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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rick Oct 09. 2022

조선의 근대를 걷다

서울 정동을 중심으로

근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모던보이, 모던걸, 그리고 전차? 얼마 전 창덕궁을 가니 그 앞 옷 대여점 마네킹에는 ‘경성룩’이라는 이름으로 오래전 경성 멋쟁이들이 입었을 법한 옷들이 걸려있었다. 옷들로만 보아서는 낭만이 가득했을 것 같은 근대를 상상하게 했다. 그런데 조선의 근대라 하면 창덕궁보단 정동이 더 어울린다.

정동하면 덕수궁 돌담길을 떠올릴 사람들이 많을 텐데, 우스갯소리로 사랑하는 사람과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이라 회자하기도 하였다. 이 이야기는 정동 언덕에 있는 현 서울시립미술관이 서울가정법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인데 정말 아재 개그에나 어울리는 소재가 되어버렸다. 지금의 돌담길엔 이런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주말엔 젊은 남녀와 가족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것은 정동이 가지고 있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우리의 발을 어느샌가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속에 숨겨진 우리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마음이 조금은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정동은 조선의 근대 시기 선교사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었고, 신학문이 넘실댔으며, 외교의 각축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동은 조선의 땅이었으면서도 서양인을 위한 공간이었다. 물론 고종은 정동이란 공간을 서양인에게 무기력하게 내주려 하지는 않았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노표를 발행하여 정동 통행을 제한하기도 했으며, 경운궁으로 이어한 이후에는 궁궐영역을 확장하기도 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한성재판소가 경운궁 북쪽에 자리 잡기도 하였다. 이렇다 보니 조선의 근대를 보기 위해서는 정동만 한 곳이 없다.      

정동 답사의 시작은 서울특별시의회     

정동은 시간을 쫓아 답사를 하다 보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어 시간의 흐름보다는 공간의 이동에 따라 진행하면 좋다. 답사는 세종 대로변에 있는 서울특별시의회를 시작으로 성공회 서울교구 대성당, 환구단, 대한문, 석조전, 배재학당역사관, 정동교회, 중명전, 이화여자고등학교, (구) 러시아공사관으로 하면 그래도 중복되는 길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의회(구 경성부민관)_등록문화재 제11호

답사의 첫 시작인 서울특별시의회 건축물이다. 일본 강점기에 대집회용 건물로 지었는데, 그때의 이름은 ‘경성부민관’이었다. 경성부의 민관이니 지금으로 치면 시민회관 정도 되는 건물이다. 경성부민관은 1934년 12월에 완공되었는데, 대강당과 중강당 그리고 소강당을 갖추고 있으며 대강당은 좌석이 2,000여 석이나 된다. 이곳에서는 연극이나 강연회 등이 열렸었는데, 1945년 7월엔 친일 단체인 대의당이 개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에서 ‘애국청년당원’이었던 조문기 등이 폭파 의거를 하기도 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광복을 앞둔 시점에서 우리의 독립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일제는 왜 ‘경성부민관’을 지었을까? 경성부민관은 그 당시 최신식 건물로서 세종대로 한쪽 편을 차지하고 있는데, 맞은편의 경성부청사와(현재의 서울시청사) 짝을 이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울특별시의회’라고 쓰여있는 자리에 시계탑이 있었다고 한다. 탑의 높이가 45미터나 된다고 하니 꽤 올려다보았어야 한다. 경성부민관은 수평선과 수직선(강하게 대비시켜 실제 규모와 비교해 건물을 크게 보이게 해서 일제의 권위를 과시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종문화회관 별관이었다가 현재는 서울특별시의회가 되었다.      


조화와 존중의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서울특별시의회 건물을 지나 덕수궁 쪽으로 서너 걸음 걸으면 우측으로 단단해 보이는 그리 작지 않은 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엔 일제가 지은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해방 이후엔 서울 국세청 남대문 별관)가 있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2015년 서울시가 역사문화특화공간으로 서울 국세청 남대문 별관을 철거하면서 한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_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호

성공회주교좌성당은 1890년 12월 영국에서 파견된 존코프(한국 이름 고요한)주교에 의해 현재 위치에 있던 한옥과 주변 땅을 매입하면서 건축을 준비했다. 경운궁 옆에 있는 이곳을 매입하게 된 것은 한성부지도를 보아서도 알겠지만, 이곳에 영국대사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국대사관과 담장 하나로 나뉘어 있다. 

첫 감사성찬례를 12월 21일에 드려서인지 성당의 수호성인도 성모마리아와 성니콜라다. 1922년 조선성공회 3대 주교인 트롤로프(한국명 조마가)가 영국 버밍햄에서 알고 지내던 아더 딕슨에게 성공회주교좌성당의 설계를 부탁하면 본격적인 건축이 시작된다. 조마가주교는 고딕양식으로 짓길 원했으나 덕수궁과 조화와 경비 절감을 위해 로마네스크양식으로 건축하길 추천한다. 아더딕슨은 설계와 건축을 위해 조선을 두 번이나 방문한다. 성공회주교좌성당의 건축은 1926년 자금 문제로 건축이 중단되었고, 이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완공하려 하였으나 아더딕슨의 설계도를 찾을 수 없어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근대 시기에 지어진 성공회의 성당 건축은 조선의 문화에 대한 조화와 존중이 담겨 있다고 한다. 아더딕슨이 덕수궁과의 조화를 고려하려 성공회주교좌성당을 로마네스크양식을 하였다고 했는데, 강화와 청주에 있는 성공회 성당의 경우는 아예 한옥으로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옥식바실리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공회의 노력은 ‘신앙의 토착화’라는 선교 전략이 나은 것이다. 주교좌성당 역시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어지긴 했지만 군데군데 한옥 양식을 접목하였다. 로마네스크양식이라 하면 라틴크로스 구성, 화강암 재료, 트랜셉트 그리고 내부의 비잔틴 성화 등이 꼽힌다. 기본적인 틀은 로마네스크라 할 수 있는데, 처마장식과 창살 문양 그리고 기와지붕 등은 한국 전통 양식에서 가져왔다. 

구본준은 <마음을 품은 집>에서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관련하여 ‘성공회서울대성당의 내부는 전혀 화려하지 않다. 대신 단아하다. 하얀 벽과 갈색 나무 구조가 단순하다.’ ,‘이렇게 차분하게 사람을 배려하는 건축, 튀기보다 함께 어울리려는 건축은 실로 드물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성공회주교좌성당에 대해서 좋은 말만 있지는 않다. "미술공예 건축물과 성물들을 통해 영국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과시했고 예배공간마저 통제하고 지배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성공회는 토착화의 기회를 상당기간 놓치게 되었고 현재 새로 건축되는 교회건축양식성물예전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옥스퍼드운동과 미술공예운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회대학교 총장을 지낸 이정구신부의 말이다. 이런 쓴소리의 이유는 아마도 성공회가 강화도에서 첫 개척을 하면서 지었던 ‘한옥형바실리카성당’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성공회주교좌성당은 우리나라의 굴곡의 현대사에도 함께 했다. 성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한옥으로 지은 사제관 앞에 ‘유월민주항쟁진원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1987년 6.10 국민대회가 이곳 성공회주교좌성당에서 있었다. 6월 10일은 잠실체육관에서 노태우가 민정당 후보로 선출되는 날이었는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한껏 달아오르던 때였다. 

1987년, 이곳에서 6·10 국민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6월 10일은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날이었습니다. 국민은 박종철 고문치사를 은폐하고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6·10 국민대회였다. 오후 5시 성공회 김성수 주교에 의해 ‘4.13 호헌철폐를 위한 미사’를 드리고, 오후 6시 45년 광복 이후 1987년까지 계속된 독재가 자행된 것에 대한 끝장내자는 의미를 담아 42번의 종을 치고 거리로 나섰다. 

고종 대한제국으로 근대화를 향하다     

성공회주교좌성당에서 시청 쪽으로 건널목을 건너 시청광장을 지나 조금만 걷다 보면 한옥으로 지어진 삼문 양식의 환구단 정문을 볼 수 있다. 환구단은 정문은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에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이리로 자리를 옮겼다.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기 위해 새로 지은 건물이다. 

환구단은 유교에서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황제의 의무이기도 하고 특권이기도 했다. 조선은 제후국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조선은 제후국으로 환구단이 아닌 사직단에서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제사를 지냈다. 고종은 환구단에서 1897년 10월 12일(양력)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올랐다.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왕태자가 배참(陪參)하였다예를 끝내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심순택(沈舜澤)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하였다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심순택이 나아가 12장문의 곤면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왕후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국궁(鞠躬), 삼무도(三舞蹈), 삼고두(三叩頭), 산호만세(山呼萬世), 산호만세(山呼萬世), 재산호만세(再山呼萬世)를 창하였다.

고종실록 36고종 34년 10월 12일 양력 1번째기사 

     

독립신문에는 이날의 즐거움과 관련하여‘집집마다 태극 국기를 높이 걸어 인민의 애국지심을 표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얼굴에 즐거운 빛이 나타나더라.’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고종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청나라와 일본뿐 아니라 서구 열강에 대해 우리의 자주적 국가 위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현재 환구단에는 황궁우(1899년 12월 완성)와 3개의 돌북, 석조문이 남아있다. 황궁우는 환구단이 세워진 지 2년 후인 1899년에 만들어졌다. 삼층 팔각건물로 바깥에서 보면 3층이지만 실내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황궁우 안에는 천신과 지신 그리고 인신(태조)의 신위를 모셨다. 그리고 천장에는 칠조룡을 조각을 새겨 놓았다.

황궁우 앞에 돌북은 1902년엔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만들어 놓았다. 돌북은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악기를 본떠서 만든 것으로 몸체에는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황궁우와 웨스틴조선호텔 사이에 있는 삼문 안으로 바라보는 황궁우의 모습은 일품이다. 가운데 문 천장에서 용이 아주 멋지게 그려져 있다. 

환구단의 모형을 살펴보면 네모난 담장 안에 화강암으로 3층의 동그란 단을 쌓고 금색의 원뿔꼴 지붕을 얹었다. 옛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이라 한다. 북경에 가면 천단공원안에 청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이 남아있다. 우리보다 규모가 살짝(?) 크다.

환구단 자리에는 현재 웨스틴조선호텔이 들어서 있는데,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지 3년 후인 1913년 일본은 이곳에다 환구단을 헐어버리고 철도 호텔을 세웠다. 해방후엔 국가의 호텔로 운영되다 1953년 화재로 4층이 타버린 적이 있으며, 1970년에 20층 건물로 재개관하였고 여러 법인을 거쳐 현재는 웨스틴조선호텔로 불리고 있다.


                                                                             

을사늑약의 아픔이 서려 있는 경운궁     

환구단에서 나와 더플라자호텔 앞을 지나 세종대로 쪽으로 걸어 나오다 보면 정면 2칸의 대한문이 보인다. 지금은 덕수궁이라 불리는 경운궁의 정문이다. 덕수궁과 대한문 모두 본래 이름은 아니다. 우선 대한문은 대안문이라 불리었는데, 사실 경운궁의 정문도 아니었다. 궁궐에서 왕은 항상 남향으로 앉고, 그래서 정문도 남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대한문은 동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대안문이 경운궁 첫 정문은 아니었다. 첫 정문은 인화문이었는데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면서 헐리고, 대신 동쪽 문인 대안문(大安門)을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고 정문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덕수궁 또한 고종이 황제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만수무강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덕수(德壽)궁(宮)이라 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 궁궐이 모두 불에 타서 돌아갈 곳이 없던 선조와 광해군이 월산대군의 사저를 빌려 머물던 곳으로 창덕궁을 다시 짓고 이어하면서 붙여준 이름이다. 아무리 왕족의 사저였지만 궁궐로 쓰기에는 전각이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환어하는 시기에 전통 양식의 전각과 더불어 서양식 전각들도 새롭게 지었다. 

경운궁에 있는 전각 대부분이 볼만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보면 좋겠지만 조선의 근대를 주제로 답사하고 있으니 정관헌과 중명전을 중심으로 훑어보자. 

우선 정관헌은 대안문으로 들어와 석조전을 지나 광해군 대에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어당 옆에 있다. 창 신문을 통해 정관헌에 바로 들어가기보다는 그 앞에 있는 살구나무 아래에서 석어당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가면 좋겠다.

석어당이 근대 양식의 건물이 아니지만, 너무 멋지니 잠시 머물러보자. 인목대비가 유폐되기도 했던 석어당은 궁궐의 전각임에도 용도, 잡상, 휘두를 올리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단청을 칠하지 않아 민가처럼 간결하면서도 단아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문을 모두 열어놓아 실내가 살짝살짝 엿보이는데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2층 계단으로 올라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제 고개를 숙이고 창신문을 통해 정관헌으로 들어가 보자. 

석조전이 단단함이 돋보이는 서양식 건축물이었다면 정관헌은 화려함이 돋보이는 그런 건물이다. 정관헌(靜觀軒) 역시 성공회주교좌성당처럼 서양식과 조선의 양식이 섞여 있다. 정관헌을 설계한 인물은 (구) 러시아공사관과 중명전을 만든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으로 전해진다. 정관헌의 전체적인 모양은 로마네스크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테라스를 중심으로 조선의 꽃과 전통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정관헌은 내부 기둥과 외부 기둥이 있는데, 외부 기둥은 목조지붕을 덧댄 곳에 세웠다. 1930년대 사진을 보면 정관헌은 지금처럼 3면이 훤히 뚫려있는 건물이 아니라 4면이 모두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언젠지는 정확하지 않고 3면의 벽을 허물었다. 

정관헌의 정확한 용도와 관련하여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관헌에 어진을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준원전본(濬源殿本영정을 임시로 정관헌(靜觀軒)에 봉안하는 일과 열성조(列聖朝)의 진전본(眞殿本영정을 임시로 중화전(中和殿)에 봉안하는 일은 길일을 택하여 거행하도록 중건도감(重建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41고종 38년 2월 5일 양력 3번째기사      


커피를 좋아했다고 잘 알려진 고종이 순종과 함께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고종이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일제가 우리나라 궁궐을 공원화하면서 경운궁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했고 그때 정관헌에서 차와 다과를 팔았다고는 한다.                                           경운궁에서 두 번째로 보았으면 하는 곳은 중명전인데, 경운궁에 있지 않다. 중명전을 가기 위해서는 경운궁 밖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돌담길을 따라 쭉 걸어 올라가다 보면 정동극장이 나오는데 그사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막다른 곳에 중명전에 있다. 중명전으로 가는 길에 배재학당역사박물관과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실제 답사를 한다면 중명전에 가기 전에 위의 두 곳부터 들렀다가 가길 권한다. 

중명전과 경운궁 사이에 (구) 미공사관과 미국 대사관저가 있어 자칫 경운궁의 전각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고종황제가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했던 곳이 중명전이다.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중명전 역시 러시아의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A. I. Sabatin)가 설계를 했다. 2층의 서양식 건물로 현재 1층은 전시실로 꾸며놓았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들어갈 수 없지만, 코로나가 아니었을 때는 개방했었다. 중명전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이뤄졌는데, 당시의 모습을 1층 2전시실에 재현해 놓았다.                                              1905년의 을사늑약은 을사조약, 제2차한일협약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명칭이고 일본에서는 제2차 일한협약 혹은 일한보호협약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름이 많은 을삭늑약은 1965년 박정희 정권하에서 한일기본조약을 맺으며 무효로 하였다. 을사늑약의 과정이나 이후 결과는 이미 초중고 역사 시간에 많이들 배웠을 테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과 이승만     

덕수궁을 나와 처음 가 볼 곳은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다. 정동제일교회가 보이는 로터리에서 왼쪽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3분 정도 걸어가면 빨간색 벽돌의 예쁜 건물이 바로 박물관이다. 이곳은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 8월 3일,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 기관으로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조선의 근대, 고종은 청나라와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러시아에는 우호적이었다. 현재 배재중학교와 배재고등학교는 6월 8일을 개교기념일을 삼고 있는데, 이날은 고종이 배재학당(培材學堂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현판을 내려준 날이다. 

배재학당은 근대교육의 효시로 배출한 유명(?)인사들이 많다. ‘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나도향 등은 자랑스러운 배재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기에 정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남 이승만 박사는 1894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1895년에 졸업하였다학생 때는 집안이 가난하여 외국인 의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학비를 벌었고 이를 통해 8개월 만에 평생 배울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서재필과 함께 협성회 및 독립협회에서 민중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상하이 임시정부 최고책임자인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광복 후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졸업한 이후 개화사상가로 또 진보주의자로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 의회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이승만은 황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1898년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이후 1904년 특별사면으로 나온 이승만의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나기도 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미국 내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아래에서는 1919년부터 1925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많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중국으로 들어오지 않고 여전히 미국에 있었다. 그러다가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기도 한다.      

이번에 정국이 변경된 것은 태좌(이승만)께서 상해를 떠나 멀리 있으면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몸소 정무를 주간하고 친히 민정을 살피지 못하여 온갖 조치가 그 타당성을 얻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사람의 집에 주인이 없으면 그 집안 살림이 반드시 어지러워지는 법입니다하물며 나라의 정무에 있어서이겠습니까작년 남만주사변(南滿洲事變)이 확대된 이후로 정부는 더욱 대중의 원망을 받게 되었고 인심은 갈수록 과격해져서 모두가 개혁이란 한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이것이 가장 큰 원인이고 다른 문제는 모두가 소소한 것들입니다.

1925년 4월 1일 박은식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_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교적으로 활동할 수 이가 이승만밖에 없었기 때문에 1932년 국제연맹 회의에 전권대사로 임명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승만의 평가에 대해서는 엇갈릴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해방 이후 김구 암살, 한강대교 폭파사건, 독재정치와 관련해서는 명백하게 과(過)를 물을 수 있다.    

  

최초의 서양식 교회 정동제일교회(벧엘예배당)                                                    

근대의 조선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1887년 3월엔 경복궁 건청궁 앞에 750개의 백열등이 환하게 켜지기도 했고, 1895년엔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하는 단발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며, 1899년엔 서울전차가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8km 정도를 운행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근대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럼 근대 건축의 시작은 언제이고 어떤 건물이 있을까?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서울에도 서양식 교회와 성당이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정동에 처음 완공된 건물이 정동제일교회다. 배재학당을 지었던 아펜젤러 선교사가 일본인 요시자와에게 설계를 의뢰하고 한국인 심의석이 시공했다. 1895년 착공하여 1897년 완공하였는데, 더 빨리 착공을 시작했던 건(1892년) 명동성당이었다. 명동성당 건축이 늦어진 것은 조선 정부와 마찰이 있어 4년이나 공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永禧殿)과 가까워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성당 건축을 반대했지만, 아무래도 고종 입장에선 궁궐보다 더 높은 곳인 명동에 높다란 성당이 들어서는 것이 기분 좋았을 리 만무하다.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천주교 선교를 담당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블랑주교는 성당 건축을 포기하지 않고 강행한다. 결국 고종은 개신교와 천주교 모두 선교활동을 당장 중지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아담한 크기의 정동제일교회를 보면 정말 우리가 아는 고딕양식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 보통 고딕양식 하면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처럼 높게 뻗은 첨탑을 연상하기 쉬운데, 붉은 벽돌의 정동제일교회 또한 뾰족아치의 고딕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고딕양식과 달리 장식은 거의 하지 않고 실용성만을 따져서 만들었다. 이러한 고딕양식을 빅토리안고딕이라 하는데 미국까지 전해져 19세기 개신교 교회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후 우리나라 개신교회와 천주교회는 고딕양식의 건물들을 주로 짓게 된다. 정동제일교회는 양식사적인 의의 외에도 일제강점기 우리의 역사가 깃든 공간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였던 이필주 집에서 기독교 인사들이 모임을 했고 그를 비롯하여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할 인물들이 정해졌다.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전도사 박동완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몰랐던 이야기가 나오는 길     

지금까지 서울특별시의회를 시작으로 성공회서울교구대성당, 환구단, 경운궁, 배재학당역사박물, 정동제일교회를 둘러봤다. 정동에는 이외에도 조선의 근대를 볼 수 있는 곳으로는 이화학당과 (구) 러시아공사관이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화학당엔 하마비와 함께 대문만 남아 있고,  (구) 러시아공사관은 첨탑 부분만이 남아있는데 2021년 현재는 복원공사 중이다. 이 외에도 ‘고종의 길’과 ‘덕수궁 내부탐방로’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비록 역사적 고증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지만 정동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경운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을 걷다 보면 기분이 절로 좋아지고 아름다움에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빽빽한 아파트 숲에서만 지내다 정감 있는 길을 걷는 즐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따뜻한 봄날도 좋고, 더운 여름날에도 나무 아래에서 부채질하며 앉아있어도 좋다. 가을이야 코트 깃을 세우고 낙엽 밟으며 걷는 그 느낌은 말로 해 무엇하리. 겨울은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꼬옥 잡고 걷다 보면 뭐 여기가 천국이지 싶다. 정동길은 사시사철 언제나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길이다.         

  

골목

      -송선미     

걷다 보니     

모르는 데다.     

몰랐던 이야기가 걸어 나온다.     

-『옷장 위 배낭을 꺼낼 만큼 키가 크면 中』      

    

■ 참고

1. 구본준,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서해문집, 2013

2. 문동석, 한양 경성 그리고 서울, 상상박물관, 2013

3. 임석재, 개화기-일제강점기 서울건축,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1

4. 김종록, 근대를 산책하다, 다산초당,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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