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음(飮:마시다)’. 몸담고 있는 연구회에서 계획했던 2020년 첫 답사 매화향기를 찾아 나서려던 여정은 코로나19로 취소되었다. 어디 답사뿐인가. 일상의 삶도 살얼음판을 걷는 그런 조마조마함이 가득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비록 우리 아이들도 없고 언제 개학할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에게 ‘우리아이들’이 손에 닿았을 때에는 따뜻한 봄날을 반 아이들과 누리고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이번 답사지 소개는 예전 기억에 비춰 쓸수 밖에 없다. 어디가 좋을지 한참 생각하다 고른 곳, 조선 정신의 고장 안동에서 2019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이다. 조선시대 서원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닌 마음과 몸을 닦는 곳으로 성현의 말씀을 배우기도 하고 스승의 학덕을 기리며 학문의 방향을 찾아가는 곳이었다.
우리나라의 다른 문화나 제도가 대개 그렇듯이 서원 또한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은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1543년 경상도 영주시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그 후 서원을 정착시키고 보급한 것은 이황이다. 이황은 ‘학문의 도’를 배우고 가르칠 곳으로 서원밖에 없다고 생각 전국에 서원 설립을 추진했다. 이황의 노력으로 설립된 서원으로 소수서원, 역동서원, 이산서원, 영봉서원 등이 있다.
안동에는 여러 개의 서원이 있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이 대표적이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간 거리는 자가용으로 1시간 30여분이 걸려 그 거리가 제법있다. 하루에 두 곳 모두 보기에는 조금 벅찬 감이 있기 때문에 두 곳을 이틀에 걸쳐 볼 것을 권한다.
두 서원 모두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적 중요성을 담고 있는 곳이다. 시대순으로 본다면 도선서원을 먼저 보는 것이 좋고, 서원 외에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잠자리를 생각한다면 병산서원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 이른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던 이황을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둘째 날 일찍 도산서원 가볼 것을 추천한다. 여유있는 여행 일정이라면 이왕 안동에 왔으니 시내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가장 오래된)로 국보 16호인 ‘신세동 칠층전탑’과 보물 56호인 ‘동부동 오층전탑’을 보고 병산서원으로 가면 좋겠다.
아름다운 열두 폭 병풍 속 병산서원
오늘의 본격적인 첫 번째 답사지 병산서원으로 가보자.
병산서원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선조5)에 서애류성용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에서 시작한다. 서애선생 때에는 풍악서당이라고 불렀고, 서애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병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병산서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9개의 서원 중에서 그 완성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얼핏 보면 서원 앞 병산 때문에 갑갑한 느낌도 들기도 하지만 이러한 환경 건축의 미학으로 극복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3』을 보면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에 대해 최고의 예찬을 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을 배경으로 하여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이 빼어난 강산의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했다는 점에서 건축적, 원림적 사고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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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운영을 자세히 따져보면, 사당은 위로 추켜올리듯 모셔 있는데, 만대루 누마루는 앞마당에서 볼 때는 위쪽으로, 그러나 강당에서 볼 때는 한참 내려보게 레벨이 잡힌 것이다. 사당은 상주 상용공간이 아니고 일종의 권위의 상징 공간이니 다소 과장된 모습을 취했지만 만대루는 정반대로 봄부터 가을까지 상용하는 공간이므로 그 기능을 최대한 살려낸 것이다.
큰 산이 가로막고 있는 답답함을 커다란 만대루를 지음으로써 아름다움을 승화시켰다는 말이다. 이 만대루에 오르기 위해서는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을 통해 바로 올라가면 된다. 그런데 이 복례문이 처음에는 서원의 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21년 서원을 대칭구조로 만들고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처음 위치였다면 복례문으로 들어와 만대루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춰 병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돌렸을텐데, 문을 들어와 곧장 만대루로 바로 올라가는 지금의 위치가 살짝 아쉽다.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크기로 2층 높이로 되어있다. 구불구불한 1층의 기둥들은 세련된 멋은 없지만 오히려 자연의 모습을 닮아 마음을 여유롭게 해주고 주변 경관과도 어울리는 모습이다. 더욱이 1층이 비어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복례문으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되고 스스로 몸가짐을 낮추게 된다. 만대루는 두보의 「백제성루」에 나오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푸른 절벽은 해질녘에 마주하기 마땅하다.)에 따왔다. 아마도 병산을 푸른 절벽으로 비유한 것에 연유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만대루에 오른다면 오후 늦게가 어울리지 않을까 한다. 물론 안동 산골짜기에서 떨어지는 붉은 해를 볼 수는 없겠지만 밤이 다가오는 그 시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만대루 오른쪽 옆에는 광영지(光影池)라는 연못이 있다. 천원지방의(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 원리에 따라 네모난 연못 속에 둥근 섬을 모습을 하고 있다. 천원지방은 병산서원 뿐만아니라 경복궁의 향원지 그리고 종묘의 연못에서도 볼 수 있다. 연못에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연꽃을 그리고 그 주위에는 대나무와 배롱나무를 심었다.
만대루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강학공간인 입교당과 동재(동직재 動直濟)와 서재(정허재 靜虛齋)가 나온다. 입교당은‘성현의 가름침을 세운다.’는 의미로 병산서원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강학을 담당한다. 강학 공간답게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 날렵한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고 좌우 1칸은 온돌방이다. 아마도 요즘 같은 날씨면 입교당 대청마루에 앉아 성현의 말씀을 배우기도 하고, 만대루 너머의 병산을 보며 봄을 만끽했을 듯 싶다.
입교당 좌우로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는 나이가 많거나 학식이 높은 선비들이 기거했고, 서재는 나이 어린 유생들이 기거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동쪽을 높게 보았기 때문에 그렇다. 위치로 보면 동재와 서재이고 각각의 이름은 동직재(動直濟)와 정허재(靜虛齋)다. ‘거동을 바르게 하라.’,‘텅 비면 밝아지고 천하의 이치를 깨닫는다.’라는 뜻인데 유생들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말한다. 욕심이 점점 많아지는 요즘 내게 필요한 말씀이지 싶다. 아니 어쩌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동재와 서재는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보니 남향이 아닌 동향과 서향을 하고 있다. 이건 주거공간의 의미보단 서원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다.
입교당에서 뒤로 돌아가면 존덕사 오르는 길이 나오는데 존덕사는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원에서 구별된 공간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특이한 점은 입교당에서 약간 오른쪽에 존덕사가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원의 대체로 정문부터 강학당 사당까지 일자형으로 배치된다. 병산서원의 경우엔 일자형 배치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쪽으로 존덕사가 치우쳐 있는데, 아무래도 이건 주희의 「주자가례」나오는 강당 동쪽에 사당을 세운다는 것을 따라서 인 듯 하다.
존덕사에는 서애류성용과 그의 아들 수암류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서애류성용은 워낙 유명해서 그러려니 하겠지만 수암류진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수암 류진은 매형 노경임, 아버지, 장현광에게서 글을 배우고 1623년(인조1년) 학행(學行)으로 봉화현감이 되었다. 여러 고을에서 목민관으로 어진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이 그를 매우 존경했고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1634년 지평으로 있을 땐 강학년의 서인정권에 대한 비판에 공개적으로 두둔하여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수암의 강직한 면모를 볼 수 있다.) 1635년 관직에서 물러나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애의 아들답게 깨끗하고 성실한 삶을 산 것으로 일컬어진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면 아버지와 함께 병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존덕사 좌우로는 장판각과 전사청이 있다. 장판각은 서애가 저술한 문헌들의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장판각은 제향공간에 속하면서 존덕사와는 (존덕사의)담으로 경계를 두고 있고, 입교당과는 높은 단으로 그 거리를 두고 있다. 장판각의 존덕사와 입교당 사이에서의 관계가 모호하다.(?) 전사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제기들을 보관하는 장소다.
병산서원에서 마지막으로 볼 공간은 고직사다. 고직사는 □자 구조로 되어있으며 서원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그리 중요한 공간은 아니기 때문에 병산서원에서 나오면서 한 바퀴 휘~ 돌아보면 된다.
매화가 아름다운 도산서원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다 아는 곳인 도산서원으로 가보자. 다 알다시피 1000원권 지폐의 배경이 바로 도산서원이다. 하지만 도산서원의 백미를 꼽으라면 서원보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꼽고 싶다. 주차장부터 도산서원까지 이어진 길은 낙동강을 곁에 두고 굽이굽이 돌아가기에 마치 꿈속의 공간 도원으로 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너른 마당과 족히 수백년은 되었을 법한 나무들이 우리를 마주한다.
꽤 너른 마당이어서 아이들하고 같이 갔다면 한 번 쯤 뛰며 놀아도 좋고, 큰나무 아래에서 쉬워도 좋다. 너른 마당에서 강건너를 바라다보면 꽤나 높은 단에 비석과 비각이 보인다. 1796년 정조가 퇴계선생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별과를 보고, 그 기념으로 시사단을 세우고 비석과 비각을 세운 것이다. 현재의 비석은 1824년 순조 때 비각의 보수와 더불어 고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체제공이 지었다.
몇 해 전 수학여행으로 도산서원이 온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아이들과 도산서원 앞마당에서 과거시험(?)으로 시쓰기를 했었다. 혹! 가르치는 아이들과 이곳에 오게 된다면 시사단 이야기와 과거시험(?)을 본다면 재미도 있고 의미가 있지 않을까?
도산서원은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사후 4년이 지난 1574년 착공하여 1년 만에 조정이 준공하여 선조로부터 도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도산서원의 시작은 도산서당이다. 퇴계선생은 이곳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떨어진 퇴계종택이 사셨고, 근처에 계상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고 계셨다. 그러다 계상서당이 좁아 더 이상 제자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1560년에 새로 지은 게 도산서당이다.
시간이 된다면 도산서원을 가기 전에 퇴계종택과 계상서당 그리고 퇴계선생묘소를 먼저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퇴계선생묘소와 계상서당을 먼저 보고 종택에 주차하고 도산서원까지 걸어오면 된다. 물론 퇴계선생이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오가던 길로 걸어보면 좋겠지만 안동댐 건설로 그 옛길이 끊겼다. 대신 퇴계종택에서 도산서원까지 30분 정도면 걸어올 수 있으니 그걸로 아쉬움을 달랬으면 한다. 그리고 걸으면서 퇴계선생묘소에서 보았던 자명을 되새기면 어떨까 한다.
퇴계선생의 자명(自銘)
나면서부터 어리석었는데 자라면서는 병도 많았네.
중년에 어찌하다 학문을 좋아했고 만년엔 외람되이 벼슬이 높았졌네.
어째 내세를 알겠는가, 이 세상도 알지 못하거늘.
근심 속에 즐거움이,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네.
저세상으로 떠나며 이생을 마감하니, 여기 다시 무엇을 구할 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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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도산서원 답사를 시작해보자.
도산서원은 크게 아래쪽의 도산서당 영역과 위쪽의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뉘고, 서원은 다시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손수 지은 것으로 퇴계선생의 건축에 대한 미학적 관점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서원 보다 더 꼼꼼히 답사하면 좋겠다.
도산서원 정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농운정사, 하고직사, 욱직간, 역락재가 있고 오른쪽으로 도산서당이 있다. 도산서원 배치도를 보면 알겠지만 정문에서 서원의 진도문까지 왼쪽으로는 담장이 있고, 도산서당 또한 담으로 둘러처져 있어 도산서원의 전체적인 공간배치에서 도산서당은 마치 독립된 공간처럼 느껴진다.
도산서당은 모두 3칸으로 되어있는데,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1칸은 퇴계가 거처하던 온돌방인 완락재며, 동쪽 1칸은 마루인 암서헌이다. ‘재’를 서쪽에 두고 ‘헌’을 동쪽에 둔 것은 나무와 꽃을 심은 뜰을 마주하여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도산서당에는 완락재와 암서헌만 있지 않다. 도산서당 아래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몽천이 있고, 앞마당에는 연꽃을 심은 정우당이라는 연못이 있고, 동쪽 언덕엔 매화와 대나무 등을 심어 절개를 지키는 모임이란 의미로 ‘절우사(節友社)’란 이름을 지었다. 이렇듯 도산서당은 외로운 건물이 아닌 자연 차용으로 풍족한 건물이 되었다. 퇴계선생의 마음에도 성현의 말씀뿐 아니라 자연의 기개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겠다.
도산서당에는 퇴계선생이 사랑한 매화가 많다. 그건 매화를 좋아했던 기개와 지조가 있는 선비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관기 두향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러지 않았을까.
퇴계 선생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단양군수 시절 관기 두향과 매화에 얽힌 일화이다. 지조있는 어른인지라 두향은 선생의 마음을 얻지 못해 애간장이 녹아 났다. 선생이 매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조선 천지를 뒤져 고매 한그루를 찾아내어서 선생에게 바친 이후로 선생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선생이 새 임지로 떠난 뒤에는 도산으로 그 매화가 옮겨졌다고 한다. 단양에 홀로 남았던 두향은 선생의 부음을 듣고 앉은 채로 숨을 멈춰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도산서당 왼쪽으론 제자들이 거처하는 농운정사가 있다. 정면으로 4칸 측면으로 2칸 모두 여덟칸으로 지은 공(工)자형 건물이지만 실제로는 가운데 2칸이 없기 때문에, 가운데 4칸과 측면 각 1칸씩 모두 6칸이다. 농운정사는 공(工)자 형태이기 때문에 뒷방에 햇빛이 다다르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퇴계선생이 공(工)자 형태로 지은 것은 공부(工夫)를 위한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농운정사의 대단함은 창문에 있다. 대개의 건물이 같은 크기와 위치에 창문을 내는데 반해 농운정사는 방마다 창문의 위치와 크기가 제각각이다. 위치와 크기를 같게 했다면 통일미도 있고 짓는 것도 더 쉬웠을텐데 이렇게 만든 것은 학문의 길이 제각각 임을 나타낸 것은 아닌가 싶다. 농운정사의 가운데 4칸은 지숙료(止宿嶚 잠자는 공간), 서쪽 1칸은 관란헌(觀瀾軒 물결이 주는 교훈을 공부하라.), 동쪽 1칸에는 시습재(時習齎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 이름을 지었다. 특별히‘지숙료’의 이름은 주자가 손님과 벗을 위해 만든 방이름에서 가져왔다.
도산서원 진도문을 들어서면 병산서원과 마찬가지로 강학당(전교당)과 동재(박약재), 서재(홍의재)가 나온다. 이후 모든 서원의 배치는 병산서원과 비슷하다. 다만 사당인 상덕사 왼쪽으로 전사청이 있고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장판각이 있어 병산서원과 반대다.
전교당과 상덕사는 병산서원과 마찬가지로 상덕사가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어 다른 서원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하인들이 머무는 고직사는 서원 위아래로 두 곳이 있는 것도 다르다.)
도산서원은 워낙 볼 것이 많아 지면관계상 서당을 중심으로 둘러보았다. 도산서원을 찾는다면 조금 느긋하게 꼼꼼히 서원을 둘러보면 좋겠다.
첫 답사지로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보았다.
안동에는 앞서 언급했던 것 봉정사 외에도 안동 시내의 권정생선생님의 생가 그리고 퇴계 이황 묘소 근처 이육사문학관도 있다. 유교와 불교 그리고 ‘우리의 문학’ 모두를 답사하기 좋은 곳이 안동이다.
답사하기 좋은 계절이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역병이 어서 빨리 물러갔으면 싶다.
사랑하는 우리아이들과 들로 산으로 손잡고 마음껏 걷고 싶다.
■참고도서
이종호, 유네스코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Jinhan M&B, 2019
김희곤, 정신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 미술문화, 2019
이상해, 궁궐∙유교건축, 솔, 2004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 창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