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공연 모임 후기 - 김, 박, 정
4개월의 모임이 그 공식적인 일정을 마치는 시간, 짧은 후기를 남기며 지나온 장면들을 갈무리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이걸로 4번째 후기. 언제나 마지막에 이르러선 전부 되짚어보게 되기에, 다시금 분출하려는 감정에는 기쁨과 못지않은 애닳음 등이 끓어 오르고 솔찮이 버무려져 있으나 나는,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이 기쁨이었노라 자답 自答하며 생각의 매듭을 꾹 당겨 여민다.
이 앞에 도열한 기억을 헤아리다, 기쁘고 기뻤으며, 하여 애 자지게 내달으려고만 하던 심경의 연속, 웃음을 활짝 피워낸 모순, 망설임이 마지막 바짓단을 움켜쥔 채로 우리가 거기 마주 보고 있었다. 모호하지? 언제나 그랬다. 그러나 이해하겠지. 내 안에 나조차 다 담아낼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감각과 사유의 파도가 굽이치고 있었다는 것은.
내가 가장 감상적이게 되는 순간은 이렇듯 마지막의 목전 目前에 있다. 언제나 여기 이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듯한, 최후의 감상은 높다라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솟아오르나 나는 멀리 흩어져가는 연기 같은 기억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내 앞에 놓인 우리의 순간을 굳이 이별이라 부르진 않을 것이다. 너희가 선창하고 내가 답하였듯, 하여 우리 이야기한 그 수많은 말 안에 숨어 있던 것들이 가리키고 있었듯이, 우리는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마치 영원히 회귀하는 세계선처럼 기억의 저편에서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말이다.
어느 평범한 목요일이었지 싶다. 처음 만난 날 우리는 뮤지컬 카르밀라를 함께 보았다. 연극은 적당하였다. 우리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논평을 짧게 나누고 이튿날 있을 각자의 일정 때문에 일찍 돌아섰다. 두 번째 만난 날, 우리는 용산의 어느 카페에 모여 이야기했다. 서로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문답을 주고받다간, 아마 ‘김’이었을 것이다, 각자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한 차례에 너는 조심스레 우주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수줍은 열정과 장대한 호기심, 밤하늘보다 먼 곳을 바라보는 듯, 노래하고 찬미하듯이 이야기하는 너를 따라서 일행들의 동공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하필 내 안에도 자리해 있던 오래된 열정들이 쏟아질 수 있음에 나는 반색했고 그렇게 우리는 우주와 존재, 무한과 영원과 운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채 이해할 수 없고,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들.
영원할 것처럼 빛나는 항성도 끝내 연료를 다 소진해 차갑게 식어가고, 헤아릴 수 없이 머나먼 미래 저기 밤하늘 위로는 이미 식어버려 관측되지 않는 다 타버린 재의 별, 빛나지 않는 무량한 질량 덩어리, 철별과 흑색왜성 혹은 블랙홀로 가득 뒤덮일 것이다. 언젠가, 머나멈 보다 머나먼 언젠가 이를 우주의 종막에 대해 우린 이야기했다.
항성의 연료인 수소와 헬륨은 결국 그 쓰임에 끝이 정해져 있고, 핵융합의 팽창력이 마침내 중력의 수축하는 힘을 이겨내지 못하게 되는 시점에 이르러, 중력붕괴에 의해 물질이 중심핵을 향해 압축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물질들은 행성상 성운의 형태로 우주를 향해 흩뿌려진 채 하얗게 식어갈 것이고, 그보다 무거운 항성의 중력은 전자 축퇴압의 저항력을 무너뜨리며 초신성 폭발을 일으킬 것이며, 그보다도 더 무거운 질량의 덩어리는 마지막 임계인 중성자 축퇴압의 저항력마저 무시할 정도로 강렬히 수축하여, 비로소 밀도가 무한인 작은 점으로 끝없이 붕괴해 시공간의 곡률을 왜곡하고 빛마저 집어삼키는 거대한 심연이 될 것이다. 별의 최후.
허나 전 우주의 모든 수소와 헬륨이 타오르기 전까지, 우주가 너무 팽창해 물질들이 서로 모일 수 없게 되기 전까지는, 행성상 성운으로부터 또 다른 별이, 초신성으로부터 새로운 중원소가, 거대질량 블랙홀이 인도하는 막대한 흐름을 따라 새로운 은하의 질서가 태어날 것이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재는 거름이 되고 장작이 되어 다시금 재로 타오르기를 반복할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타버리기 전까지는. 그때까지 여기 따사로운 볕이 내리는 대지 위로는 물이 증발하여 비가 되기를 반복하고,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기를 반복하고, 그 순환 아래 만물이 태어나 죽기를 반복할 것이다. 하나의 별에서 또 다른 별로, 먼지로부터 와 먼지로 되돌아가기를.
밀도와 질량으로부터 중력이 발생하고, 그 중력이 원소들을 뭉치어 핵융합을 일으키고, 융합을 마친 뒤 수축하고 팽창하기를 반복하고, 이내 폭발하고, 끝없이 식어가거나 끝없이 수축하는 하나의 점이 되는 일련. 이 모든 것, 항성의 일생과 우주의 순환, 나아가 존재의 운명과 기원이 그저 물질이 한 점에 모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신비롭다. 달리 표현하자면 ‘빛이 있으라’는 명령은 과학적으로는 ‘물질이 서로 가까이 모여 있으라’라는 단순하고도 소박한 명령이었다는 것은 놀랍다. 마치 바람이 불어 먼지가 모이고 우연한 일 점에 이르러 쌓여가는 듯이, 이렇게 소박하고도 막대한 것이란.
‘모든 존재의 구성, 입자와 배열이 무한한 시공간인 우주 안에 흩어지고 모이고,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宇宙, 만물이 거하는 집 중의 가장 큰 집인 이 공간 내의 모든 것들이 똑같은 수순과 인과를 거쳐 재현되고 있을 것이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먼지가 모여 기름 되고, 다시 타오른 재로서 먼지처럼 흩어짐이다.’ 이는 영원회귀의 사상.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것. 만나고, 이별하고 다시 만나게 하는 것에 대함. 모든 물질들을 모이고 흩어지게 하는 우연, 만물을 인도하는 거대한 손, 그 여로의 상상을 따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 있었고 몇 번이나 있었던 일들이 되어버리는, 지극히 사소하고도 아득한 인과를 우리는 상상의 먹지 위에 토해냈다. 너희 눈에는 별이 반짝이는 듯했다.
세 번째 만난 날, 우리는 신촌에서 연극 이방인을 함께 보았다. 나는 뫼르소의 연기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내었다. 네 번째 만난 날, 우리는 성수의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했다. 우주와 영원회귀, 결정론적 운명론에 대한 지난 이야기가 이어지다간, 신점 神占에 대해 주제가 옮아갔다. 지난주에 ‘박’이 신점을 보고 온 까닭이다. 신점에는 설명할 수 없는 신통한 부분이 있노라, 너는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분명 처음 보았을 텐데, 무당은 마치 나를 다 알아보았다는 듯이 지나온 내 과거를 줄줄 꿰고 있더라는 너의 말엔, 감출 수 없는 흥분과 미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신점에 꽤나 빠삭한 너는 이 낯설고도 신비로운 세계관을 한껏 열린 우리들의 눈과 귀로 불어넣어 주었다.
‘무당은 이미 결정된 과거에 대해서는 웬만큼 신통하지만, 미래에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개인의 미래는 어느 한 가지로 확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습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어느 한 무당이 너에게 알려준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너의 말에 양자역학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미시세계의 모든 물질은 관측되고 상호작용하기 전까지 입자이자 파동인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그 유명한 말이 네가 말한 우리의 미래와 운명에도 그럴듯하게 맞아 들어갈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 무당의 관점을 상상한다. 그녀가 바라본 우리의 눈동자 속에는 어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동시에 중첩되어 있을지를. 우리 삶의 서사에도 분기점이 있다면, 그 순간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것들에 의해 미래는 점차 분명하게 결정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르게 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니까 나이가 들수록 우리 눈동자 안에 중첩된 가능성들이 걷혀 가고, 점차 또렷한 상들만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분명하고 또렷한 미래, 그것은 기쁨일까, 우리가 신점을 통해 알고 싶어했던 것들. 나는 한 가지 가능성만이 남아 있어 비로소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된 미래가, 어쩐지 서럽게 생각됐다. 그건 다른 모든 가능성이 없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과거를 생각한다. 지금이 예전에 비해 또렷해진 순간이라면, 그때는 모든 것이 불분명했기에 한편으로는 더욱 많은 가능성들이 중첩된 시절이었을 것이다. 지나온 순간에는 중요한 삶의 분기점들, 다행히 그렇지 않았으나 자칫 잘 못 흘러갈 뻔했던 삶의 순간들과, 딱히 모든 결과를 알지 못한 채 결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 올바른 것으로서 증명된 선택들, 마찬가지 결과를 알지 못하였기에 그저 망설이고 흘려보냈던 선택들이 있었다. 모조리 기억한다. 그리고 택하지 못한 모든 선택의 뒤편으로 ‘만약’이라는 이름의 상상이 구현되기 시작한다. 그건 내가 지금에 이르기 위해 잃어버린 가능성의 얼굴들이다.
나는 물었다. 영원회귀의 가설에 따라 우리가 만약 이미 겪은 것들을 동일하게 겪게 되고, 우리가 그 재현의 순간을 자각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떨 것 같느냐고. 이미 일어난 지금으로부터 모든 것이 일어나기 전인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냐고, 다시 돌이키고 싶은 선택, 잃어버린 가능성의 어느 서늘한 얼굴을 간직하고 있느냐고. 너희는 굳이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쉬움이야 있겠지만,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삶이었고 그걸 돌이킬 정도의 후회는 없노라고 말했다. 그 중 ‘정’의 눈은 유독 깊었다. 오독일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긍정하는 그 순간 그녀의 눈 안에는 환희나 아련함이 아닌, 담담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건 무언가를 삼키고, 완전히 받아들인 듯한 기색이었다.
나는 돌아가고 싶었어. 그때 결코 할 수 없었던 선택들이 있었고, 지금에야 뒤늦게 할 수 있게 된 선택들이 있어. 이 모든 것을 일찍이 알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힘겨워할 필요도 방황할 필요도, 고독 속에 오래 저미어질 필요도 없었을 텐데, 나는 오래도록 아쉬워했다. 돌아가고 싶었어. 불안 속에 지나 보낸 시간과 떠나보낸 인연들을 다시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 나는 침묵 속에 생각의 매듭을 묶고, 너희들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를 얻으면, 반드시 한 가지를 잃으리라. 개중 어느 한 가지 과거를 뒤바꿀 수 있었더라면, 우리가 만나 신점과 결정론적 운명론과 니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야기는 더 이상 전개되기 어려울 만큼 충분히 깊었고, ‘김’은 어쩐지 모든 것이 어렵고 무겁게 느껴진다 말하며 웃었다. 그녀는 분위기를 환기한다, 특유의 동그란 볼이 생글하니 접혔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동시에 중첩되어 있는 거라면 미리 알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럼 그냥 좋게 생각할래요. 저도 미래가 불안하고,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모르겠고, 근데 왜인지 내가 다 해낼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럼 그냥 좋게 생각할래요.’ 어딘가 진중해졌던 분위기가 탁-하고 풀렸다. 그래 알 수 없는 것이지. “잔디가 안 좋잖아? 그럼 그냥 좋다고 생각하면 돼.” 나는 그녀의 말이 SNS에 유행하는 ‘손흥민적 사고’ 같다고 말하며 같이 와-하고 웃었다.
우리가 신점을 통해 알고 싶었던 것, 하지만 결코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것, 운명과 미래들은 중첩 상태 그대로 두어야만 한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고정된 것이기 때문이거니와, 한 가지를 얻음으로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고도 얼마든지 인생은 흘러가고, 그럼에도 일어날 것은 일어날 것이고, 일어난 것은 다시금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좋게 생각해야지. 과거가 아쉽잖아? 그럼 그냥 좋다고 생각하면 돼. 미래가 불안하잖아? 그럼 그냥 좋다고 생각하면 돼. 그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말이란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그래, 일어난 모든 일들은 다시금 일어날 것인 동시에 이미 일어난 일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한 번 그러했듯이 장차 다른 세계선에서 다시 만나, 마치 전 우주상 최초의 사건인 것처럼 조우할 것이고, 떨리는 마음과 망설임으로 서로를 더듬듯이 알아갈 것이며, 그렇게 정해진 것인 양 친밀해질 것이고, 설레일 것이고, 마침내 항성이 식어가는 것처럼, 혹은 항성이 우주 공간을 향해 질량을 잃어버리던 것처럼 천천히 풍화되듯이, 서서히 멀어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한 번 그러했던 것들이 영영 다시금 그렇게 될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기억의 저편에서,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날 것이다. 미래는 모르지만 우리가 이미 만났고, 또다시 만나리라는 것, 그것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P.S) 공연 모임 후기인데, 우주랑 운명 이야기만 잔뜩 했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연극과도 사뭇 닿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연극을 사랑하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우리의 삶을 대신하여 한 개인의 선택과 결과와 운명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