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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rick Oct 10. 2022

어쩌다 내게 온 답사, 또 다른 답사를 낳고

노강서원, 돈암서원, 관촉사 은진미륵 그리고 강경

2020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2020년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코로나19 때문에 쉽진 않았지만, 방역지침을 지켜가며, 또 낯선 곳의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렇게 답사를 다녔다. 4월 마곡사 답사를 시작으로, 인사동 마그리트 전, 러시아 현대미술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과 상설전시, 통영, 해남, 남한강 절터, 남도 미술 답사 그리고 논산까지. 쭉 읊어보니‘코로나 시국에 참 잘 돌아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 홀로 답사 가기도 하고 <우리옛그림연구소> 동료들과의 답사도 있었지만 대부분 답사는 가족과 함께였다. 헤아리고 보니 작년보다 답사가 줄어든 건 분명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한 번만 다녀오면 다 볼 것 같았던 답사가 사실 또 다른 답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번에 소개할 논산답사도 아마 또 다른 곳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자들은 ‘논산’ 하면 단박에 ‘논산훈련소’를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 군 생활의 첫 시작이 논산훈련소였고, 강렬한 그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삼국시대부터 격전의 장이었고 또 많은 유적지와 유물들이 있음에도, 논산 하면 무조건‘논산훈련소’다. 하지만 이번 답사는 그 기억은 밀쳐두고, 논산을 보러 떠났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보물 제1750호 노강서원 강당, 국보 323호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그리고 강경까지! 하루면 논산을 두루 볼 수 있다. 하지만, 논산 여러 곳을 갈 예정이라면 첫 답사지를 현명하게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답사는 노강서원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수원에서 노강서원을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천안JC에서 논산천안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탄천IC로 나가 5분 정도 더 내려가면 된다. 노강서원에서는 보물로 지정된 강당만 보면 좋을 듯하다. 서원의 기본적인 구조는 지난 ‘우리아이들’ 봄호에서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둘러보며 살펴보았고, 논산에서 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을 볼 예정이니 집중과 선택을 하는 것이 좋겠다. 

보통은 사당이 강당보다 격을 높게 한다. 그래서 병산서원이나 도산서원은 지형적으로 사당을 강당보다 높은 곳에 두어 위계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래서 강당에 비켜 배치되었다. 성균관은 사당이 강당보다 앞에 배치된다) 반면 노강서원은 평지에 있으므로 사당보다 큰 강당이 격이 더 높아 보인다. 그래서 노강서원은 강당과 사당을 일직선에 놓으면서 (앞뒤로) 위계를 갖도록 했다. 이러한 강당과 사당 배치는 기호학파의 공통적인 양식이다. 노강서원의 강당도 대부분 서원처럼 정면 5간 측면 3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병산서원의 강당인 입교당과 다른 점은 대청마루가 있는 가운데 3간에(좌우 1간은 온돌방이다.) 들문을 두고 있다는 것과 강당의 맞배지붕 박풍아래로 (눈썹) 지붕을 하나 더 두어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눈썹지붕의 모습이 그리 예쁘지는 않아서 강당의 멋을 감소시키기는 하지만 비바람을 막아준다는 점에서는 실용성이 있다.                                                    

노강서원 강당


강당 안으로 들어서서 천장을 보면 하얀색 사이로 서까래의 질서정연함이 아름답게 보인다. 대들보를 보면 우람하면서도 곧게 뻗은 나무가 아닌 울퉁불퉁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멋을 보여준다. 다만 아쉬운 점은 첫 번째는 안쪽에서 바깥쪽을 보았을 때 병산서원에서 느꼈던 앞이 탁 트인 시원스러운 멋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실내가 정리 정돈되지 못하고 산만하다는 것이다. 물론 들문이 있으므로 밖에서는 단정해 보이고 안에서는 안락함을 느낄수 있지만, 건물이 낡고 관리가 되지 않은 듯한 인상을 버릴 수 없다. 이러한 이유는 건물이 그동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고, 들문처럼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만들어져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 탓도 있겠다.

들문 위로 작은 서까래를(?) 두어 창방과의 사이에서 빈 곳이 있고, 창방과 서까래 사이에도 화반이 있어 역시나 공간이 있다. 어차피 바람이 숭숭 통할걸. 왜 들문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들문의 역할도 그렇고 위치까지 여러모로 모호하다. 온돌방도 놓인 위치가 애매하다. 온돌방이 대청마루 앞까지 나오지 않고 4/5 지점까지만 있으므로 그 앞으로 어정쩡한 복도가 생겼고 그 앞으로도 역시 들문이 있다. 외관의 아름다움에 비해 내관은 조잡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나라 서원 강당 중에 가장 크다고 하지만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노강서원이었다. 

노강서원에서 나와 17분 정도 가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돈암서원이 나온다. 돈암서원은 이이의 제자로 기호학파의 기반을 다지고 예학의 실천적 선구자로 꼽히는 사계 김장생을 배향하고 있다. 그리고 김장생은 돈암서원뿐 아니라, 동방 18현 중의 1인으로 성균관 대성전에도 모셔져 있다. 1548년에 태어나 1560년 송익필에게서 사서 등을 배웠고, 20세에 이이의 문하에 들어갔다. 학행(學行)으로 천거 창릉참봉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임진왜란(1592년) 때 호조정랑. 정묘호란(1627년) 때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반정(1623년)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로 정국 운영에 있어 매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제자로는 송시열, 최명길, 이경직 등이 있다. 특히 예학(禮學) 분야를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에게 전수하였으며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김장생은 예를 실천하는 데 왕과 사대부, 일반 백성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주자가례를 우리나라에 맞게 고쳤다. 이러한 김장생의 학문적 성과는 추후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자, 김장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보았으니 ‘호수 위에 배가 떠 있는 듯 아늑하다.’라고 하는 돈암서원 답사를 이제 시작해보자. 내비게이션에 돈암서원을 입력하고 찾아가면‘돈암서원 한옥마을’이라는 곳으로 안내한다. 주차장도 널찍하니 좋긴 한데, 하마비와 홍살문을 지나 돈암서원의 정면이 아닌 옆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서원을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긴장감이나 경외심을 느낄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든 대문을 정면에서 보고 들어가는 것은 답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는 아쉽다.

돈암서원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산앙루’이다. 2층 높이라 평지에 지어진 돈암서원을 모두 가리고 있다. 왜 산앙루가 여기에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는데, 건립연도를 보니 2006년도다. 아무래도 서원 앞의 넓은 평지를 조망할 수 있도록 2층으로 지었나 본데, 오히려 서원의 정문인 입덕문을 떡 하니 막으면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서원 대부분이 정문을 2층으로 하고 있어, 휴식공간으로서 역할을 위해 산앙루를 만든 것 같은데 그 위치가 모호하다. 후대 사람들이 조화를 생각지 않고 만든 결과인 듯하여 안타깝다. 이제 입덕문으로 들어가 보자. 강학 공간인 양성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정의재와 거경재가 보인다. 양성당은 정면이 5간, 측면 2간으로 되어 있는데, 정면 좌우 1간씩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3간이 대청마루다. 그리고 대청마루 가운데로 들어열개문을 세워 날씨가 추울 땐 대청마루의 반만 사용하고, 따뜻한 날에는 문을 처마에 걸어 넓게 사용했다고 한다. 다만 공간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 기호지방의 명문(?) 서원으로서 강당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산앙루

기록이 찾아보니 돈암서원의 처음 위치가 따로 있었다. 지금보다 서북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아 수해에 대한 염려가 있어 지금의 위치로 1880년에 옮겼다고 하는데, 그때는 양성당(현 강학당)과 사당 정도만 이건 되고 응도당(옛 강당)은 다음에 옮겨 세워지었다고 한다. 응도당의 크기가 양성당보다 훨씬 크다 보니 1871년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이후라 여러 여건상 이건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보통 서원의 사당은 강당보다 높은 그곳에 있다고 앞서 말했다. 돈암서원이 옮겨진 자리가 평지다 보니 응도당이 강당으로 옮겨 세워지었을 때 사당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양성당을 사당 앞으로 옮기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측대로라면 기호학파의 강학당과 사당의 평지에서의 앞뒤 위계 형식은 서원의 건립 시기부터라기보다는 다음에 생겨난 것이고, 돈암서원의 사당도 언덕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옛 강당인 응도당은 정면 5간과 측면 3간으로 만들어졌는데, 정면 기단이 약 17.2m, 측면 기단이 약 12m로 우리나라 서원 건물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응도당이 강학당으로 지금까지 쓰였다면 앞서 살펴본 노강서원의 강당이 차지하고 있는 가장 큰 강당이란 타이틀은 응도당으로 넘어왔어야 한다. 

정의재-양성당-거경재(좌측부터)

응도당의 전체적인 구조는 노강서원의 강당 구조와 같다. 다만 대청마루에서 두 간 뒤로 물린 위치에 온돌방이 위치하고 온돌방은 좌우 1간씩 대칭으로 있지 않고 좌측에 2간 반(거경재), 우측에 1간(정의재)으로 되어 있어 이전에 보던 서원과는 조금은 다른 구조다.                                                     

  하지만 온돌방의 벽면 전체를 채우지 않고 대들보가 드러나도록 한 것은 기호지방 강당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천장 부분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에 바닥은 따뜻할 수 있으나 위로는 바람이 통하게 된다. 노강서원의 강당도 그러한데, 일반적인 모습과 달라서인지 역시 사뭇 낯설게 다가온다. 

기호지방 서원 강당의 또 다른 특징인 눈썹지붕이 응도당에도 있다. 응도당의 규모가 큰 만큼 눈썹지붕의 또한 크기 때문에 외곽기둥 안쪽으로 경사 기둥까지 세웠다. 경사 기둥이 눈썹지붕을 받친 모양새를 보면 마치 여자들이 마스카라로 눈썹을 추켜세우는 듯하여 재밌다.                                                     

정회당

  돈암서원에 많은 건물이 있지만, 마지막 꼭 보았으면 하는 곳은 응도당과 마주 보고 있는 정회당 이다. 정면 4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가운데 2간에 방을 만들고 좌우 1간(측면 2간)과 정면 2간에 마루방을 대칭으로 만들어 단정하면서도 강학과 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정회당은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강학했던 건물로 돈암서원에 본래부터 있었던 건물은 아니고 대둔산 자락에 있던 것을 195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정회는 유생들의 수행방법 중의 하나로 앎을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계 김장생은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여든의 나이었음에도 의병과 식량을 모으라는 인조의 교지를 받들었다고 한다. 부친의 가르침대로 몸으로 실천하는 참된 지식인이었다. 돈암서원에서 마지막으로 보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 뒷짐 지고 쉬엄쉬엄 걸으며 김장생의 삶을 사색하면서 말이다.

논산에 왔으니 관촉사를 아니 가볼 수 없다. 돈암서원에서 15분 정도 시내 쪽으로 가다 보면 반약산 아래로 관촉사가 나온다. 반약산 중턱에 있는 관촉사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인 국보 323호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이 논산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높이 18m에 이르며 2개의 돌을 이어서 조각한 석불로 머리에는 관(冠)을 쓰고 있고, 왼손은 검지 중지를 둥글게 말았고 팔찌가 조각된 오른손은 위로 살짝 들어 올려 연꽃을 쥐고 있다.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은 968년 광종 때부터 1006년 목종 때까지 무려 38년 동안 만든 것으로 신체 비례가 4등신 정도로 얼굴과 손을 매우 크게 만들어 멀리서도 잘 보인다. 얼굴에는 긴 눈과, 넓은 코, 두툼한 입술과 큰 입이 섬세하지 못하고 토속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크면서도 못생긴(?) 불상을 왜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기록엔 ‘관음보살상’인데 ‘미륵보살’이라고 부를까?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는 935년 신라의 멸망, 936년 신검과의 일리천(현재 구미) 전투에서 이겨 후삼국을 통일한다. 논산은 삼국시대에도 백제의 마지막 거점이었지만 후삼국 시대에도 마지막까지 후백제의 영토였다. 이러한 곳에 이제 막 시작하는 고려가 18m나 되는 ‘관음보살상’을 세운 건 뻔하다. 왕즉불. 고대로부터 부처님은 왕을 상징한다. 부처님이 곧 임금이고, 임금이 곧 부처다. 중생들에게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는 관음보살을 만들면서 논산지역 민심을 회유하고 또 반란의 마음을 누르고자 했다. 나 고려의 왕은 화평한 세상을 만들겠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논산지역 사람들은 왜‘미륵보살’로 불렀을까?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한 뒤 56억 7000만 년 후에 이 땅에 내려와 부처님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님이다. 새 세상을 여는 그런 보살님인 것이다. 논산지역 백성들에게 고려는 결코 새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륵보살이 이 땅에 강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관음보살’을 ‘미륵보살’이라 불렀다. 마음이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른 법이다. 

관촉사에선 보물 제232호 석등과 유형문화재 제53호 배례석 그리고 문화재자료 제79호 해탈문도 있으니 조금 여유롭게 경내를 둘러보면 좋다. 

이번 논산답사의 마지막은 논산시 남서부에 있는 강경읍의 강경장이다.(관촉사에서 20여 분 걸린다.) 강경읍은 강경천과 논산천이 금강과 이어져 내륙항으로 1930년대까지 금강 하구의 관문 역할을 했다. 강경장은 우리나라 3대 시장 중의 하나였고,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금강 남안의 평야 가운데 하나로 큰 도시를 이루었고 소금과 새우젓이 유명했다고 한다. 가볼 만한 곳으로는 1925년 목조건물로 건축된 (구) 강경노동조합, 1961년 프랑스 출신의 보드뱅 신부가 설계와 감독한 강경성당, 김대건 신부가 첫 미사를 드렸던 곳에 세워진 근대역사기념관 등이 있다. 강경은 이렇게 따로 둘러볼 곳이 너무 많아서 하루 코스로 따로 답사해야 한다. 조금 바쁘게 움직이며 몇 곳을 둘러보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소개하는 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넘기겠다. 

대학원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할 때 교수님이 우스갯소리를 하던 말이 있다.

“여러분은 좋겠어요. 안가 본 곳이 많아서.”

처음에 들었을 땐 우릴 무시하나 싶기도 했지만, 정말 안 가본 곳이 많아서, 갈 곳이 많아서 즐거운 인생이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때때로 복원공사와 같은 변수 때문에 계획했던 것을 보지 못할 때도 있고‘윤두서의 자화상’처럼 때론 내가 본 것이 가짜라는 말에 실망키도 하지만, 바다나 볼까 하고 갔던 강경에서 근대문화를 만나기도 하고 우연히 이정표를 보고 사계 김장생 생가에 들리기도 했다.

어쩌다 내게 온 답사지에서의 실망과 즐거움은 또 다른 답사를 낳는다. 

2020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 2021년 어디로 답사가면 좋을까 즐거운 고민이 든다. 우리 대부분이 볼 게 많아서 즐거운 인생 아닐까? ^^    


 

■참고도서

김희곤, 한국의 서원, 미술문화, 2019

이종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M&B, 2019

유홍준, 한국미술사2, 눌와, 2012

문화재청 홈페이지

돈암서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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