 무연히, 아무 생각 없이 사방으로 나를 열어놓은 채…… 그때의 행복감, 그때의 자유를 나는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


내가 두 번째로 다녔던 회사는 선릉역 근처에 있었다. 강남 물이란 게 그런 건가, 처음엔 모든 게 번듯하고 있어 보였다. 모던한 스타일의 신식 건물, 출근할 때마다 양복 입은 직원분이 건물 입구에서 인사를 해주셨다. 야근은 정말 징글징글하지만 불 꺼진 회의실에서 전면 유리창으로 내려다본 테헤란로는 괜히 울컥하게 멋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민낯에 청바지에 운동화만 신고 다니던 나에겐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은 동네였다.

그 회사가 낯설었던 건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국계 회사여서 영어 사용이 필수였기 때문에 나하고는 인연이 없을 곳이었다. 하지만 마침 그곳은 인력이 급했고 외국인 직원들이 많이 퇴사해서(이게 훗날의 복선이었을지도...) 영어는 꼭 필수가 아니게 됐다. 그 빈틈을 내가 비집고 들어간 거다. 백수 될 위기를 벗어난 건 감사했지만, 막상 입사하고 나니 영어 잘하는 사람들에 대한 괜한 열등감에 주눅 들었다. 유학파도 많고 다 엄청 똑똑하고 부티나 보였다.

물론 그게 아니란 걸 깨닫는데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뭐야! 영어만 할 줄 알지 일은 엄청 못하잖아? 그지 같은 인간들도 너무 많잖아! 산으로 가다 못해 결국 폭파된 프로젝트와 사랑과전쟁, 그것이알고싶다에 나올 거 같은 얽히고섥힌 인간관계. 요즘 말로 할말하않?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비슷하다는 걸 느끼며 나는 아주 잘 그곳에 적응했다.

낯설어서 서럽던 초반이나, 이내 익숙해졌던 나중이나, 나의 소소한 즐거움은 점심 먹고 선정릉 근처 한 바퀴를 휙 걷고 오는 것이었다. 선정릉 외벽을 따라 언덕을 쭉 걸어 올라갔다가 다시 터벅터벅 내려오는 길. 동료랑 같이 걸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혼자 걷는 걸 더 좋아했다. 퇴근하고 바로 지하철을 안 타고, 선정릉을 지나 반대편 언덕 아래로 쭉 내려가 강남구청역까지 걸어가는 것도 좋아했다. 7호선을 타면 안 갈아타도 되니까 좋다며 그 꽤 되는 거리를 걷는 게 좋았다.

프로젝트가 접히면서 내가 있던 팀도 완전히 사라지고, 난 입사 8개월 만에 그 회사를 나와야 했다. 끝은 유쾌하지 못했지만 난 가끔 그 회사를 다닐 때 걸었던 거리를 생각한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은회색 건물들과 깔끔하고 멀쑥한 차림의 사람들, 선정릉 덕분에 초록 나무는 충분했고. 이어폰 꽂고 음악까지 더하면 오피스 드라마의 한 장면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세 번째로 다녔던 회사는 숙대 근처였다. 작은 회사였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나만 너무 평범하고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또!! 주눅이 들었더랬다. 티 안 내고 열심히 다니긴 했지만, 결국 또 엄청 적응 잘하긴 했지만 한동안은 역시나 퇴근길이 쓸쓸했다.

뭔가 결핍이 생기면 배움을 찾는 게 특기. 그때 난 드로잉 클래스를 픽했다. 회사와 멀지 않은 해방촌에 스터디 공간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퇴근하자마자 회사 앞에서 마을버스 타고 굽이굽이 산동네를 올라갔다. 나는 그때 해방촌이라는 곳을 처음 가봤는데 옛스러운 동네 구석구석 젊고 사랑스러운 가게들이 보이는 곳이었다. 마을버스가 버겁게 느껴지는 높은 경사로를 올라 산 끝에 닿을 것 같은 정류장에 도착하면 그곳이 내가 수업을 듣는 곳이었다. 버스 문이 열리면 노을이 스며드는 감색 하늘이 탁 나타났다. 남산타워가 코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고난했지만 가장 응축된 시간을 보낸 회사였다. 스타트업의 (나름의) 개방성 때문인지, 사람들과의 합이 맞아서였는지, 가장 게임 개발다운 일을 했던 곳이었다. 비록 우리의 프로젝트는 완성되지 못한 채 접혔지만 어느 게임회사에서건 그건 흔한 일.

중간에 회사는 역삼으로 이사를 갔고 내가 그 회사를 다니는 기간의 절반 이상이 역삼에서 다녔지만, 내가 그 회사를 떠올리는 풍경은 남산 타워가 가까웠던 그 동네다. 아침 출근길은 왠지 떨리고, 늦은 퇴근길은 괜히 서러울 때였지만 남산 타워를 보며 걷는

길이 정다웠다. 일주일에 한 번 해방촌 언덕을 올라 보던 남산타워는 지금도 똑같은 느낌일까? 점심시간 맛있는 식당 찾아 땀 뻘뻘 흘리며 헤매던 숙대 근처 골목들은 백종원 선생님이 다녀갔던 것 같은데. 회사 친구랑 저녁마다 같이 줄넘기했던 학교 운동장도 여전할까.


괜찮으려 애썼던 회상 생활 한구석, ‘무연히’ 걸었던 그 풍경들. 회사를 좋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회사를 다니며 걸었던 풍경들을 난 너무 사랑했나 보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일했을까 후회하면서도 그때의 그 풍경들을 생각하면 첫사랑처럼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하다.




좋은 것들과 사랑들이 내게는 너무 많다. 그걸 잊지 말 것, 늘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할 것., 그리고 환대하고 응답할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일이며 모든 일이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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