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와 배제, 부조리 그리고 인간 조건
* 전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5'에서 계속
1) 키치, 배제, 부조리, 구토감
공산주의에 대한 사비나의 첫 번째 내면적 저항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미학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녀에게 혐오감을 일으켰던 것은 공산주의 세계의 추함보다는 공산주의가 뒤집어쓰고 있는 아름다움의 가면, 달리 말하자면 공산주의라는 키치였다. 이러한 키치의 모델은 소위 5월 1일 축제였다. 그녀가 5월 1일의 행진을 보았던 것은 사람들이 그때만 해도 광신적이었거나 또는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던 시절이었다.
(중략) 마치 자신들이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5월 1일 축제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는 깊은 원천에서 그것의 자양분을 끌어내고 있었다. 행진 대열이 내건 묵시적 슬로건은 “공산주의 만세!”가 아니라 “인생 만세!”였다. 공산주의 정치의 힘과 모략은 이 슬로건을 독점하는 데 있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철저히 무관심한 사람들조차도 공산주의 행렬로 내모는 것은 바로 이 멍청한 동어반복(”인생 만세!”)였다.
(중략) 십여 년 후 그녀의 친구의 친구인 미국 상원의원이 커다란 자동차로 그녀에게 관광을 시켜 주었다. 아이들 넷이 뒷자리에 끼여 앉아 있었다. 상원의원이 차를 세우자, 아이들은 차에서 내려 커다란 잔디밭을 내달려 체육관 건물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인공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상원의원은 운전석에 앉아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뛰어가는 네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애들을 봐요.” 그가 손으로 둥그렇게 그리는 원 안에는 체육관, 잔디밭,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들어 있었다. “내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저런 것입니다.”
(중략) 어떻게 이 상원의원은 어린아이들이 행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들의 영혼을 읽었을까? 만약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들 중 세 명이 한 아이에게 달려들어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면? 상원의원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는 하나밖에 없다. 그의 감수성.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400~404 p
전편 인용에서 작가는 ‘똥’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빌어 키치를 설명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나아가 그 위상을 신적인 것과 결부하여 생각하려는 시도, 말하자면 전근대 서구적 관점으로부터 인간은 좋든 싫든 필연적으로 ‘똥’이라는 딜레마, 신학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 결과로서의 양자택일, 인간이 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전혀 받아들이지 않음, 똥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듯이 행동하는 극단적 외면에 있어 후자를 택하는 것이 바로 키치적인 것이라 설명한다. 그러니까 키치란 미학적 인간 개념 하에 ‘똥’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배제한 결과적 행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곧이어 그 예시로 ‘열렬한 공산주의자’와 ‘감성에 호소할 줄 아는 정치인’을 들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열렬한 공산주의자는 그 체제와 이념이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개념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말소하려한다는 사실과 그 사실의 불합리한 우스꽝스러움은. 또한 노련한 정치가라면(일종 선입견이긴 하지만) 무엇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닿고 동의할 수 있는 행동인지를 가리어 철저히 수행하리라는 사실과 그 모습 이면에 놓여있을 우아한 기만성이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특정 키치적 관점을 동의하여 받아들인 사람에게 있어선 이 모든 것이 진지한 것이자 진실한 것이 되고(정치가와 당원의 예시), 그러한 사람의 인식 속에 배제된 부분에 있어 장차 우리는 결코 공감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게 된다는 사실은. 허나 내겐 저 연륜 있는 노작가처럼 세련된 방식으로 미연의 위험을 피해 갈 역량이 없다. 물론 그도 공산주의자들의 분노와 반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자인 공산주의자는 보다 노골적이고, 후자인 정치인은 보다 교묘하다. 하지만 여전히 보편적으로들 공감할 만하고,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 보편을 겨누지 않는 영리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독자 일반과는 아마 유리되어 있을, 적어도 타자화할 수 있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 자신, 사람과 일상 사이 사이에 자리한 것들은 어떻게 일컬어질 수 있을까? 반감을 유발하지 않고서 그것을 가리킬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 정도로 세련되진 않았다. 일상에서 내 가장 빈번히 느끼는 몰이해, 하여 늘 고민에 빠지게 하는 사람들의 말은 인간 존재에 대한 긍정과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에 대해 말하여볼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모든 것의 시작이자 씨앗, 아직 틀이 잡히지 않은 순수, 또 무한한 가능성이므로 그들은 지켜져야 한다. 무엇으로부터? 너무 아픈 것과 슬픈 것으로 가득한, 거친 세계로부터. 그리고 그들은 존중되어야 한다. 무엇으로부터? 몰이해와 배척, 비판과 거절로부터. 아니, 틀렸어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 잘했어로 마땅히 대해지고 양육되어야 한다.’ 허나 언제나 나는 정반대의 생각을 한다.
우리는 선량한 존재이며, 우리 안의 그러한 모든 가능성과 실마리를 믿는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가 믿는 바 올바른 소망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에도, 의지로 모든 좌절을 뛰어넘을 수 있으며 주어진 모든 외적 상황과 무관하게 우리가 그것을 이기리라는 말에도, 누구나 행동에 있어 올바름을 추구해야 하고 그 올바름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그것은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모든 예찬, 적의와 증오가 말소된 선량한 사랑의 세계에 대한 예찬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것들에는 '이상적 미학'의 면모가 있고, 분명 사랑스러운 인간의 세계이지만, 인간의 사실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반감은 그러한 인간 긍정 자체를 대함이 아니라, 정확히는 그 과정에 배제되어버린 것들로부터 태어난다.
아주 단순한 이유이다, 내 삶은 그런 존재를 모른다. 기억 속엔 그것을 부르짖는 인간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더구나 어제의 말이 대개 오늘의 행동을 촉구하지도 관철하지도 못하고, 누군가를 쉬이 가리키던 선언이 그 자신의 예외적 부분에서만큼은 관대히 빗겨나가기 일쑤였던, 그러므로 대개 잊어버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러한 모습으로.
그래, 이러한 시선은 인간 존재에 대한 완벽주의적 편집증과 강박이라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즉 엄격한 일관성과 정합성에의 요구란 실현 불가능한 것이며, 이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강박에조차도 키치가 자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합성에 대한 강박 그것은 자기 실패라는 참을 수 없는 사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지를 들이밀고 그 앞에서 다시금 우리의 선택을 종용한다. 자기 실패를 처절히 받아들일 것인가, 그로써 정합성에의 강박은 더욱 거세지거나 아니면 아예 포기함으로써 깊은 염세로 빠질 것이다. 혹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하여 인식 속에 배제할 것인가, 키치, 그로써 인식하는 자신과 타인 사이에 커다란 왜곡과 쉽사리 되돌아올 수 없는 아득한 거리가 자리할 것이고, 그는 자기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에 빠진 채 너무나도 경멸스러운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더없이 관대하면서, 타인에게 가차 없이 경멸을 뿌리는 그러한 모습으로.
정합성에의 강박은 자기 자신과 주변인들의 삶을 말려 고사시켜버리리라는 사실과 아무리 강박적으로 자기 행동을 통제하고 관철하려 들지언정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즉 존재 인식에 적당한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알고 싶다. 어떤 글에서는 ‘찾고 있다’고도 말한다. 무엇을? 그럼에도 이렇게 개척되어 버린 인식, 그러므로 결코 아예 없었던 것이 될 수도, 깨끗이 지워낼 수 없는 이러한 인식, 그러므로 이미 떠안고 있는 이것을 올곧이 안아 들고서, 저편으로 돌아갈 방법을. 아직도 나는 찾지 못했나. 어쩌면 인간을 긍정하기에, 내가 행해온 강박적 자기 부정이 너무 깊다. 낙관을 누리기에, 내가 아는 실패와 염세의 기억이 너무 짙다.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
미학적 인간 예찬, 말하자면 ‘인간 만세’. 하여 아직 그것이 어렵다. 왜냐하면 세상엔 정 반대의 인간들이 넘쳐날 정도로 충분히 존재하고 그것은 인간 한계, 어찌할 수 없으나 극복해야만 하는 바로 그 한계 때문이며, 이때 그러한 미학적 인간 인식은 개인의 의지나 도덕성 차원이 아닌 논리와 연역에 의해서, 명백히 그렇지 못한 인간들을 배제한 채로만 성립될 수 있거나 인식과 인간 실재 사이의 간극을 외면한 채로만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선량한’ 키치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가 낄 자리는 없다. 나는 미학적 인식으로 구획화되고 배제된 거리, 그 너머 바깥에 존재한다. 그곳은 똥과 비루함의 세계, 말하자면 하수처리장의 세계이며 내가 받아들인 세계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 이렇게나 선명하고 섬뜩하고 상세하게 해부한, 민낯과 실재로서의 이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말이 결코 자기 비하는 아니다.
각자의 세계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 인식과 조건. 반발이 많을 것으로 예상하나, 인간에의 인식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는 인간에의 조건을 형성한다. 조건이란 쉽게 말해 ‘내가 인정하는 사람은 ~ 한 사람이다’와 같은. 각자가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는 인간 조건이란 그 자신의 인간 이해,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한다’를 뿌리로 한다는 것이다. 하여 서 있는 세계가 다른 그대와 나는 멀리서 서로 마주 본다. ‘존재를 확고부동히 동의’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 기제와 의의를 그러한 이상에 맞추어 설명하려 할 것이고, ‘존재를 확고부동히 동의’ 하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인간 비루함, 즉 실재에 지나칠 정도로 천착하여 낱낱이 파헤치려 들기에 그렇다. 쉽게 말해 “그 비루함은 내 사랑이 겪을 오해였을뿐, 나의 진심을 곡해하지 마오”와 “보아라, 이 불가결한 오물, 너도 똑같이 비루한 인간일 뿐이지 않느냐!”의 대립인 것이다.
허나 여전히 여기, 존재하는 것, 인간 비루함. 내가 관찰해온 인간은 이따금 빛나는 자신의 순간, 그 편린에 말미암아 자신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닮은꼴로서의 타인만을 서로 사랑하는 존재이다. 그 외 삶의 시간 대부분을 이루는 ‘인간적이고도 인간적인’ 비루함의 사실적 순간들은 인식 속에 묵시적으로 지연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일순 추악하게 타오르는 욕망과 감정, 그리고 실현되지 못한 은밀한 욕망의 죽은 자리에 대변처럼 남는 온갖 슬러지들. 이 모든 발칙함이 아직 발현되기 전이라면 마치 없었던 것 같이 우리는 행동하는 듯하나, 나는 여전히 그것을 긍정한다.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 인간의 ‘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긍정하는 것은 그 존재일 뿐, 그 당위는 아닌 것이다.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경멸하여 마침내 뛰어넘으려는 것. 똥이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지, 그 똥을 흩뿌려도 된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그러므로 나의 경멸을 많이들 헷갈려 했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똥을 침묵보다 깊이, 인식 저편에 두는 것 같다. 그것을 인식 너머로 추방하고 스스로로부터 가리게 하는 모종 무의식적인 힘이 사회적 두려움인지 본능적 거부감인지까지는 다 모르겠다만, 나와 사람들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그 무의식적 힘의 유무, 자기 비루함에 대한 거부감뿐일 것이다. 나는 나의 세계로부터 그 ‘거부감’을 빼앗겼으나, 실은 사람에게 그 거부감이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인간 이해가 나를 비롯한 모든 인간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을 원초적 비루함에 가까울지라, 그것이 아무리 상세한 것이라 한들 결코 사랑 될 수는 없음이며, 나아가 그러한 것들을 배제한 상태로서만이 우리는 지금과 같이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뉘 말마따나 우리가 서로의 내면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순간 우리는 결코 서로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예컨대 나의 너에 대한 열렬한 이성적 호의와 배려의 행동이 실은 깊은 무의식에 가려진 성욕의 우회적 발현이었음을 네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마침내 피어날 것인 결실로서의 사랑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처럼. 하여 가려져야 하는 이러한 것들에 있어 나는 하필 쓸데없이 밝을 뿐이며, 그건 더 정확히 일컫자면 그러한 것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이 동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인간 비루함에 대한 묵시적 태도와 그를 조건으로 한 존재 긍정까지가 어쩜 인간적이고, 나는 그것을 긍정한다. 돌아가야만 하는 것. 여전히 사랑의 근간은 긍정과 포용이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먼저 가리킨 다음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넘치는 것이기 때문이며, 적어도 비루함을 지나치게 선명히 인식하는 것과 인간 존재에 대한 확고한 긍정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그러므로 니체는 심연에 대해 경고한 것이 아니인가, ‘심연을 에둘러 갈 수는 있어도 직면한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나 상세한 해부와 이해는 딱히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무조건적 긍정이란 이러한 상세한 것, 말하자면 인간 비루함 또는 심연의 존재를 인식 상 배제한 채로 일어나는 것이고 나아가 그것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망각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니 묻는 것이다. 모르거나 망각함으로써 완성되는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두 눈을 부릅뜨고서 행할 수 있을는지.
그러나 한편 내가 긍정할 수 있는 지점은 그러한 인간 조건, ‘사랑을 위해 가려져야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불가피한 사실까지일 뿐, 여전히 거기서 뻗어 나간 것들에까지는 널리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그 경계는 어디인가. 어디까지가 인간 조건으로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키치의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지나침인지를, 나의 지혜는 아직 답할 수 없다. 우리 중 누구나 그 경계를 명확히 분별할 수 있는 혜안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그 지점을 아직 가리킬 수 없고, 그러므로 설명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아직 내 ‘느낌’일 뿐이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다.
아직의 나로서는 내가 경멸하는 키치를 분별하여 논할 수 없다, 느낄 따름이다. 기만과 위선, 이를테면 ‘이타를 가장한 자기 실현의 의지와 호의를 가장한 조소, 명분 뒤에 꼬리를 숨긴 비열함과 대의와 공리로 위장한 이기적 욕망’ 등을 나는 경멸한다. 허나 그것은 경멸스러울 뿐 여전히 이해의 범주 안에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숨거나 도망치기 위해 다른 이의 마땅한 의심과 타당한 몰이해를 폄하하고 내리깔아버리려 은밀히 모의하는 순간 그것은 부조리로 떨어져 버린다. 새빨간 거짓말, 경멸스러운 것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경멸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 입술을 나는 못 마땅히 여긴다. 나아가 그것을 사랑과 긍정이라 말하며,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여 몰래 비죽이는 입술을 미워한다. 자신의 비루함으로부터 숨기 위해 스스로 긍정하기를 지나치게 하나 실은 두려움으로 하여, 다른 이의 의심을 탓하려 식탁 아래에서 고부라지는 손가락을 미워한다. 그건 내가 새파랗게 느끼는 부조리 중의 하나, ‘믿음이 사실을 뛰어넘으려는 시도.’
눈빛에 전혀 다른 것이 감돌고, 눈동자가 전혀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오직 이타와 공리에 입각해 설명되는 것, ‘필요에 의한 믿음이 사실을 뛰어넘는 것’과 ‘해석이 실재를 왜곡하는 것’에 나는 구역질을 느낀다. 적어도 내가 그러한 종류의 사상을 전제한 채 나를 먼저 돌보고 있지 않은 한에는,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것임을 이해하나 언제나 사람들은 내게 화를 냈고 돌아서면서 내게 좌절을 권하느냐고 표독히 물어왔다.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게 아니냐고, 너 자신이 자격도 가치도 없는 인간인 까닭이 아니냐고도 말해주었다. 나는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조차도 이 생각이 가지고 있는 반감이 적의인지 지나치게 냉담한 사실 인식인지를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여 알리기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 안에 꿈틀거리는 이 위험한 사상이, 어쩌면 새로운 종류의 ‘인간 실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키치를 경멸하는 까닭은 지극히 단순한 이유, 그토록 많은 키치가 먼저 나를 패배시키고 땅에 내리깔아 조소하였기 때문. 결국 분석과 설명이 아무리 장황하여도 기원은 단순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인간 자신이 예견된 수치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당황하며 키치 뒤 편에 숨어드는 모습 그 자체를 두고 탓하지 아니한다. 즉 키치 그 자체를 구축해 마땅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나약하며 몹시 흔들리는 존재이고, 수치에 직면하는 것은 인간을 사납게 만들어 우리를 예기치 못한 결과, 외려 더욱 나쁘거나 악한 결과로 이끌기 일쑤인 까닭이다. 체념으로서의 이해. 그러므로 수치라는 위기로부터 생겨나는 키치의 불가피한 필요를 몸소 이해한다. 그러한 도주의 실마리 앞에 그저 상냥히 고개 돌리고, 멀리서 빙긋 웃어 보이는 것이 내가 행할 수 있는 전부.
내가 경멸하는 부조리로서의 키치는 소극적 행위인 도주를 지나친 것들, 외면이 기만이 되어 마침내 굴종에의 의지가 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키치, 자타 인간에 있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배제하는 인식과 그에 기인하는 태도, 그것이 자신의 수치를 가리던 소극적 행위를 넘어서 거꾸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이를 끌어내리려는 적극적 행위로 변모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역겨움이 발생한다. 구조적으로 비뚤어진 믿음을 스스로 긍정하기 위해선, 마찬가지 구조적으로 타자가 희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요, 무엇보다도 나아가 그런 자신을 틈 없이 자랑스레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의 믿음이 철저히 틀렸고 그 사상엔 구제 가능한 일말의 단락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까닭에, 그러므로 믿음은 애초 성립 단계에서부터 최소한의 합리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아, 나는 저 모습을 영영 사랑할 수 없다, 내가 그러한 나 자신으로서 먼저 살고, 그러므로 닮은 것으로서 너를 사랑하지 못할 한에는. 그러나 그것을 그저 외면커나 이별치 아니하고 이렇듯 부정하며 싸움을 거는 한, 나 또한 진흙탕 속으로 뛰어드는 셈이다. 기만하는 자 그에겐 근거가 없지만, 부정하는 자 내게는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인식 상 배제한 결과라는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위에 뿌리내린 굳건함이라는 사실과 불안이 커질수록 따라서 커지는 애절한 그림자라는 사실, 나아가 상정해둔 미학적 이상에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시도였다는 사실, 그러므로 어떤 마땅함으로도 그 태도를 쉬이 벗겨 낼 수 없다는 것은 허망하다. 근거 없을지라도,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나아가 그것이 거짓이나 기만인들, 나로서는 그것을 정당히 패배시키고 납득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이 그 사람의 정서와 내면에 충격을 가하는, 폭력적 방식으로만 일어날 수 있기에. 어떤 이의 키치와 프라이드가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를 폄하하였다 할지언정, 당한 그대로 되갚는 것은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고 우리는 그 둘 사이의 무게를 공평무사하게 저울질할 수도 없다. 인간 사회가 이러한 갈등을 다루기 위해 암암리에 택한 방법은 못마땅한 화해이지 충분한 복수가 아니이며, 때린 자와 되갚은 자 모두 공평히, 그 두 사람의 이해관계 바깥에서, 즉 배심원의 관점하에서는 죄를 행하는 셈이다. 다만 내키지 않는 억지 악수를 한 다음 뒤돌아서자마자, 둘 모두 스스로 정당한 복수자를 자처하고 있을 테다. 그러니 공평한 관점에서 내게도 마땅함으로서의 자격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내게 적용되면 강박이 되고, 타에 적용되면 경멸이 된다. 결국 벗어나야만 하는 것. 적어도 뱉은 말이 분명하고 까다로울수록 그것에 상응하는 의무가 발생하고, 그 행동 원칙을 스스로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강박으로 작용한다. 강박은 삶을 말린다 그러나, 자신이 정한 원칙과 강박을 수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나 프라이드일 뿐,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훌륭함도 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그 프라이드, 강박적 자기규율의 수행에 뒤따르는 그림자, 보상의식으로서의 자기과신은 외려 경멸스러워지기 일쑤였던 것. 강박이란 득보다 실이 많은 작용이고, 그에서마저도 득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자기 통제와 심리적 소모를 수반한다. 아-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뱉은 말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자타 모두에 있어 못마땅한 일이고, 이 맥락하에서는 심지어 일찍이 경멸했던 것보다 더 깊은 경멸로 떨어지는 일이다. 즉 스스로 그어버린 배수의 진인 셈.
벗어나야만 하는 것, 키치에 대한 부조리의 감각. 타를 경멸하면서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에게 강박적이면서 다른 사람에겐 마음에 일 점 티끌이 없는 것 같이 깨끗한 아량을 베풀 수는 없기 때문에,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면서 그 존재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지독한 넌센스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모르겠다. 내면에 발칙한 것들이 존재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애초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 그리고 사실이 아닌 오직 믿음만으로 영위되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내가 어떻게 이 간극 너머 저편으로, 내가 떠나왔고 떠밀려 온 이편으로부터 다시 저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이렇게나 상세하게 펼치어진 이해와 인식의 잡초를 모조리 삽으로 퍼, 그 뿌리까지 들추어내 태양 아래 말리곤 버려버릴 수 있을지를. 아예 이러한 쓸모없는 것들이 존재치 않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말이다.
키치, 내가 그것을 미워하거나 부정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는 한 이해하려 애써왔지만 그것이 곧 확고부동히 동의하리라는 말은 아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내 방황과 고독은 여기에 본질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건 애초부터 결코 이해받을 수도 동의받을 수도 없는 성질의 것. 동의는 상호 교환적인 성질을 띤다. 이렇게나 맹렬한 비판을 쏟아내었지만서도, 내 가슴이 진정 바라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키치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침내 그것과 진실히 화해하는 것이다.
2) 키치다움
물론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유벌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다.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을 정치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근처에 카메라가 있으면 그들은 눈에 띄는 첫 번째 아이에게 달려가 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빰에 키스한다. 키치는 모든 정치인, 모든 정치 행위의 미학적 이상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402~407 p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사비나가 테레자에게 자기 그림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소위 전체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사람은 질문과 의심을 가지고 투쟁할 수 없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야만 하고 집단적인 눈물샘을 자극해야만 하는 확신과 단순화된 진리가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어느 날 한 정치 단체가 독일에서 사비나 작품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사비나는 안내 책자를 보았다. 그녀의 사진 앞에 철조망이 그려져 있었다. 책자 안에는 순교자나 성인의 전기와 흡사한 그녀의 약력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고통 받았고 불의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고문받는 조국을 버려야만 했으나 투쟁을 계속한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그녀는 자유를 위해 그림으로 싸운다.”라고 씌어 있었다.
그녀는 항의했으나,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요? 공산주의가 현대 예술을 박해하는 것이 사실 아닌가요? 그녀는 격분해서 대답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 (중략) 사람들이 그녀의 삶을 가지고 만들어 내려고 했던 키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처절히 노력해야만 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411~412 p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의 적은 키치라고 단언했더랬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키치를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키치,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와 지혜로운 아버지가 군림하는 평화롭고 부드럽고 조화로운 가정의 모습이다. 이 이미지는 그녀의 부모가 죽은 후에 가슴속에서 배태되었다. 그녀의 삶이 이 아름다운 꿈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이것이 지닌 매력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그녀는 이것이 환상임을 잘 알았다. 이 매력적인 노인네들 집에서 체류하는 것은 잠정적으로 간이역에 머무르는 것에 불과했다. (중략) 사비나는 다시금 배신의 길로 들어설 것이며 이따금 그녀 가슴 깊은 데에서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환한 두 창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스꽝스럽고 감상적인 노래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속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그녀는 이 노래에 감동하지만 자신의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노래가 아름다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414~415 p
키치에 대한 부조리의 감각은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충분히 가려낼 수 있을 만큼은 덜어내야 하는. 왜냐하면 키치는, 어쩌면 키치야말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조건인 까닭이다. 그것을 톺아보기 위해 키치를 키치로 만드는 것, ‘키치다움’을 먼저 들여다보기로 한다. 키치는 보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 위에 건설되고, 그 이미지가 개개인에 이르러 키치가 되는 원리는 ‘핵심 이미지’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동의, 그 연대와 편입 의지로부터 동작한다. 바로 그 편입 의지가 ‘키치다움’을 생성한다.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 예컨대는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배신당한 조국… 허나 안타깝게도 작가가 열거한 핵심 이미지의 예시는 전시대의 유물이다. 이 또한 단순한 이유이지, 전 시대에 쓰인 글이니. 이것으로는 현시대 독자에게 강력하게 가닿을 수 없다. 이해는커녕 심지어 반감 살만한 것들로 변모되어 있는 이런 것들로서는… 그렇다면 현시대의 예시로는 무엇이 적절할는지. 어쩌면 모든 소수자에의 연대와 지지에 관한, 무엇도 굴복시킬 수 없는 강력한 자기애, 초인적 자기애와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관한, 모든 심리적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아프지 않을 모든 권리에 관한, 현시대 여러 종류 올바름과 마땅함에 관한 확고부동한 동의.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 행동의 유인과 그 설명, 즉 이해에 있어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모든 설명, 근거인 동기와 결과인 행위에 대한 설명은 지나치게 진실할 때 이해(혹은 납득)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리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서 설하자면 그것은 ‘진실’, 민낯이 아닌 것이 되어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앞선 사랑과 성욕의 예시와 같이(모든 사랑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그 외 모든 자연한 이기적 욕망에 기인한 이타적 행위는 진실한 적나라함보단 납득가능한 위선으로 설해진다.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고유하고 개별적인 까닭에 좀체 이해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으로 내가 써 온 글과 쓰려는 글을 바라보는 것은 기묘히도 서글프다. 이 테마 하에서 말하자면, 내 글은 개인적인 진실의 해부와 증명 시도이고, 이미 독자 여러분들이 느끼셨듯이 그것은 좀체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상세함에 대한 열정으로 쓰인 이 글 자체가 역설적으로 좋은 반례인 셈이다.
하여 키치란 널리 이해받고자 하는 본능에 기반한 보편 심리로부터 발생하고, 그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를 차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쓴 거의 모든 글이 갖추지 못한 것, 그러므로 내 글이 모호하다는 어느 사람의 평은 정확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의 단계에서부터 공감하거나 동의할 만한 아무런 핵심적인 이미지도 차용하지 않았다. 그건 내 안에 그런 것들이 없거나, 아예 거부된 채로 오래도록 해체된 까닭이다.
그 동의는 사람에게 있어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존재인 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동의 그것은 ‘이방인’의 뫼르소를 통해 다루어진 실험 주제이고,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이 가리키는바. 사람들로부터 일말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사람, 예컨대 ‘어머니의 장례에 슬퍼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질 배척은 심지어 죽음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 이해 불가능한 진실을 추구하고 누구도 원치 않는 그것을 집요하게 가리키는 사람은 ‘몰락’하여 낭떠러지로 떠밀리게 된다는 것.
그러므로 동의는 아주 중요하다. 사람들은 이 동의의 필요와 두려움에 의해 알게 모르게 키치를 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개인에게 있어 더욱 많이 동의될 수 있는 것일수록 더욱 좋은 것인 셈이다. 더 많은 동의는 더욱 핵심적인 이미지를 차용하고, 보다 단순명료하며 납득가능한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구해지는 것일 터. ‘확신과 단순 진리화’. 너무 복잡한 것은 기치(키치 아니다)로서 쓰이기 어렵기에, 기치로 쓰일만한 것들은 단순하게 집약된 명제와 그를 뒷받침하는 확신에 찬 몸짓이다. 나는 언제나 이 비슷한 구절을 지나칠 때면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떠올린다. 연설, 선동 및 웅변, 그 깃발과 휘장 아래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미지의 그늘 아래에 결집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같은 신념을 공유하고,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올바름, 더없는 확신이 주는 고양감. 누가 거기 쉬이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요약하자면 키치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핵심적 이미지이고, 그것은 미학적 이상의 면모를 지니며, 그 외 반 反 미학적인 것을 배척하는 성질을 띤다. 여기서 미학이라는 단어를 떼어놓자면, 키치가 인간 조건이자 인간의 안타깝고도 보편적인 사실임이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즉 키치는 인간의 믿음과 애호가 대상을 선별적으로 대하고 그 이외의 것을 배척하는, 기본적인 배타성의 원리에 ‘이상적 미학’의 요소가 가미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키치다움이란 그 미학적 이미지에 대한 편입 및 연대 의지이다. 그것은 어떤 ‘기치’가 엄격한 진실로서 증명된 까닭이 아니라, 그것이 함께 추구할만한 이미지이자 공감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소구되는 것이다. 개개 인간이 모두 자신의 고유한 내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펼친다면 우리는 쉬이 공감할 수 없을 것이며, 비록 개별적으로는 가능할지라도 집단화는 불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키치는 인간에 있어 필수적인 것, ‘사회적’ 존재로서의 조건이다. 핵심적 이미지가 형성한 교집합, 경험적으로 완전히 단절된 개개 인간이 서로 같은 것을 느끼고 공감하게 될 수 있는 지점.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키치의 객관적 의의는 이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을 몸소 느끼고 누리지 못하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있어 심정적으로, 혹은 감각적으로는 경멸스러울지라도 (공감치 못하는 것에 대한 배타성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키치와 화해해야만 한다. 분명히 세상에는 나 같이 염세적이면서, 강박적이고 편집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허나 결국 키치, 나아가 선별과 배제가 인간의 기본적 요소이고, 그에 반하는 것인 편입과 연대가 사회적 인간의 조건인 한, 우리는 그것과 화해해야만 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자타를 무엇으로 인식하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고 사실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기로서이나, 서로에게 이르러 인식이 부조리를 낳는 지점은 다름 아닌 배제와 강압에 있다. 모든 믿음이 그 가슴 안에서만 머물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 있다면, 마치 기도처럼, 믿음은 전적으로 고유하고 자유한 관념적 행위일 수 있었겠지만 믿음은 행동으로 이어져 세계에 불가피하게 현현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상호 간섭한다. 말은, 그 이전에 인식은 결코 고유하며 자유로운 것이 아니이다, 우리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한에는. 우리는 말함으로써, 그 이전에 인식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배제와 강압을 수반한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조금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말 이전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키치는 내게 있어 적극적 배제이자 소극적 강압으로 다가왔다. 핵심적 이미지, 말하자면 ‘인간 만세’와 같은 것들을 나는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었고, 동의하지 못했기에 배제되었다. 그 배제가 나아가 강압으로까지 내 안에서 확대해석되어왔음을, 이제는 알아볼 수 있다. 그건 마치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너는 우리 편에 끼워주지 않을 거야’처럼 느껴졌고,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한다는 말인가?’로 이어졌더랬다는 말이다.
키치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키치를 이해해야만 한다. 키치를 이미 느끼고 그와 더불어 있는 사람에겐 일말 어려움이 아니었겠지만, 세상에는 나같이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그러므로 오래 방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두고 쉬운 말로 외곬 내지는 반골이라고 부르고, 부적응자 혹은 아웃사이더라고도 부르며, 좋게 말하면 고유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고유함, 그것참 듣기에 좋은 말이지만, 그건 사실 아무것도 쉬이 공유치도 공감치도 못하는 것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키치를 몸으로 곧잘 느끼지 못하면서 그것을 이해해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기로서니 필요한 일. 변치 않고 지금 이대로와 같을 것이냐, 변하기 위해 무던 애를 써볼 테냐. 고독할 테냐, 애처로울 테냐. To do or not to do. 나는 인간 만세를 연구하기로 한다.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동의할 수 있을지 더 정확히는, 어떻게 하면 그 자연발생적인 편입 의지가 내 안에서 비판되고 해부되어 낱낱이 분해되기 전에, 스스로로부터 그것을 보호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거기엔 내 헤아림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다음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