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과 헌릉 답사
지난주 토요일, 일 년 반 만에 우리 반 아이들과 ‘박물관에서 놀자’를 다녀왔다. 확진자 수가 작년보다 훨씬 많아져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알기에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할 수 있다. 지난주 토요일, 일 년 반 만에 우리 반 아이들과 ‘박물관에서 놀자’를 다녀왔다. 생각보다 많은 참여였다. 아직 대중교통은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어 교통편은 가정의 협조를 구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친구들과 체험학습을 가서인지 아이들이 매우 들떠 있었다. 허락된 시간이 오전뿐이라 화성 성곽 한 바퀴를 돌 수는 없었고, 화성행궁에서 출발해 팔달산 정상의 화성 장대를 올랐다가 화서문, 장안문, 방화수류정 그리고 화성박물관 야외전시를 보는 코스로 진행했다. 3시간 남짓 담임교사의 설명을 경청해주었고, 도 중간에 수원문화재단에서 제작하는 화성 홍보영상에도 당당히 캐스팅(?)되어 참여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을 진행한다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란 말도 있지만,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야외활동을 하는 것이라면 고려해볼 만하단 생각이 든다. 학교 밖의 공간에서 직접 체험하고 겪으며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이런 체험이나 문화 활동이 어떤 어린이들에게는 전부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마냥 미루기만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반 아이들과는 6월 마지막 주에 용주사와 융∙건릉을 답사할 계획이다. 코로나로 주춤거렸던 여러 교육활동(답사나 체험학습 말고도 다양한 체험활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 방법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21 박물관에서 놀자 두 번째는 수도권 학교에서 반나절 정도의 시간으로 답사하기에 알맞은 서울 경복궁의 건청궁과 남양주 홍릉 2곳을 선정해보았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중심으로‘고종과 명성황후’를 알아보기에 좋은 곳이다. 한 번에 두 곳 모두를 답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서울에서 남양주까지의 거리가 멀어 두 곳 모두를 가자면 식사를 할 수밖에 없어 따로 2번 가는 것을 추천한다. 온종일 프로그램을 계획한다면 서울에선 (구)러시아공사관과 환구단 그리고 덕수궁을 가보면 좋다. 그리고 남양주에서는 유릉(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순정효황후 윤씨를 모신 능)과 덕혜옹주 묘, 의친왕 묘, 영원(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합장릉)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
명성황후 고종의 배필이 되다
우선 명성황후와 고종은 누구인지를 알고 떠나보자. 명성황후와 고종을 알아보려면 그 가계를 훑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종의 할아버지인 남연군은 정조의 배려(?)로 아들 없이 죽은 은신군의(사도세자의 서자) 양자가 되는데, 철종(순조의 양자가 되어 왕이 되었다.)이 후사 없이 죽으면서 사도세자의 후손으로서 왕위 다툼에 있어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된다. 결국 흥선대원군과 신정왕후(효명세자의 왕비이며 조대비라고도 한다.)간의 물밑 접촉을 통해 효명세자의 양자로 둘째 아들 이재황(훗날 고종)을 선택한다. 고종은 11살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1866년 혼인을 하게 되는데, 여흥 민씨 민치록과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명성황후다.(아명은 ‘자영(玆暎)’이란 것만 전해진다.) 일설에는 명성황후가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가 없어 간택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건 반 정도만 맞는 얘기다.
여흥 민씨 집안은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와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를 배출했었다. 특히 명성황후의 5대조 할머니가 인현왕후가 되는데,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은 송시열 등과 서인 정권을 주도한다. 그러다 보니 여흥 민씨는 조선 후기 큰 권력은 없었지만, 명망 있는 집안으로 백성들과 사대부에 존경을 받았다. 남연군, 흥선대원군, 고종 3대가 모두 여흥 민씨 집안과 결혼한 이유다. 단지 명성황후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 안동김씨는 외척의 위치에 있으면서 세도정치를 했었고, 흥선대원군으로서는 외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민씨 집안이 제격이었다 할 수 있다. 이것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밝힌 것은 아니어서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다보하시 기요시의 <근대 일선 관계의 연구> 등을 살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민치록이 죽었고 승호가 연소한즉, 자기에 대항할 자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고, 자기를 대신해서 잡는 것은 부인에게 있다고 하였으니 계려(計慮 : 꾀)가 미치지 못한 것이다.
<한국통사> 중
당시 대원군은 이미 장래의 왕비에 관해 좌의정 김병학과 밀약한 바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것을 이행하면 다시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역전될 위험이 있었다. - 생략 – 그 결과 김병학과의 밀약을 무시하고 새 왕비는 국구(國舅 : 왕비의 아버지)가 없는 사람 중에서 간택하기로 했다.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중
그리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는 한배의 운명을 걷게 되었다. 오늘 답사는 그래서 경복궁에 깊이 새겨진 고종과 명성황후의 흔적부터 찾아보려 한다.
집옥재, 뜻하지 않은 곳을 보는 즐거움
이번 답사에서는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보단 건청궁 답사가 주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3문과 3조를 지나는 직선코스 보다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보고서인 <사다쓰지 보고서>의 일본 자객 침입 경로를 따라가면서 답사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사다쓰지 보고서>를 보면 광화문 오른쪽 담장을 넘어서 근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의 유화문을 지나 경회루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사이로 신무문 우측의 계무문 쪽으로 올라가는 길로 이동하여 건청궁의 침입한 것을 볼 수 있다. 침입 경로를 따라 온전히 답사하면 좋겠지만 현재 유화문이 닫혀 있어 그대로 답사하는 것은 힘들다. 근정문으로 들어가 좌측의 경회루를 따라 계무문까지 가서 우측의 건청궁으로 들어가는 코스로 가면 어느 정도 맞을 듯하다.
답사의 묘미 중의 하나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낯선 것을 보는 재미다. 경회루에서 계무문 방향으로 가다 보면 건청궁 좌측 담벼락 바로 앞에 중국풍의 건물인 집옥재(集玉齋) 볼 수 있다. 건청궁으로 바로 발길을 옮길 수도 있으나 이왕 건청궁 가까이 왔으니 집옥재 일원을 보고 가는 것도 좋겠다. 집옥재는 창덕궁 함녕전의 북별당으로 지었던 것을 1891년(고종 1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2층 건물인 집옥재는 ‘옥같이 귀한 보배를 모은다.’라는 뜻으로 도서관과 고종의 서재로 사용되었는데, 각국의 공사를 접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집옥재는 앞서 말했듯이 중국풍으로 지어졌고, 팔우정과 협길당은 우리의 전통 양식으로 지어졌다. 집옥재의 건축과 이건 관련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팔우정과 협길당은 언제 지어졌는지 확실치가 않다. 집옥재가 창덕궁에 같이 지어졌다는 의견과 경복궁으로 옮겨 세울 때 지었다는 견해가 있다. 고종이 이곳을 서재와 공사 접견의 공간으로 사용한 것은 아무래도 건청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가까운 이곳이 중요한 활동공간으로 이용되었다 할 수 있다.
맑은 날이 가득했으면 좋으련만
건청(乾淸)이란 ‘하늘은 맑다.’라는 의미로 중국의 자금성 안에 똑같은 이름의 궁이 이다. 고종은 왜 ‘건청’이란 이름을 썼을까? 건청궁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장안당(長安堂)과 곤영합(坤寧閤)이 있다. 건청, 장안, 곤영이라는 이름은 왕과 왕비가 오랫동안 평안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가 있다.
건청궁은 1873년에 지어졌다가 1909년 그 자리에 일본이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으면서 사라졌다. 조선총독부 미술관은 광복 후에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1998년 철거됐다. 그리고 2007년 건청궁을 새로 복원했다. 건청궁의 수난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 처음도 그러했다. 건청궁을 지을 때 신하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신하들은 백성들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과 경복궁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궁궐 안에 또 다른 궁인 건청궁을 필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고종은 국고가 아닌 왕실의 내탕금으로 공사를 강행했다. 여기에는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하고자 하는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다. 고종은 건청궁을 완성하면서 흥선대원군과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며 권력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킨다. 건청궁의 완공과 함께 흥선대원군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곳 건청궁에서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있기까지 거처로 사용한다.
명성황후시해사건과 관련해서는 <사다쓰지 보고서>에 기록된 대로 침입 경로는 분명한 것 같은데, 명성황후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또 살해 후 행동들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다만 명성황후시해사건 그날의 공식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이 고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묘시(卯時)에 왕후(王后)가 곤녕합(坤寧閤)에서 붕서(崩逝)하였다. 【이보다 앞서 훈련대(訓鍊隊) 병졸(兵卒)과 순검(巡檢)이 서로 충돌하여 양편에 다 사상자가 있었다. 19일 군부 대신(軍部大臣) 안경수(安駉壽)가 훈련대를 해산하자는 의사를 밀지(密旨)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가서 알렸으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禹範善)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가서 만나보고 알렸다. 이날 날이 샐 무렵에 전(前) 협판(協辦) 이주회(李周會)가 일본 사람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와 함께 공덕리(孔德里)에 가서 대원군(大院君)을 호위해 가지고 대궐로 들어오는데 훈련대 병사들이 대궐문으로 마구 달려들고 일본 병사도 따라 들어와 갑자기 변이 터졌다. 시위대 연대장(侍衛隊聯隊長) 홍계훈(洪啓薰)은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살해당하고 궁내 대신(宮內大臣) 이경직(李耕稙)은 전각(殿閣) 뜰에서 해를 당했다. 난동은 점점 더 심상치 않게 되어 드디어 왕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되었는데, 이날 이때 피살된 사실을 후에야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즉시 반포하지 못하였다.】
고종실록 을미년(1895년) 8월 20일(음력)
명성황후시해사건 당일 실행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 계획보다 이틀이나 빨리 진행되다 보니 허둥지둥 전개된 여러정황들이 보인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자 하는 계획을 꾸미기는 하였으나 1895년 8월 20일은 아니었다. 고종실록을 보면 실행 하루 전날인 19일 고종황제는 군부대신 안경수에게 훈련대 해산을 알린다. 일본은 훈련대를 동원하고 흥선대원군을 대동하여 마치 흥선대원군이 고종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것처럼 포장하려 했기 때문에 훈련대의 해산은 청천벽력 같았다. 당시 공사였던 미우라는 단독결정으로 급박하게 흥선대원군을 경복궁으로 대동하고 명성황후시해사건을 벌인다.
이후 고종은 일본의 강압으로 1895년 8월 22일 명성황후를 폐서인하지만, 순종의 반대 상소로 다시 빈의 칭호를 내려준다. 1896년 2월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결행한다. 고종은 바로 김홍집 내각을 파직하고, 친미파였던 박정양과 이완용 등을 내부대신과 학부대신으로 임명한다. 이날 성난 백성들은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친일에 앞장섰던 김홍집과 정병하를 광화문에서 살해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장례는 2년 후인 대한제국이 성립 직후인 1897년 11월 22일 치르고 청량리 홍릉에 안장한다.
홍릉에 합장되다
고종은 경운궁에 머무르며 12년을 더 살다 1919년 1월 21일 68세의 나이로 함녕전에서 승하한다.
태왕 전하가 편찮아서 전의(典醫) 김영배(金瀅培)와 총독부 의원장(總督府醫院長) 하가 에이지로〔芳賀榮次郞〕가 입진(入診)하였다.
순종(부록) 기미년(1919년) 1월 20일
묘시(卯時)에 태왕 전하가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하였다. 다음날 복(復)을 행하였다.
순종(부록) 기미년(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어느 것 하나 명명백백 밝혀지지 않았는데, 다만 죽음의 원인과 관련해서는 독약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독약을 마신 것 또한 자살인지 독살인지 불분명하다. 어찌 되었건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은 1919년 3월 4일 명성황후와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 합장되었고, 조선왕릉 42기 중 홍릉과 유를 만이 황제의 능으로 조성되었다.
두 번째 갈 답사지는 바로 홍릉이다.
25년 만에 고종과 명성황후는 합장을 통해 홍릉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홍릉은 조선의 첫 번째 황제릉으로 왕릉과는 그 격을 달리하며, 화려하거나 오만하지 않으면서도 조선만의 단아함이 곁들여 있다. 홍릉이 청량리에서 남양주에 옮겨오게 된 것은 고종이 승하하기 전인 1900년에 명성황후의 능이 풍수적으로 좋지 못하다는 상소가 올라오면서이다. 홍릉의 천봉은 고종의 황제국 선포와도 관련이 있다. 대한제국을 1897년 10월에 선포하고 명성황후의 장례를 11월에 치르다 보니 형식이나 규모 면에서 황제릉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천봉에 대한 결심은 황제릉을 조성하여 대한제국이 황제국으로서 자주권과 면모를 보이려는 뜻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은 홍릉을 천장 하면서 기존의 왕릉이 아닌 황릉으로 조성하기 위해 명나라 예를을 직접 보고 오도록 명령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명나라 황릉의 규모가 이제껏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크기임을 듣고 우리나라 규모에 맞게 조성할 것을 명한다. 대한제국에서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규모로 발 빠른 포기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힘으로 명나라 제도를 그대로 따르자고 하면 설사 한두 해를 허비하더라도 역사를 끝내기 어려울 것이다. 또 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수릉(壽陵)을 지은 것은 길이 100여 척(尺)에 너비 90척으로서 그 역사가 방대하니 어떻게 이렇게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진(晉) 나라의 문공(文公)이 수도(隧道)를 내고 장사지낸 일은 꼭 예법에 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대체로 장사지내는 것은 우리나라의 규례대로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고종 경자년(37년) 8월 31일
대한제국의 규모에 맞는 황릉이란 무엇일까? 명 13릉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그리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조선의 다른 왕릉과 비교하면서 하나하나 따져보다 보면 홍릉만의 멋에 빠질 수 있다.
조선왕릉은 홍살문으로 제향 공간에 들어가게 되는데, 우측의 어로(좌측은 향을 들고 가는 향로이다.)를 따라 임금이 정자각까지 다다르게 된다. 정자각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능에 모셔진 왕의 신령이 내려와 제사상을 받게 된다. 정자각과 능침공간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데, 능침 앞으로는 문무석을 비롯하여 장명등과 혼유석이 있다. 장명등은 문·무인석 중간에 위치하는데 사후의 세계를 밝히는 역할을 하고, 장명등 뒤에 있는 혼유석은 생김새가 민가에 묘 앞에 놓인 제사상처럼 보이는데 실은 능침의 주인인 혼령이 노는 곳을 말한다. 그리고 능침은 보통 병풍석으로 둘러쳐져 있고, 주위에는 석양과 석호가 능을 수호하고 있으며 곡장이라는 담으로 바깥과 경계를 이룬다. 조선왕릉 40기가 대개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오래도록 그 형태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다른 왕릉들과 홍릉의 가장 큰 차이는 돌짐승의 위치와 개수다. 홍릉의 돌짐승들은 홍살문으로 들어가면 향로와 어로 양옆으로 일렬로 마주 보며 한 쌍씩 서 있다. 이건 명나라 황제릉의 형식을 쫓아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홍릉의 돌조각들은 홍살문부터 말-낙타-해태-사자-코끼리-기린 그리고 무인석과 문인석이 있다. 반면 명나라 황제릉에는 사자-해태-낙타-코끼리-기린-말 순서로 모두 두 쌍씩 있다. 돌짐승 수의 차이는 아무래도 대한제국의 형편에 따라 적게 만들었다 할 수 있는데, 돌짐승의 순서가 다르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중에서도 문·무인석 다음에 놓인 동물과 그 이유 정도만 알아도 될 듯싶다. 대한제국은 무인석 다음 자리에 기린을 둔 것에 비해 명나라는 말을 두었다. 반면에 홍릉에서는 말만 두 쌍이고 제일 뒤쪽에 배치된다. 이것은 조선왕릉에서 말이 문·무인석 뒤편에 배치되는 것으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말이 벽사의 의미보다는 실질적으로 타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명나라 황릉에는 말이 제일 먼저 배치되는데 이건 말이 실질적으로 전쟁에서 장수가 타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중요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좋은 기운을 가지고 오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홍릉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정자각이 아닌 침전이 있다. 황제릉이기 때문에 정자각이 아닌 침전일 거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명성황후의 능으로 홍릉을 조성할 때부터 일자형 침전이었다. 황제릉과는 전혀 상관은 없고 고종이 특별한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조선왕릉과 마찬가지로 침전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능침이 있다. 능침 주변의 석물은 왕릉의 본을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이 있다.
지금까지 홍릉에 대해서 조금은 급하게(?) 답사했다. 여러분이 홍릉을 간다면 조금은 여유롭게 답사하길 권한다. 홍릉까지 이르는 길이 워낙 잘 조성되어 있고, 숲과 연못까지 잘 어우러져 자연이 주는 평안함도 느낄 수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 옆에 공주묘, 묘까지 가보는 것도 좋겠다. 알고 보면 보이는 것들이니 홍릉을 가게 되면 아마 눈에 띌 것이다. 물론 모르고 간다고 하여도 좋은 곳이다.
건청궁과 홍릉을 중심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대략 살펴보았다. 조선의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고자 아니 노력했다 할 수 없지만, 공부하면서 다시 살펴보아도 무엇 하나 잘한 게 보이지 않았다. 아마 교사 대부분이 대한제국 시기를 공부하고 가르치다 보면 답답한 마음에 책을 덮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25년 만에 합장을 통해 홍릉에서 다시 만난 고종과 명성황후는 서로를 보면 무어라 말했을까 궁금하다. 나라가 점차 기울어가던 시기에 일본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고 시신조차도 장작 위에서 불타버렸던 명성황후. 그리고 나라를 빼앗기고 누구의 사주인지도 모른 채 독살되었다고 알려진 고종. 정치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지 못한 망국의 아픔에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무능은 했지만,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그래도 한평생을 보낸 서로의 삶을 위로하며 어깨를 토닥거리지는 않았을까. 어쨌든 고종과 명성황후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그런 관계였다. 서로의 삶을 지탱해주며 의지를 다지는 동지애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더 편안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고종이 죽은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망국의 아픔을 답답해하며 원망할 뿐, 그 고단했던 역사는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망국의 시대, 비운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었던 고종과 명성황후의 삶을 통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성찰해야 좋을지 답사를 통해 그 실마리를 얻었으면 좋겠다.
■ 참고
1. 이희주, 명성황후 평전, 신서원, 2020
2.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3. 이태진, 고종황제 독살과 일본정부 수뇌부, 역사학보, 2009
4. 김영수,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이화사학연구소, 2009
5. 이태진, 고종황제의 독살과 일본정부 수뇌부, 00학회, 2009
6.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