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마곡을 찾아 떠난, 어쩔 수 없었던 가족 답사
차창을 열고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답사의 냄새를 맡으며 시골길을 달렸다. 아직은 이른 4월이라 아침의 찬 공기가 어깨를 움츠리게 했지만, 창문을 올릴 수가 없었다. 길이 막힐까 싶어 일찍 나섰는데도 길이 막혔다. 코로나19로 모든 게 뒤바뀐 일상이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징조는 아닐까, 하고 섣부른 기대를 하며 막힌 길조차 짜증도 나오지 않았다. 뒷자리에 앉은 작은 아이의 투덜거림조차 사랑스러운, 그런 아침이었다. 그랬다. 며칠째 확진자 소식이 거의 없었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때, 봄을 마중하러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시락과 사진기를 챙겨 조심스럽게 다녀오자고 가족과 함께 모처럼 만의 답사를 나섰던 4월의 어느 날.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그 봄날 답사에 대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다시 확 늘어난 돌림병 소식에 날마다 암담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사실 코로나19로 세계 모두의 일상이 달라졌고, 모두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만. 내가 느끼는 상실감은 누구보다도 유독 크다고 말하고 싶다.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대부분의 주말을 아이들과 산으로, 들로 그리고 박물관을 누비고 다녀왔다. 하지만, 이젠 내 한 몸도 조심조심 움직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연구회 선생님들도 만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퇴근 후의 삶과 주말은 어쩔 수(?) 없이 ‘가족과 함께’로 바뀌었다. 올해 첫 답사도 어쩔 수 없이 가족과 함께 시작했다. 너무나 집콕만 하고 있는 아이들 바람도 쐬어줄 겸,
마곡사. 올해 첫 답사지는 이곳으로 정했다. 봄과 딱 어울리는 산사. 예로부터 공주의 ‘춘마곡추갑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봄날의 마곡사는 그 아름다움이 자자한 곳 아니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수덕사도 함께 둘러보기에 좋은 곳이다. 201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전부터 꽤 이름난 절이라 그런지 주차장부터 남달랐다. 몇백대의 차는 너끈히 주차할 만 공간에 식당들도 많이 있었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이십여 분 올라가는 길 좌우로도 식당과 커피숍이 있어 산사의 고즈넉함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일주문을 지나서는 숲길도 보이고, 봄꽃, 물 흘러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 봄 정취가 물씬 나는 그런 길을 걸을 수 있다. 봄 마중하러 오기 딱 맞춤인 사찰이다.
마곡사에는 이름난 절만큼이나 보물과 눈여겨볼 곳들이 많은데,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비롯한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解脫門) 등의 전각들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곡사 일주문 앞 현판에 쓰여있는 창건 이야기는 곧이곧대로 믿기가 어렵다. 우리나라 사찰의 경우 천년고찰의 자부심을 내비치고 싶은 사찰들이 많아 역사를 한참 올려잡기도 하는데, 마곡사도 역시나 조금(?) 올려놓았다.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640년(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 (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러 ‘영산전(靈山殿)’이란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자장율사는 신라의 고승으로 선덕여왕 12년(643년)에 귀국하여 분황사와 황룡사 등 신라 영토에서 몇 개의 사찰을 창건한 이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승려인 자장율사가 백제 땅에 와서 마곡사를 창건하였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다. 마곡사의 중창과 관련된 고려 때 기록을 보면 통일신라 시대 보조체징이 창건하지 않았을까 싶다. 천년고찰로 만들려는 후대 스님들의 노력(?) 결과가 억지스럽다고 할 수밖에.
마곡사는 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영산전, 명부전 등의 전각들이 있다. 마곡사가 개울을 중심으로 윗마당과 아랫마당으로 나뉘는데, 개울 아래쪽으로도 전각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마곡사는 개울을 건너는 맛도 있고, 덤으로 두 곳을 답사하는 즐거움도 있다.
답사의 시작은 대광보전 앞마당부터 시작해보자.
낯선 모양의 탑이 하나 보인다. 고려 후기의 석탑으로 보물799호인 ‘마곡사오층석탑’이다. 보물인데도 보면 볼수록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층과 층 사이의 간격이 비례에 맞게 작아져서 안정감을 줘야 하는데, 마곡사오층석탑은 체감률이 낮아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예뻐 보이지 않고 불편한 거다. 아무래도 고려말이라 국운이 기울어지는 때 만들어진 탓이지 않을까 싶다.
‘마곡사오층석탑’이 낯설어 보이는 다른 이유도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가 돌로 만들어졌는데, 반해 상륜부는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그 모양도 기이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모양의 상륜부는 전통적인 우리나라 탑 모양이 아니다. 고려말 원나라 티베트불교의 영향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낯설기만 할 뿐 신비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 (또 다른 티베트불교 양식 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있는데 그에 비하면 아쉬운 자태다.)
낯설고 불편한‘마곡사오층석탑’ 뒤로 대광보전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하나하나 자세히 볼만하다. 대광보전 현판은 김홍도의 스승으로 시문서화 사절로 꼽힌 강세황의 글씨다. 굵은 붓에 먹물을 한껏 묻혀 강약을 조절하며 글씨를 썼다. 겨울의 추위를 이겨낸 봄 새싹의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곡사 대광보전은 보물 제802호로 건물 자체가 오래되었고 또 아름답다. 그런데 일반적인 전각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비로자나불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 이런 예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이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면 대중들이 길게 앉을 수 있어 설법하는데 많은 인원이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비로자나불의 조성 시기와 관련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육계의 표현이 조선 후기 양식과 비슷해 시기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약간 긴 듯한 얼굴과 풍만한 두 볼 그리고 그림보다도 더 곱게 표현한 양손과 옷자락을 볼 때 고려 시대 불상이라는 주장에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대광보전 전각 안을 둘러보면 오방색의 조화 속에서 갖가지 문양들이 그려져 있다. 어떤 문양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꽃무늬와 용무늬이다. 연꽃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더럽지 않고 맑고 미묘한 향기를 간직하고 있어 깨끗함과 고결, 깨달음을 상징한다. 연꽃을 보면 삶이라는 고해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맑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대웅보전 들보에도 용무늬가 있고, 사찰 곳곳에서 용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건 용이 부처님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호법신 때문이기도 한데, 특히 전각의 앞뒤로 조각된(앞에는 용머리, 뒤에는 꼬리) 용은 극락세계로 중생들이 타고 가는 상상의 배, 반야용선을 상징한다. 대광보전에 처마 아래 용 조각을 보다 보면 색이 바래서인지 연륜이 더 느껴지는데, 그러다 보니 정말 나를 극락세계로 인도할 것만 같다.
대광보전을 나와 오른쪽 돌아서 올라가면 대웅보전이 보인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801호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앞서 마곡사만의 특징으로 개울을 중심으로 사찰의 영역이 나뉘는 것을 언급했는데, 그와 더불어 마곡사는 중요한 불전 두 곳이 일직선상에서 앞뒤로 있다는 독특함이 있다. 왜 대광보전 뒤에 대웅보전이 있을까? 사적기에 보면 마곡사에 경전 보관을 위한 대장전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의 대웅보전이지 않을까 싶다.
대웅보전의 위치상 상징적으로는 사찰의 가장 위쪽에 대장전을 마련함으로써 부처님의 말씀을 높이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기능적으론 개울에서 올라오는 습기로부터 경전을 보호하고 원활한 통풍을 위한 이유에서 그랬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대장전을 대웅보전이라 불렀을까? 1782년 마곡사에 대화재가 발생해 대광보전과 더불어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그때 대웅보전은 피해를 보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이때 사찰의 중앙에 있던 대장전이 주불전 역할을 하면서 대웅보전으로 불린 것으로 생각된다.
대웅보전은 중층으로 만들어졌는데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이뤄진 통층형 구조다.(마치 경복궁 근정전과 같다) 그래서 천정이 아주 높다. 그런데 건물의 크기에 비해 대웅보전 안에 있는 삼세불의(아미타불-석가모니불-약사불) 크기가 작아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대웅보전의 높이가 1,213cm인데 석가모니불의 크기가 190cm다. 건물 높이와 비교해 너무 작다. 다른 사찰에 있는 중층건물과 비교해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법주사 대웅보전은 1,378cm인데 그 안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은 509cm이고, 무량사 극락전은 1,528cm이고 아미타불은 520cm다. 마곡사 석가모니불은 작아도 너무 작다. 뭔가 이상하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대웅보전이 원래 대장전이었음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1831년 대웅보전중창기에 보면 ‘이층하대중수(二層下臺重修)’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대웅보전은 상하층이 별개의 공간으로 쓰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층에는 대장전을 보관하고 일 층에는 삼세불을 놓았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다른 사찰에 비해 석가모니부처님의 크기도 현저히 작은 것이 아닐까.
이제 대웅보전까지 보았으니 극락교를 다시 건너와 개울 아래쪽을 답사해보자. 눈여겨볼 만한 건물은 명부전과 영산전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6호로 등재되어있는 명부전(冥府殿)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과 관련된 곳으로 보통 지장보살과 시왕(十王)이 계신다.
마곡사 명부전의 지장보살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하고,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이 함께 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제1 진광대왕부터 제7 태산대왕까지 일주일씩 49일 동안 심판을 받고 제8 대왕은 100일, 제9 도시대왕은 1년, 제10 오도전륜대왕이 3년째 심판을 한다. 지금 우리가 장례 후에 드리는 49제는 불교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명부전에 가보면 지옥에 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된다.
이제 마곡사의 마지막 답사로 보물 제800호인 영산전으로 가보자. 영산전은 마곡사 제일 아래 왼쪽 구석에 있다. 보통 영산전은 문수전, 팔상전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고,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나 팔상도가 있다. 그런데 이곳은 영산전이 아닌 듯싶다. 왜냐하면 영산회(靈山會)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것으로 나한들이 영산전 안에 모셔져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는 과거칠불과 천불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곳은 영산전이 아닌 천불전이라 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영산전(그래도 마곡사가 영산전이라 하니 영산전이라 하자.)에서는 과거칠불을 자세히 보면 좋다. 목불로 불상의 크기와 얼굴 모양은 똑같지만 옷 모양과 수인은 살짝씩 다르다. 그래서 옆의 불상과 비교하며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찾으며 본다면 그 재미가 더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아이와 같이 답사 갔을 때는 꼭 비슷한 점과 다른 점 찾기 놀이를 하면 좋다.
지금까지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 명부전, 영산전을 중심으로 마곡사 답사를 했다. 마곡사에는 이외에도 숨겨진 보물로 명필들의 글씨가 있다. 강세황의 ‘대광보전’ 현판 외에도, 근대 화가인 해강김규진의 심검당 바로 옆의 ‘마곡사’ 초서도 있다. 그리고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는‘대웅보전’과 ‘영산전’ 글씨도 볼만하다. 마곡사는 현판 글씨만 보아도 마음이 시원시원해지고 봄을 만끽할 수 있다. (물론 여름에도 시원한 계곡물이 반겨주기 때문에 마곡사 답사는 꼭 하시길 권한다.)
다행인 건지 우리 문화재를 사람들이 많이 찾지는 않아 안전하게 답사를 다녀올 수 있었다. 오랜 집콕으로 게으름이 붙어있던 아이들도 마곡사 개울의 징검다리를 신나게 건너다니며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나이 들수록 꽃이 좋아진다며 봄꽃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는 아내도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물론 거리두기를 위해 지역의 맛 난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보단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고, 예쁜 카페에 가기보단 나무 그늘에서 캠핑용 의자에 앉아 쉬어야 한다는 조금 불편함이 있기는 했지만, 나 역시 오랜만의 답사가 참 좋았다.
코로나 19로 침체한 경제의 내수 활성화를 위해 정부에선 여행주간도 늘리고 야외활동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실내는 위험하지만, 거리두기를 지켜 실외를 찾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코로나19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간 듯싶지만 그래도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도 있다. 그동안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가족과 함께’로 바꾸고, 박물관에서 편안하게 보던 우리 문화재가 아닌, 실외에서 우리 문화재를 찾아본다면 어려운 이 시기를 조금은 지혜롭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2020년 봄은, 또 여름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시간으로 기억될까?
■참고도서
목경찬, 사찰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조계종 출판사, 2007
최완수, 명찰순례2, 대원사, 1994
허균,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돌베개, 2000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산사순례), 창비, 2018
- 논문 -
박효원,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11
홍윤식, 고려후기 석탑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