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_협롱채춘도
몇 해 전 여름 빈미술사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대부분 이름난 유럽의 미술관이 그렇듯 빈미술사박물관도 무척이나 커서 하루 동안 본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 찡찡이가 늘 옆에 붙어있는 나로서는 본다기보다는 그림 앞에 서서 ‘눈도장 찍었다.’ 하는 수준이 더 맞지 싶다. 그래도 그날은 어찌어찌해서 박물관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았고,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박물관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내 앞에서 초록색 바지를 입은 얇은 종아리의 게다가 맨발인 여인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인상적인 순간이어서 재빠르게 목에 걸려있는 카메라로 그 여인의 발을 찍었다. 그러곤 서둘러 밖을 따라 나갔다. 어떤 여인이길래 맨발로 박물관을 누볐는지 궁금했다. 당연히 젊은 여인이 아닐까 했는데, 그런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백발의 할머니였다. 아니 할머니가 맨발로 박물관을 보았다니. 멋졌다. 맨발로 그림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멋지다’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듯 종종 누군가의 뒷모습은 의도치 않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다.
우리 옛그림에서 매력적인 뒷모습을 찾는다면, 간송전시회에서 본 윤용의 ‘협롱채춘도(挾籠採春圖 봄나물 캐는 여인)’를 손에 꼽을 수 있다. 봄기운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봄날. 나물을 캐다 일어나 뒤를 돌아보고 있는 아낙네(왠지 우리 그림은 여인이란 말보단 아낙네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왼손에는 호미가 들려있고 오른쪽 옆구리엔 바구니를 끼고 있다. 머리에는 흰 두건을 했고 저고리는 푸른색인데 소매를 걷어붙였다. 치마는 걷어 올려 허리춤에 질러 넣어 속바지와 단단한 종아리가 보인다. 신발은 짚신을 신었는지 발 사이사이 구멍이 보인다.
이 그림이 특별히 눈에 들어왔던 건 아낙네의 뒷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아낙네가 젊은지 혹은 나이가 들었는지 또 누구(무엇)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여러 상상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한다. 아낙네의 완만한 어깨와 부드럽게 내려놓은 팔을 보고 있자면 아낙네는 분명 사랑하는 아이를 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제법 더워진 봄날 산에서 나물을 캐는데 저 멀리서 사랑하는 아이가 뛰어와 손짓하며‘엄마’를 부른다. 아이에게 맛난 음식 배부르게 먹이지는 못하지만, 오늘 저녁 마주 앉아 봄나물을 반찬 삼아 보리밥 한 숟가락 뜨는 그 행복한 시간을 앞두고 있을지 모른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다.
윤용은 왜 아낙네의 뒷모습을 그렸을까? 윤용은 할아버지가 윤두서로 명문 사대부 집안의 선비였다. 남녀와 반상의 구별이 사회적으로 확고하던 시기에 비록 신분적으로 낮은 아낙네였다 할지라도 명문 사대부 선비가 얼굴의 빤히 쳐다보며 여인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았을 터. (이러한 예는 관아재 조영석인 그린 ‘촌가여행 村家女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낙네의 뒷모습이 그림을 그리는 데 편했을 거고, 보는 이가 궁금함과 설렘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이건 마치 아낙네의 외모에 대한 품평 같아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단단한 종아리보다는 가느다랬으면 그림이 좀 더 부드럽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사랑의 마음이 전달되는데 좀 더 좋았을 것 같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시대적 상황이 아낙네의 다리를 뚫어지라 쳐다볼 수 없었고 급하게 그리다 보니 그리되지 않았나 싶다.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도 설레는 그림이다.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내 뒷모습은 어떨까?
내 몸짓과 발걸음에서 빈미술사박물관의 백발의 여인(?)처럼 설렘과 멋짐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갔으면 싶다. 그런 멋진 할아버지가 되어 조용히 눈감을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사람이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