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애니 Feb 14. 2024

지금, 여기

토요일이 오기 전에는 자기만의 금요일이 있으며

어쩌다 보니 이 화창한 아침,

어느 한적한 강가의 나무 그늘 아래 이렇게 앉아 있다.

이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는 결코 기록되지 않을

지극히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동기가 무엇인지 낱낱이 분석되어져야 할

중요한 전투나 조약도 아니고,

기억할 만한 폭군의 화살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지금 이 강변에 앉아 있고,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도달했다는 건

어딘가에서 이곳을 향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갑판에 오르기 앞서

다른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지의 여러 곳에서 지냈으리라.


비록 일시적인 순간에 불과하다 해도

누구나 자신만의 무수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니

토요일이 오기 전에는 자기만의 금요일이 있으며,

유월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오월이 있게 마련.

사령관의 망원경에 포착된 풍경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자신만의 지평선을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수년 전에 뿌리를 내린 포플러나무.

이 강은 오늘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유유히 흐르던 라바 강.

관목 사이 저 오솔길을 누군가가 밟은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구름을 뿔뿔이 흩어놓기 위해

바람은 한발 앞서 구름을 여기까지 싣고 왔으리라.


비록 주변에서 거창한 사건은 일어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세부적인 항목들이 빈곤해진 건 아닐 테니.

민족의 대이동이 세상을 덮쳤을 때보다

그저 조금 덜 그럴싸할 뿐,

그저 조금 덜 명확할 뿐,


침묵이 꼭 비밀 조약에만 수반되는 것도 아니고,

원인과 그 일행이 항상 성대한 대관식에만 참석하는 것도 아니다.

혁명의 기념일은 강가의 조약돌도

열심히 챙기고 있다.


환경이 수놓은 자수는 복잡하고 견고하다.

풀 속에 숨어 있는 개미의 바느질 한 땀,

대지 위에 꿰매진 잔디,

나뭇가지로 뜨개질한 파도의 문양.


어쩌다 보니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바로 이 자리에서 강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위로 하얀 나비가 오직 자신만의 것인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 손에 그림자를 남긴 채 포드닥 날아간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것인

그림자를 남긴 채.


이런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더 이상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과연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있는지.


- 제목이 없을 수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충분하다>를 감응의 글쓰기에서 인상 깊게 읽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읽을 시집으로 <끝과 시작>을 골랐다. 에밀리 디킨스의 시집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연달아 외국 여성 저자의 시집으로 우리의 관심은 이어졌다.


<충분하다> 시집보다 어찌나 책이 두꺼운지 그 실제적 쪽수에 눌렸다. 에밀리 디킨스의 시집을 읽고 바로 읽으니 쉼보르스카의 시집마저 어마어마하게 다가왔다. 그러다 점점 단어와 문장이 어렵게 다가왔다. 사실과 현존이 공존하는 시어.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언어화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질 걸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학 전공한 교수님이 이야기하길 시는 현존, 본질을 다루고 있다는 말에 요즘 더 깊이 공감하고 있다.


꽤 두꺼운 시 중에서도 나는 위에 언급한 '제목이 없을 수도'가 가장 인상 깊었다.


비록 일시적인 순간에 불과하다 해도

누구나 자신만의 무수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니

토요일이 오기 전에는 자기만의 금요일이 있으며,

유월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오월이 있게 마련.


나는 더 이상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과연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있는지.


현재를 사는 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불안을 원동력 삼아 현재 대신 미래를 살고 있었다는 건 얼마 전에 알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를 읊조리며 지금 이 순간을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생각만큼 잘 되진 않는다. 자꾸 걱정과 근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익숙하다. 그런 내 일상과 맞닿아 시인이 표현한 구절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아, 그렇지 토요일이 오기 전에는 자기만의 금요일과 유월이 오기 전에는 자신만의 오월이 있지. 그냥 갑자기 토요일에서 수요일이 될 수 없고 오월이 오기도 전에 칠월이 앞서 나타나지도 않지.'


'지금, 여기'를 읊조리며 현재에 집중할 때면 유치하게 "지금 이 순간"이라는 뮤지컬 넘버도 생각난다.


내가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이 낚아챈 본질의 언어 앞에 한참이나 눈이 머물렀다. 그때는 중요했고 지금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오늘 마무리한 다르마에 근거한 mbsr 5일 집중 수련. 거기에서 배운 게 많았다. 특히 느낌이라는 게 좋거나 불쾌하거나 무덤덤하거나 하는 것들이 내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좋은 느낌도 나타났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다른 느낌으로 변화한다. 정말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나도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도 아니다. 이 아리송하고 묘한 언어 유희 같은 낯선 말. 무념무상이라는 한자말로 대체할 수 밖에 없는 것.


글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관련된 일을 하면 계속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계속 변화하거나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나타나는 걸 알았다면 난 어땠을까. 무언가 계속하기 위해 그걸 붙잡고 있었던 게 너무 고집스러웠던 건 아니었을까. 지금의 모습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했다. 쓰는 사람의 정체성 그것도 고정된 게 아니라 변하는 것 중 하나였던 건 아닐까.


쓰는 일을 내려놓는 건 내 20,30대의 어떤 순간들이 다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글쓰는 실력이 부족하다고 회사에서 정리됐을 때 내 존재 자체가 거부됐다고 다가왔다.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도 분명히 있었지만 여전히 매여있는 지점이다. 친구가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반복해 말해줬지만 저항하고 밀어냈다.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쓰기 인생은 거기까지라고 여겼다. 나 스스로 그렇게 선을 그었다. 어쩌면 작가를 크게 꿈꾸지 않는 것도 양심선언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써볼까 해서 관련 업으로 한 회사에 지원을 했다. 텍스트 관련 회사에서 오래 일한 건 아닌데 왜 그만뒀냐고 물었다. 솔직하지 못하고 애매한 답변을 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버린 건가. 있는 그대로 그때의 일을 바라보는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벗어나고 싶다.


이날의 배 두드리며 먹은 #대원칼국수

어쩌면 너와 맛있는 걸 먹고

시어로 현재를 언어를 채우고

우리의 봄날이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다 아는데 나만 몰랐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