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사람처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한여름이라도 만나야한다고 생각했다
- 김륭, 〈애인에게 줬다가 뺐은 시〉 부분 -
김륭의 시를 읽는 순간,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다. 매화와 조희룡, 그것을 보러 가자던 약속. 코로나로 매화꽃 피는 시절을 한번 지나치고, 다시 내년 봄을 기다려야 되나 싶었지만 사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조희룡과 조희룡을 보러 가자던 사람들이었지 않은가. 가을에라도 길을 나서기로 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신안군 임자도까지,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닌 터라 금요일 오후 조퇴 찬스를 쓰고 ‘옛그림연구소’ 연구회 선생님들과 드디어 답사를 떠났다.(아, 얼마만의 답사인가!)
조퇴하고 낮에 나섰는데도 수원에서 임자도까지의 거리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밤 9시가 되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빛이 아니면 어는 것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저 멀리 가로등에 의지하여 잔잔한 서해를 보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도대체 조희룡이 누구길래, 이렇게 머나먼 곳에서 그를 만나야 하는 것일까.
조희룡은 누구?
전남 신안군 임자도. 임자도는 조희룡이 유배로 3년여 머물렀던 섬이다. 그런 인연으로 ‘우봉 조희룡 미술관’이 임자도에 21년 3월에 개관하였다. 조희룡이 누구이기에 서울에서 이렇게 먼 임자도까지 유배를 왔고, 유배지에 그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생겼을까.
조희룡은 1789년에 태어나 1866년에 죽었는데, 중인이라고 하거나, 명문가였으나 몰락한 양반 집안이었다 하는 등 신분은 확실치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조희룡이 자라면서 어울렸던 이들이 강세황의 서증손인 강진과 자하 신위의 서자였던 신명연 등이었기에 출신과 상관없이 여항인으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조희룡은 한양에서 나고 자랐다고는 하는데, 정확한 어린 시절을 알지 못한다. 다만 1861년 유숙이 그린 여항인들의 시사(詩社)모임 그림인 <벽오사소집도>를 통해 조희룡의 인간관계를 조금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이 그림에 관한 내용은 모임에 참석했던 이기복이 기록한 《벽오사소집도병서》에 나와 있다. 그림을 보면 두루마리를 펼치고 그림(난초)을 그리려는 조희룡을 가운데에 두고 유최진의 아들 유학영만 서 있고, 모두 둘러 앉아있다. 재미있는 것은 인물들이 모두 중국 사람처럼 표현되어 있다. 진경문화가 발전한 조선 후기여서 유숙이라면 조선인의 모습으로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중국 옛이야기 속 느낌을 살리려고 그런 것인지 중국 사람들 모습이다. 그래서 차 끓이는 동자도 등장하였다. 이 그림은 1869년에 유최진이 당시의 시화를 모아 《오노회첩》에 실었는데, 모임에 참석한 유최진, 이기복, 김익용, 이팔원은 모두 중인으로 청량리에 모여 살았었기에 조희룡도 청량리 인근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김정희와 조희룡 그리고 유배
조희룡은 김정희와도 인연이 있었다. 세 살 연상의 김정희(1786~1856년)에게 서화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한데, 어릴 적부터 김정희에게 제자로서 서화를 배웠다기보다는 나이가 들어 김정희를 만났던 듯싶다. 함께 그림 감상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김정희가 조희룡에게 설명하기도 하고 난 치는 법 등을 가르쳤으리라 추측한다. 이러한 추측은 《예림갑을록》에 기록된 김정희와 조희룡의 품평을 통해 생각할 수 있다. 조희룡도 함께 작품을 품평하는데, 김정희와는 사뭇 다른 품평을 하는 대목이 있다. 김정희의 문하에서 벗어나 조희룡만의 독자적 예술관과 여항인들 사이에서의 존경과 권위를 생각할 수 있다.
김정희는 김수철의 ‘매우행인도(梅雨行人圖)’를 보고 “구도가 능숙하고 붓놀림도 막힌 데가 없다. 그런데 색칠한 것이 세밀하지 못하고, 우산 쓴 사람을 그린 것은 어딘지 그림쟁이 수법처럼 되었다.” 품평했지만, 조희룡은 “산을 그리기를 실제의 산처럼 하니, 실제의 산이 그림 속 산과 같네. 사람들 모두 실제의 산을 사랑하지만, 나는 홀로 그린 산에 들어간다오.”라고 하였다.
김정희를 따랐던 조희룡은 1851년 김정희와 함께 유배 가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849년 6월 시작된‘신해예송’에서 김정희와 권돈인(당시 영의정)은 정전에서 그대로 제사 드릴 것을 주장하였고, 안동김씨 세력은 영녕전으로 위패를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이 싸움의 결과 김정희는 철종 2년인 1851년 북청으로 다시 유배 가게 되는데, 이때 조희룡도 김정희의 복심(腹心)으로 임자도 유배 가게 된다.
"김정희의 일은 매우 애석하다마는 그가 만약 처신(處身)을 근신(謹愼)하였다면 어찌 찾아낼 만한 형적이 있었겠는가? 평소 개전(改悛)하지 않은 습성을 미루어 알 수 있으니, 북청부(北靑府)에 원찬(遠竄)하고, 김명희·김상희는 향리로 추방하라. 오규일과 조희룡 두 사람은 두 집안의 수족(手足)과 복심(腹心)이 되었다는 말을 내가 많이 들었으니, 아울러 한 차례 엄형하여 절도(絶島)에 정백하라. 조희룡의 아들은 거론할 것이 없다."
하였다.
철종실록 3권, 철종 2년 7월 22일 1851년 청 함풍(咸豊) 1년
이 당시 조희룡의 벼슬이라야 너무 한미해서 눈을 씻고 찾아야 간신히 찾아낼 정도였는데, 조선왕조실록 철종 2년 7월 21일의 기록을 보면 ‘빚어낼 근심이 거의 수풀에 숨은 도둑과 같아 장래의 화(禍)가 반드시 요원(燎原)을 이룰 것이니 어찌 미천한 기슬(蟣虱)의 유(類)라 하여 미세한 때에 방지하여 조짐을 막는 도리를 소홀히 하겠습니까?’라고 하며 조희룡을 물고 늘어진다. 조희룡이 여항문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물고 늘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조희룡은 저 멀리 임자도까지 유배를 온다. 흑산도로 유배 온 정약전의 삶을 그린 《자산어보》라는 영화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것 같다. 조희룡에게 임자도도 막막한 어둠 자체였을 것 같다. 조희룡은 유배지에 있는 자신의 집을‘매일같이 서울을 바라보는 집’이란 뜻의‘일망오운암(日望五雲庵)’이라 짓고 서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냥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조희룡은 임자도에서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마음을 정리하게 되자, 청탁하는 그림도 그리고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기도 하고 제자 둘을 가르치며 섬에서의 생활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현재, 조희룡 유배지에 가면 임자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일망오운암’을 복원해놓았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닐지 몰라도, 자그마한 ‘일망오운암’의 툇마루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임자도 바다를 내려다보는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지금은 간척해서 바다가 저 멀리 보이지만, 아마 조희룡이 보았을 그 바다는 망망대해였을 것이다. 조희룡의 마음을 느끼며 잠시 바다를 바라보는 여유를 갖는 것은 어떨까.
조희룡 작품 감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먼저 예습을!
비록 억울하게 시작된 임자도에서의 유배 생활이었지만 고통 속에서 예술은 피어난다는 말처럼 조희룡에게도 유배는 오히려 그의 예술적 성취 정도를 더 높이며 성숙해지는 계기가 된다. 조희룡이 좋아하던 매화에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접목한 〈용매화〉를 발전시키고, 섬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괴석도〉와 〈묵죽도〉, 〈황산냉운도〉와 같은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더불어 제자들과 조희룡 본인의 시 원고를 정리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저술 활동이 이때 이뤄지니 말이다.
‘우봉 조희룡 미술관’을 둘러보기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작품을 먼저 보고 가면 좋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희룡의 작품으로 <묵매도>, <묵란도>, <홍매도>, <사군자도>, <매화서옥도>, <군접도> 등이 있다. 전부 임자도에서 그린 작품은 아니지만, 조희룡 작품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꼭 보았으면 하는 첫 번째 작품은 <묵매도>다. 조희룡 하면 화려한 색감의 <매화도>를 당연하게 떠올리게 되는데, <묵매도>는 종이에 수묵으로 그렸으면서도 매화의 겸손한(?) 화려함이 느껴진다. 왼쪽 아래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크고 작은 가지가 둥글게 돌아 처음 줄기와 마주하며 끝나는 것이 안정적이면서도 새롭다. 끝내 줄기와 맞닿지 않은 것에서 답답함을 덜어주고 있고 과감하게 생략된 상단의 가지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그림의 재미를 더해준다.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이 심하게 꺾여 뾰족뾰족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옅은 묵으로 동글동글하게 그린 매화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몽글몽글 올라와 기분이 좋아진다. 또한 반대로 줄기 위의 짙은 묵의 점들은 작가가 맘대로 콕콕 찍어놓은 듯하다.
두 번째 보았으면 하는 것은 <군접도>다. 나비는 암컷과 수컷을 같이 그려 부부 금술을 상징하기도 하고 병풍이나 가구 등을 장식하는 데 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즐거움과 행운 그리고 장수를 상징한다. 나비 그림은 19세기 중엽에 대체로 유행했는데, 조선 회화사에서 나비 그림 하면 ‘남나비’란 별명을 가진 남계우를 꼽지만, 한 세대 위였던 조희룡도 못지않게 나비 그림을 잘 그린 것으로 유명했다.
남계우와 조희룡의 나비 그림을 비교해보면 조희룡만의 아름다움을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남계우의 <꽃과 나비>는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떨어지는 동적인 느낌을 살리면서 나비를 화려하고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반면에 조희룡의 <군접도>는 닥종이에 그렸는데, 닥종이 껍질의 문양과 조화를 이루며 다른 소재 없이 오롯이 날아다니는 나비만 그렸다. 나비처럼 보이는 것은 대략 열 마리 정도 되어 보이는데, 바탕의 금박과 함께 위아래로 날아다니는 모습이 화려하면서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또한 정확하게 나비 모양을 한 것은 열 마리 정도이고 그 주변을 다양한 크기와 색의 점들로 찍어놓았는데, 꽃잎이 흩날리는 듯싶으면서도 나비이지 않을까 생각도 들게 한다. <군접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꿈속에 있는 듯 몽환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개인적으로 남계우보다 <군접도>가 더 마음에 든다.
그림의 반이나 차지하는 화제에는 나비 그림으로 유명한 당태종의 막내아우 ‘이원영’ 이야기와 명나라 11대 황제 가정제 대에 유명했던 ‘영험한 나비’ 이야기가 적혀 있다. 화제를 통해 나비 그림에 대한 조희룡의 소신과 나비의 장수 상징을 알 수 있다.
조희룡의 작품 중 이것만은 꼭 보았으면 싶은 건 바로 ‘매화서옥도’다. 초봄의 쌀쌀함이 느껴지는 어느 날 매화꽃이 가지마다 눈꽃처럼 피었다. 사실 눈꽃 송이처럼 매화를 그려서 매화인지 눈꽃인지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 매화나무 사이로 동그란 매감(梅龕)이 한 채 있는데, 안으로는 사람이 홀로 앉아 매화 꼭 구경하며 차 한잔하는 모습이다. 매감 위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데, 매화를 즐길 줄 아는 고상한 선비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옅은 푸른색으로 색칠한 산의 형태만 있는 큰 산이 그림 아래쪽의 화려함과 대조를 이루며 그림의 중심을 잡아준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매화 가득한 곳에 초옥 하나를 짓고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책을 읽는다면 과연 어떤 마음일까 상상해 보게 된다. 보고 즐길 것이 많은 요즘도 매화와 벚꽃 구경 다니며 사진을 찍고 행복해하는데, 그 당시 활짝 핀 매화꽃을 본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기분이었을까.
작은 미술관? 그래서 맘껏 누린 조희룡의 작품
‘우봉 조희룡 미술관’은 작다. 조희룡 전문 미술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작은 섬에 자리 잡다 보니 그리 좋은 작품들이 있지는 않다. 중요 작품의 진품이 서울에 있다 보니 복제본과 그보다 못한 수준의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화가가 실제로 그림을 그린 장소에서 그림을 만나는 경험은 또 다른 느낌을 선사하는 것이 분명하다.(게다가 복제본의 상태가 아주 좋아서 오히려 본래의 생생한 색감을 더 잘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전시실 안에는 조희룡의 다양한 매화 그림뿐 아니라, 조희룡이 임자도에 있을 때 주고받았던 편지를 모아놓은 《수경 재회 적 독》이란 책도 전시되어 있다. 조희룡 전문 미술관답게 조희룡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작은 미술관이어서 누릴 수 있는 장점들이 많다. 아무래도 미술관에서는 조용히 감상하는 것이 예의이긴 하지만 미술관에 ‘우리’밖에 없다면? 조금은 편하게 이야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함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답사를 하러 갔을 때도 우리밖에 없어 작품에 대한 자기 생각을 서로 나누며 재밌게 감상할 수 있었다.
‘우봉 조희룡 미술관’의 또 다른 장점은 여러 편의‘미디어아트’가 있다는 것이다. 요즘 다양한 전시에서 ‘미디어아트’를 활용하여 관람자에게 작품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기도 하고 3D 작품 감상을 통해 눈과 귀가 즐거운 전시를 경험하곤 한다. ‘우봉 조희룡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미디어아트’는 이이남 작가의 ‘달빛, 매화에 걸리다’다. 까만 밤 밝은 달이 떠오르고 매화 꽃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모습을 ‘미디어아트’로 만들었는데, 마치 매화 꽃잎이 떨어지는 그 공간에 내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2021년 《우·아》의 마지막 답사로 국립중앙박물관과 임자도의 ‘조희룡 유배지’와‘우봉 조희룡 미술관’을 소개했다. 먼 길이라 쉽지 않은 답사길이 되겠지만 그래도 임자대교가 생겨서 육로로 임자도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전남 여행길에 임자도까지 한번 들러보는 여행 계획을 넣어보면 어떨까.
COVID19를 겪으며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건 내가 보고픈 것은 그래도 보면서 살았던 것 같다. 물론 아직 본 것보단 볼 것이 더 많긴 하지만 말이다. 위드코로나라곤 하지만 아직은 확진자도 많이 나오고 조심해야 할 것도 많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자. 언제 다시 이런 시간이 우리 앞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선 ‘2021년 가을, 그분을 기억하다’라는 기념전이 12월 말까지 진행된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는 조희룡의 작품뿐만 아니라 조희룡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람 전기의 ‘매화서옥도’도 함께 전시 중이다. 기념전 전시도 보고 ‘회화실’에 있는 아름다운 회화작품들도 보며 그렇게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으면 싶다. 다시 매화꽃 피는 봄이 오면,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마음껏 만나며 살고 싶다.
■ 참고
1. 이선옥, 우봉 조희룡, 돌베개, 2017
2. 안휘준, 조선시대 산수화 특강, 사회평론, 2015
3. 주미경, 미술 감상을 위한 조희룡 작품의 조형성과 예술관 연구, 조형교육 No.38, 2010
4. 윤재민, 19세기 중인문학의 재조명, 고려대학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