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흥사, 땅끝전망대, 윤두서 ‘자화상’ -
해남은 정말 땅 끝에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라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탓에 고속도로가 막혀서이기도 하지만 수원에서 해남까지 가는 길은 정말 멀었고 그래서 오후 늦게야 간신히 도착했다. 떠나올 때는 천둥 번개에 엄청나게 많은 폭우가 쏟아졌지만, 해남은 하늘이 파랗고 여름의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알고 보면 우리나라가 넓다는 실없는 소리가 그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해남까지 가면 절로 느끼게 된다.
해남은 우리나라 땅끝으로 알려져 대표적으로‘땅끝마을전망대’가 있는 곳. 그래서인지 조선 시대에는 서울과 멀어 김정희와 정약용이 유배를 오기도 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두륜산이 있어 대흥사와 미황사 같은 고찰이 있기도 하고,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어서 남인의 영수 윤선도의 집안이 대대로 터를 잡아 살기도 했다. 이외에도 해남에는 우수영 관광지, 도솔암, 달마고도,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 고천암 생태공원 등이 있어 꼭 한번 가볼 만한 곳이지만, 하루에 모든 곳을 답사할 수는 없고 이 중에서 보고 싶은 곳 서너 곳을 보면 좋을 듯싶다.
첫 번째로 답사할 곳은 대흥사다. 대흥사 답사의 가장 큰 즐거움은 사찰까지 올라가는 길이다.
아주 오랫동안 대흥사를 찾는 이를 반겼을 법한 키 큰 나무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큰 그늘을 만들며 반겨준다. 오후 4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무 그늘 속에 들어오니 흡사 저녁 예닐곱 시는 된 듯했다. 길옆으론 계곡이 너무 좋아서인지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는데 보통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조용한 산사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겐 그 소란스러움과 북적거림이 불편을 주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한여름의 더위를 씻기라고 주신 선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대흥사에 오른다면 계곡에 발 한번 담그고 속세에서의 번뇌와 잘못을 씻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대흥사는 통일신라 시대 보물 320호 응진단 앞 삼층석탑(보물 320호)과 삼십 여분산을 올라가면 볼 수 있는 고려 시대 마애불(국보 308호)을 근거로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찰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그 창건을 높이는 데 반해 대흥사 홈페이지를 보면 유물을 근거로 뻥튀기하지 않고 정확하게 자신들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미 조선 후기 대흥사와 연을 맺었던 정약용의 친우였던 초의선사가 이미 밝혔던 연유인 듯하다.
지난번 마곡사 답사에서도 개울을 중심으로 공간이 두 곳으로 나뉘었는데, 대흥사 역시 금당천(개울)을 중심으로 북원과 남원으로 나누는 독특한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대흥사를 골짜기에 짓다 보니 남원이 북원보다 아래쪽에 있어 자칫 처음 오는 이는 동서남북을 헷갈릴 수도 있다. (부처님도 임금처럼 남쪽을 향해 자리를 잡게 되는데, 천불전의 부처님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더 헷갈린다.) 대흥사 북원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응징당, 산신각이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과 조사당과 표충사가 등이 있다. 안타깝게도 북원 영역은 대웅전 영역이 복원공사 중이어서 볼 수가 없어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성보박물관도 코로나19 여파로 닫혀 있었다.) 이렇듯 답사라는 것은 가는 이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허락한 것만을 볼 수 있다는 맛이 있다. 혹여나 올해 대흥사를 답사 간다면 북원과 성보박물관에 있는 보물 1667호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 보물 88호 탑산사동종, 보물 320호 응진당 앞 삼층석탑, 보물 1547호 금동관음보살좌상, 보물 1552호 영산회괘불탱을 못 보는 아쉬움은 내려놓도록 하자.
그렇다면 대흥사에서 또 무얼 보면 좋을까?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남원영역에서 천불전과 표충사 구역을 보면 좋다. 천불전은 보물 1807호로 181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3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천불전으로 들어서기에 앞서 편액의 글씨를 감상해보자. 18세기 (옥동 이서가 정립한)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로 삐뚤빼뚤한 것이 못 쓴 것 같기도 하지만 획에 따라 굵기를 가늘게도 하고 두껍게도 하면서 강약의 조절을 통해 다른 듯하면서도 일정하게 쓰며 자유분방하면서도 운동감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원교의 글씨는 대웅보전에도 걸려있는데, ‘획이 바싹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갔지만,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진다.’라고 유홍준은 말하고 있다. 천불전의 글씨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천불전에는 또 한 명의 천재 글씨가 있다. 바로 천불전에 들어서는 가허루의 편액이다. 우선 가허루는 다른 사찰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름이다. 루는 2층 건물에 쓰는데, 가허루는 멍에 가(駕)에 빌 허(虛)와 누각 누(樓)를 쓰면서도 단층 건물이다. 2층이 없는 대신에 문지방을 땅 쪽으로 살짝 휘어진 나무를 사용해 드나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2층이라 살짝 우격다짐(?)했다. 이 가허루의 현판을 창암 이삼만이 썼다. 창암 이삼만은 원교의 동국진체를 홀로 공부하여 그 진의를 깨닫고 자신만의 서체를 창안했다고 한다. ‘천불전’의 글씨와는 다른 단정한 글씨를 하고 있다.
천불전 답사를 했으면 이제 아래로 내려와 돌담을 끼고 돌아 표충사(表忠祠) 일대를 돌아보자.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나라를 위한 충성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1660년에 세운 사당으로 정조 13년(1789년)에 사액을 내리고 제문을 보냈다. 사찰 안에 유교의 사당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곳에서는 매년 제례와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표충사에는 서산대사를 가운데 모시고 좌로는 사명당, 우로는 처영의 화상이 배향되어 있다. 대흥사에 정조대왕의 사액이 내려지면서 면세 혜택과 제수(祭羞) 공급을 받을 수 있었고 인근 유생들의 공격 또한 받지 않게 되었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있는데, 서유린이 정조 15년에 쓴 「표충사기적비」와 연담스님이 정조 16년에 쓴 「건가사적비」가 있다. 「건가사적비」에는 손가락 굵기 정도의 구멍들이 있는데 6·25 때 총알 자국인 듯하다.
표충사까지 보았으면 천천히 걸으며 일주문 쪽으로 내려와 보자. 왼쪽으로 부도전(浮屠殿)이 보이는데 임진왜란 이후 대흥사를 발전시키고 그 이름을 크게 빛낸 스님들의 승탑이 있다. 승탑 대신 부도라고도 하는데, 부도는 붓다(Buddha)를 음역한 것이니 부처님의 사리 모신 곳을 탑이라 한다면 스님의 사리를 모셨으니 승탑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부도전 안에는 50여 기의 승탑과 14기의 승탑 비가 있다.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연담, 초의 선사 등의 승탑이 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가서 볼 수는 없다. 승탑이 고승들의 사리를 안치한 것이니 승탑이 50여 기나 된다는 건 그만큼 대흥사에 훌륭한 스님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대흥사 답사는 북원 영역을 못 본 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는 답사였다. 하지만 대흥사를 오가며 느낀 풀 냄새와 계곡 물소리 그리고 수풀의 우거짐은 충분히 답사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답할 곳은 해남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 ‘땅끝전망대’. 대흥사에 나오면 자가용으로 40여 분이면 다다를 수 있다. 땅끝마을 사자봉 위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더운 여름날 해 질 녘이면 바다 안개가 간간이 피어올라 작은 섬들을 살짝 감추고 바다는 붉은색을 띤다. 땅끝전망대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일출과 일몰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곳이라 하니 이른 아침에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땅끝전망대 주변으로는 송호해수욕장을 비롯하여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이 있고, 중리 신비의 바닷길과 해안누리길도 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해안누리길을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그 기분 참 좋았다.
해남은 수도권에서 워낙 먼 곳이라 하루 만에 다녀올 수는 없다. 그래서 하룻밤 묵을 곳이 필요한데, 무선동 한옥마을을 비롯하여 황계동전원한옥마을 등 숙박할 수 있는 한옥이 곳곳에 있다. 해남에 들린다면 한옥마을에서 하룻밤 묵을 것을 권한다. 방음이 되지 않는 창호지 문 때문에 옆방에 코라도 고는 이가 있다면 영락없이 그날 밤은 잠을 설칠 것이 분명하지만 방 앞에 나오자마자 걸터앉을 수 있는 쪽마루는 편안함을 더해주고 마루에서 바라보는 별은 그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불편이야 하겠지만, 해남이 자랑하는 한옥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러 보면 어떨까?
해남 마지막 답사지는 ‘윤선도유적지’다. 해남에서 볼 수 있는 다른 많은 답사지 중에서 ‘윤선도유적지’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국보 240호 ‘윤두서자화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윤선도유적지’에는 윤선도가 살았던 녹우당을 비롯하여 윤선도의 고산 사당, 천연기념물 241호인 비자나무 숲이 있기도 하지만 옛그림 읽기를 하는 나로서는 해남 답사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윤두서자화상’이다.
공재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으로 숙종 대에 해남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 풍속화 하면 김홍도를 떠올리겠지만, 풍속화를 연 이가 바로 윤두서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관직에 나아가려 했으나 숙종 때라는 시기적 한계 속에서 불우한 30대와 40대를 보낸다. 진사가 된 이듬해에 양아버지가 와병하여 죽고 얼마 안 되어 친아버지 쪽에서 나온 친동기가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갔다. 이듬해에 친아버지가 죽고, 2년 후에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절친한 친구인 옥동 이서의 형인 이잠이 곤장을 맞아 죽었다. 또 몇 해 후엔 절친한 친구인 심득경이 죽고 그다음 해엔 양어머니가 돌아가신다. 20년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윤두서와 관련된 이들이 죽는다. 결국, 윤두서는 45세에 한양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 3년을 살다 48세에 죽는다. ‘윤선도유적지’를 가보면 알겠지만, 윤두서의 집안은 조선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이다. 시대를 잘 못 만나 정계에 나아가지 못했지 시대만 받쳐줬다면 재상을 하고도 남았을 부와 지식이 있었다.
이제 윤두서가 해남으로 다시 내려오던 해인 45세에 그린 ‘자화상’을 보도록 하자.
‘자화상’을 보는 이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종이에 엷은 채색으로 이마는 반쯤 잘리고 정면상에 얼굴만 그려진 모습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을 것이고, 박진감과 진실성이 담긴 ‘자화상’ 앞에서 흩뜨려진 자신의 모습을 바로잡게 된다. ‘자화상’에는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귀와 목 아래로의 상체인데, 상체는 1937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사료집진속」에 실린 사진을 보면 흰 빛깔의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으로 상체 부분까지 다 그렸다. 그런데 20세기 화면의 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옅게 그려졌던 상체 부분이 지워졌다. 그리고 귀는 공재 스스로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자화상’을 내면적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면 귀는 불필요하다. 귀를 생략함으로써 우리는 윤두서의 얼굴과 눈에 더 집중하게 되고 윤두서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것을 훨씬 호소력 있게 들을 수 있다.(윤두서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조선 시대 대부분 초상화는 왼쪽 얼굴의 7∙8분 면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정면의 얼굴을 그리게 되면 코 부분의 부피나 입체감을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재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눈꺼풀의 그림자와 눈 둘레에 불그스레한 채색을 해서 눈을 들어가도록 했으며, 볼과 코 사이에 그림자를 넣어 코를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자화상’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은 바로 수염이다. 유심히 살펴보면 얼굴 윤곽을 먼저 그리고 턱 밑의 긴 수염과 얼굴 옆의 구레나룻을 붓으로 세세하게 그렸다. 그런데 37.3cm라는 그리 크지 않은 그림이지만, 아주 얇은 붓으로 20cm 정도의 수염을 그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주 가느다랗고 탄성이 붓이어야만 중간에 끊지 않고 내려그을 수 있다. 이런 붓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는 무엇일까? 붓의 종류에 따라 토끼·양·너구리·이리·사슴·새의 깃·족제비·고양이·말·노루·담비 등의 털을 쓴다고 하는데 여기엔 정답이 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동물이고 털도 아니다. 정답은 바로 쥐 수염이다. 쥐 수염만이 가느다라면서도 끝까지 탄성을 잃지 않고 내려그을 수 있다고 한다. 동물들의 털을 한 올 한 올 그릴 때 쥐 수염 붓을 이용했다고 하니, 윤두서가 자신의 수염을 얼마나 정성을 들여 그렸는지 알 수 있다.
윤두서는 자화상을 왜 그렸을까?
털끝 하나하나 그대로를 묘사했던 윤두서에게서 스스로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45살이라는 한창나이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한양에서 고향으로의 낙향했으니 선비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과 고뇌가 있었을 듯하다. 그리고 그 대답을 ‘자화상’으로 나타내지 않았을까? ‘자화상’의 눈을 보면 결코 좌절하고 낙심한 눈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주변의 작은 이들을 사랑했으며, 이 세상을 직시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그런 기상이 서려 있는 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낙향한 후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보내고 겨울에 감기를 앓다 그 이듬해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인명은 재천이라. 윤두서의 그런 기상도 자기 죽음은 어찌하지 못했다.
해남 답사의 마지막을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는 것으로 했다. 해남으로 홀로 내려가면서 혼자만의 고독한 낭만을 꿈꿨다. 그동안 대부분의 답사가 연구회 동료이거나 가족과 함께였다. 그리고 혼자 가게 되더라도 하루라는 짧은 시간으로 움직였다. 같이 다니다 보니 외로울 틈도 없었고 웃음과 즐거움이 있었고, 가끔의 투정이나 불평 소리도 이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사람 인(人)자가 둘이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라는데, 함께 다니는 이들이 있으니 그걸로 족했던 답사였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내 호흡으로 문화재를 들여다보고 머물기보다는 같이 갔던 이들의 속도에 맞춰 나 자신을 움직였던 것도 사실이다.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나에게 누군가 기대였을 때 쓰러지지 않을 내 힘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인지 자꾸만 쓰러져서 허우적거리는 내가 보였다. 혼자 서 있기위해, 잠시나마 고독하여지고자 그렇게 홀로 해남으로 떠났었다.
그런데 역시 고독함은 없고 외로움만 가득했다. 한밤중 깜깜한 해남 산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그랬고, 한옥 민박에서 홀로 별을 올려다보며 그랬다. 내 옆에 누군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외로울 줄이야. 어서 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당장 집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일어나 미황사에 오르고,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서 마음이 진정되었다.
내가 무얼 찾고 있는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외로움에 사무친 하룻밤이 지나고 나니 조금은 ‘고독’에 가까워졌다. 해보지 않고 되는 것은 없다. ‘나’를 찾고 싶다면 해남으로 ‘나 홀로 답사’를 떠나보길 권한다. 외로운 가운데 고독이 다가올 것이고 홀로 설 수 있는 ‘나’를 볼 것이다. 윤두서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시인이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나’를 본 것처럼, 그리고 그런 고독을 노래한 것처럼 말이다.
■참고도서
목정배 외, 대흥사(대둔사), 대원사, 1994
최완수, 명찰순례2, 대원사, 1994
유홍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산사순례), 창비, 2018
유홍준, 화인열전1, 역사비평사, 2001
이내옥, 공재 윤두서, 시공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