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는 요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사람 May 11. 2021

되면 되는대로, 안 되면 안 되는대로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언젠가부터 친구들을 만나면 ‘기승전요가’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런 날 보며 친구는 신기하다는 듯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와 너 맨날 힐만 신고 다녀서 운동화 없다고 대학교 때 체육대회도 안 나오던 사람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그러게..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몸 쓰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내가 이렇게 요가에 푹 빠져 살게 될 줄은 나도 정말 몰랐으니 말이다.


요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사바아사나 때문이었다. 운동 부족의 심각성을 느꼈던 나는 헬스나 필라테스보다는 요가가 제일 쉽겠지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요가를 시작했었다. 물론 아주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전굴도 안 되는 내게 후굴은 그저 서커스였고 외발로 서는 동작을 할 때면 혼자서 우당탕탕 몸개그를 하며 ‘도대체 누가 요가가 쉽다고 한 거야’ 당황 섞인 분노가 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사바아사나만큼은 다른 영역이었다.


그렇게 매일 매트 위에서 몸개그를 하며 도대체 뭐가 늘고 있긴 한 건가 의문이 들기 시작할 때쯤, 선생님의 말들이 귓가에 하나둘 앉기 시작했다. “여러분의 눈을 내면으로 가져와 보세요” “숨을 먼저 다 느껴보세요” “부동의 상태에서 분리 주시하고” “매트 위의 자신과 싸우지 마세요” “마음을 몸 뒤에 두세요” 요가의 말들은 뭐가 그렇게 느낌적 느낌인지, 그냥 쉽게 몸을 어떻게 쓰라고 해도 따라갈까 말까일 텐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바아사나를 하려고 누우면, 그런 말들이 다시 찾아와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흔들려도 괜찮아요. 원래 삶에서도 균형 잡는 게 제일 어려운 거잖아요” “채우는 숨 다음에는 비우는 숨이에요, 너무 앞서가려고 하지 마세요” “자신을 믿고 시도해보세요” 등등.. 그렇게 매트 위에서 곱씹었던 말들이 신기하게도 내가 매트 밖의 삶을 살아가며 휘청일 때마다 힘이 되곤 했다. 요가를 할수록 나도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인지 요가 철학 시간은 지도자과정 커리큘럼 중에서도 가장 기대했던 시간이었는데, 그곳엔 더욱 미지의 문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나’를 만나서 궁극의 행복에 다다른다니 도대체 ‘참나’는 또 무엇일까.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여전히 참나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요즘 매트 위에 설 때마다 자주 보이는 내가 있다. 겁이 많은 나와 욕심이 많은 나. 참 다른 두 아이가 매일 함께 매트 위에 선다.


이러다 얼굴로 박는 거 아닌가? 어디 부러지는 거 아닌가? 넘어지는 거 아닌가? 온갖 두려움이 앞서는 아사나가 있는가 하면, 안 되는데 용을 쓰고 하다가 삐끗하고 다치는 아사나도 있다. 찰나의 욕심 때문에 예상 못 한 통증을 얻을 때마다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새삼 놀란다. 다만 ‘겁이 많은 나’는 알고 있던 나였지만, ‘욕심이 많은 나’는 내가 몰랐던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겁이 많은 나’와 ‘욕심이 많은 나’가 요즘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순간이 있다. 드롭 백을 연습할 때다. 성공하는 순간을 상상하면 정말 해내고 싶은데, 막상 할 때마다 너무 무섭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왜 못해?’ 짜증이 이만큼 나고, 그렇게 무서운데도 또 하고 싶고... 그 짧은 순간 요동치는 감정만큼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친다. 이러다 얼굴로 매트 박고 목 나가고 난리 쳐서 우리 요가원 희대의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이제 바닥이 보이긴 보이는데 성공하고 올라와 쌤이랑 웃으면서 아이컨텍 할 수도 있잖아. 두려움과 욕심의 경계에서 성공과 실패의 극단적인 가상 시나리오가 찰나의 순간 왔다 갔다 한다.


그러면서 깨달은 게 한 가지 있다. 하고 싶은데 두렵고, 무서운데 욕심나고, 못하면 짜증 나고, 매트 위에서의 나는 매트 밖에서의 나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요가를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어떤 관계 속에서도 돌이켜보면 늘 같은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엔 실패할까 봐 겁을 내고, 막상 시작하면 기대하며 욕심내고, 기대하는 만큼 결과가 안 나오면 화가 나고, 무언가를 하는 ‘과정 속의 나’보다 늘 ‘결과론적인 나’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바가바드 기타를 배우며 가장 먼저 또 가장 오래 무릎을 치게 만든 건 카르마 요가였다.

 


행위의 결과를 동기로 삼지 말며, 행위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말라니 정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맞아,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성공에 대한 욕심도 계획대로 안 되면 짜증 나는 것도 결국은 내가 기대하는 결과가 있기 때문이겠지. 전에 다니던 요가원에서 하타 선생님이 자주 하던 말이 생각났다. “되면 되는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생각해보면 그때도 아사나를 만드는 것은 물론 선생님이 ‘그만’ 할 때까지 유지 시간을 채워보겠다는 욕심에 억지로 버티려 들었고, 그 시간을 못 채우고 내려올 때면 ‘또 못 했네’ 그렇게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앞선 욕심에 그때는 마음으로 듣지 않았던 그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요가를 시작하기 전의 나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머리론 알아도 마음으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어렵긴 마찬가지지만, ‘행위 속에서의 포기’라는 키워드 덕분에 조금 더 순간에 충실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은 것 같다.










한 마디 더...
매주 쓰겠다던 다짐을 갖고 시작한 브런치인데,
바쁘다는 핑계로 마지막 글을 올린 게
벌써 지난 11월이네요.
지난 2월에 쓴 일기를 뒤늦게 올려봅니다.
그 사이에 저는 요가 지도자과정을 마쳤고
다음 생에나 가능할 것 같았던
드롭백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쓰는 요가를 조금이나마 기다려주신
분들을 위해 다시 연재를 시작합니다.
부끄럽지만 응원 부탁드려요
매거진의 이전글 차크라사나가 왔다, 불안에 지지 말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