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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rick Oct 09. 2022

여름에 다녀가면 좋을 작지만 아름다운 절

완주 화암사 & 김천 청암사


백 년 선풍기


                                                               송찬호

백 년 된 오래된 선풍기

지금도 고장 나지 않고

씽씽 잘 돌아가는 오래된 선풍기


그럼 그 오래된 바람은

얼마나 시원할까?

얼굴을 들이댔는데


글쎄민기 눈썹이 허예지고

동수 턱엔 할아버지 수염이 숭숭 나더래


벌써 6월, 방학까진 이제 40여 일이 남았다. 야호! 

아이들의 아우성에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를 돌리고 있다. 특히 체육 시간이 끝나고 나면 아이들의 땀 냄새에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땀을 식히라고 창문을 닫아준다. 송찬호 시인의 ‘백 년 선풍기’처럼‘민기 눈썹이 허예지고, 동수 턱엔 할아버지 수염’이 날 정도로 시원함이 절실하다. 

오늘 소개할 곳은 ‘백 년 선풍기’ 같은 곳이다. 여름엔 뭐니 뭐니 해도 시원한 곳이어야 하니까. 그곳은 완주의 화암사와 김천의 청암사다. 너무 크지 않고,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서 더욱 좋은 곳이다. 하지만 두 곳 모두 암(巖)자가 들어가는 절이니만큼 가는 길이 아주 편하지는 않다. 그래도 울창한 숲길이니 걸을만 하겠다.     

잘 늙은 절화암사     

화암사가 그러하다어지간한 지도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기를 꺼리는그래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다십여 년 전쯤에 우연히 누군가 내게 귓속말로 알려주었다화암사 한 번 가보라숨어 있는 절이라고가보면 틀림없이 반하게 될 것이라고.

잘 늙은 절화암사〉 중에서_안도현          

안도현 시인은 화암사를 보고 잘 늙은 절이라 하였다. 과연 그러하다. <화엄사중창비>에는 ‘바위벼랑의 허리에 너비 한 자 정도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가면 이 절에 이른다. - 중략 – 골짜기는 가히 만 마리 말을 갈무리할 만큼 넓고 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은 심곽(深廓 )이다참으로 하늘이 마든 것이요 땅이 감추어둔 도인의 복된 땅의 절이라 하였다. 그런 만큼 화암사로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기도 하지만 아름다움과 재미가 있다. 

보통의 절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거쳐 대웅전에 이르는데 화암사에는 일주문부터 없다. 더이상 차로 오를 수 없는 곳에 대충 주차하고 절벽과 절벽 사이의 계곡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군데군데 밧줄이 걸려있다. 그런 밧줄을 잡고 서너 군데 오르면 오른쪽으로 많은 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지만, 꽤 높은 폭포가 보이는데 그 옆으로 계단이 있다. ‘시와 그림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147계단’이라는데 폭포의 높이 만큼이어서 땀 좀 흘리며 올라가야 한다.     

한 십여 분 힘차게 올라 ‘이제 좀 쉬어야겠다.’ 싶을 때 화암사 우화루와 그 앞 돌의자가 나타난다. 돌의자에 앉아 땀 좀 식히고 있을라치면 살살 불어오는 작은 바람이 땀을 시원하게 날려주고 맑은 풍경소리를 더해 준다. 잠시 눈을 감고 그 풍경소리에 내 몸속 신경 하나하나를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피안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한겨울에 답사했기에 몸을 살짝 데울 만큼 땀이 났으니, 한여름엔 땀을 꽤 흘릴 것 같다. 하지만 워낙 깊은 골짜기라 찾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자릴 양보 해야 하지 않느냐는 염려는 붙들어 매고, 몸과 마음이 ‘충분히 쉬었다.’ 싶을 때까지 앉아 있어도 된다.


이왕 돌의자에 앉았으니 몸만 돌려 우화루를 보자. 보물 662호인 우화루는 조선시대 대부분 절에서 볼 수 있듯이 주불전(절의 중심이 되는 법당)과 마주하고 있는데, 지붕은 다포양식을 하고 있다. 다포양식은 공포가 많은 만큼 지붕의 무게를 좀 더 분산시킬 수 있고 또 화려함이 더해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팔작지붕을 그 위에 얹는 것이 보통인데 우화루는 맞배지붕이다. 팔작지붕이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화루는 다포양식으로 지붕의 무게를 여러 곳을 나눈 만큼 상대적으로 기둥이 지탱해야 하는 무게 또한 적어 굵은 배흘림기둥이 아닌 가느다랗고 민흘림기둥으로 세웠다. (1층은 2층에 비해 좀 더 굵은 기둥을 사용했는데 건물의 한 가운데 기둥 하나를 더 사용했다.)

1층의 기둥 아래를 보자. 땅 위로 초석을 올려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놓았다. 기둥의 초석이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돌을 그대로 사용했다. 대신 기둥을 초석의 모양대로 깎아 서로 맞물리게 하는 그랭이질 기법을 사용했다. 얼추 보기에는 돌을 깎는 것보다 나무를 깎는 것이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평평하게 깎는 건 한 번에 가능하겠지만, 돌의 모양대로 나무를 자르기 위해서는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고 조금씩 맞춰가며 깎아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랭이질 공법은 인공적인 것보단 자연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우리 건축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초석 모양대로 그랭이질을 했다.

휘어진 목재로 보와 문턱을 만들었다.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돌을 그대로 사용했다. 대신 기둥을 초석의 모양대로 깎아 서로 맞물리게 하는 그랭이질 기법을 사용했다. 얼추 보기에는 돌을 깎는 것보다 나무를 깎는 것이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평평하게 깎는 건 한 번에 가능하겠지만, 돌의 모양대로 나무를 자르기 위해서는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고 조금씩 맞춰가며 깎아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랭이질 공법은 인공적인 것보단 자연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우리 건축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누각이 있는 대부분 절은 누각 아래의 기둥 사이로 출입을 하게 되는데, 화암사는 우화루 1층이 석축으로 막혀있어 옆에 있는 기와집(대문채)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일반적인 대문채의 방은 대문으로 들어간 뒤 안쪽에서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화암사의 대문채는 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매우 작은 절이고 화암사로 들어가는 문이 이것 하나이다 보니 대문만 잠가 놓으면 절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 건축가 김봉렬은 ‘화암사의 외관은 마치 작은 성채를 보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그래서 순수하게 종교적 역할만 감당했던 절이기보다는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형태로 짓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대문채로 들어가기 전에 문턱도 보면 좋다. 문턱이 아래로 심하게 휘었다. 한옥 대문의 문턱은 휘어진 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문턱에는 곧게 뻗은 귀한 나무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다 보면 자연스레 문턱이 닳게 되니 처음부터 휘어진 나무를 쓴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화암사 대문채는 문턱과 그 위의 보에 위아래로 휘어진 목재를 사용해서 대칭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기둥의 그랭이질 기법과 휘어진 목재로 보와 문턱을 만드는 우리의 건축에 고유섭의 말을 빌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무기교의 기교’라 할 수 있다. 부러 멋 부리려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멋을 존중하려는 우리 민족 미의식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대문채를 지나 극락전이 있는 경내로 들어가 보자. 대문채의 문턱을 넘으면 왼쪽으로 대문채의 벽, 그리고 오른쪽으로 우화루의 벽이 있어 마치 복도 같다. 좌우가 그리 크지 않아서 한 사람은 넉넉히 지나다닐 수 있지만 마주 오는 사람이 있다면 몸을 돌려 게걸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화루 정면으로 극락전이 보인다. 절은 전각에 모셔져 있는 불보살님에 따라 그 이름을 정하다는데,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열반의 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극락세계에 계실 이유가 없는데도 중생들을 위해 설법을 하시는 부처님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화암사 극락전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져 있다는 거다. 절 답사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도대체 전각이 모셔져 있는 부처님이 누구냐는 거다. 그나마 전각의 이름에 맞게 모셔져 있다던가 불보살님들에게 맞게 지물이라도 들고 계시면 알 수 있는데 틀리게 모셔져 있는 곳이 많다는 거다. 그래서 절에서는 전각 이름만 보고 모셔져 있는 분을 속단하면 안 된다. 

화암사 극락전이 가지고 있는 타이틀이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하앙구조’ 목조건물이란 거다. 하앙이란 처마와 기둥 사이의 공포와 달리, 천장 내부에서부터 서까래와 같은 방향으로 길게 뽑아 공포 부분에서 지렛대와 같은 작용을 하여 처마를 길게 빼는 역할을 하는 부재를 말한다. 하앙을 통해 처마를 길게 빼다 보니 건물 내부에 빛이 적게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어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더운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처마를 길게 빼다 보니 많은 양의 비에도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보다는 중국과 일본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화암사 극락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중국의 하앙구조를 바로 들여왔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화암사 극락전의 ‘하앙’은 건물 앞면의 모습과 뒷면의 모습이 다르다. 앞면의 하앙은 연꽃 모양의 공포 위에 용머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뒷면의 하양은 연꽃 모양의 공포 위에 삼각형 모양으로 표현했다. (아무래도 삼각형 모양을 ‘장식했다.’ 말하기는 어렵다) 건축학자 김봉렬은 임진왜란 이전엔 앞면 ‘하앙’ 또한 뒷면처럼 삼각형 모양으로 간단히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절에서 내부가 아닌 건물의 바깥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화암사 극락전이 시작이라 한다. 이후 17세기에 지어진 많은 절의 전각들은 바깥을 화려하게 꾸미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화암사 극락전은 ‘하앙구조’라는 중요한 건축적 의의 외에도 닫집(국보 316)을 눈여겨보았으면 한다. 닫집이란 불단이나 어좌 위에 목조건물의 처마구조물처럼 만든 조형물을 말한다. 우리나라 말에서 ‘닫’은 ‘따로’라는 옛말이니 닫집은 ‘따로 지은 집’ 정도의 의미가 된다. 닫집의 기원으론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산개(傘蓋 주인공 머리 위에 있는 양산)’나 인도에서 신상 위에 항상 천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보개(寶蓋)’를 꼽을 수 있다. 

서양에서 우리 동양의 닫집과 유사한 것이 있는데 바로 발다키노(Baldacchino, 천개天蓋)다. 바티칸의 성베드로대성당의 베르니니가 제작한 발다키노가 제일 유명한데, 발다키노 아래에서 교황들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 극락전 닫집은 국보인 만큼 우리나라 현존하는 것 중에서 최고라 할 수 있다. 유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가운데 지붕 좌우로 처마 3개씩을 만들어 놓았다. 처마 아래로는 작은 공포를 덧쌓아 천장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천장 아래로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가운데 황룡을 중심으로 좌우에 하늘을 노니는 비천상을 조각해 놓았다. 황룡은 발을 아래로 내 뻗은 체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천장 아래에서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좌우의 비천상은 황룡 머리 쪽으로 화려하게 옷깃을 흩날리며 날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는데, 황룡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역동적으로 하늘을 나는 모습의 용을 중심으로 비천상으로 장식된 화암사 닫집은 화려하면서도, 예술적 기품과 균형미를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처마의 유려한 곡선과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용의 조화가 살아있는 듯 느껴진다. 부처님 머리 위에서 누가 부처님을 해할까 봐 여의주를 가진 황룡 한 마리가 무서운 기세로 꿈틀거리고 있고 그사이 연꽃과 오색구름, 극락조가 노닐고 용 좌우로 한 쌍의 비천이 천의를 휘날리며 하늘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다. 제일 앞쪽에 섬세하게 묘사된 비천은 상서로운 극락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마저 들며 부처님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화암사는 오고 가는 길이 조금 불편하다 할 뿐이지 계곡을 건너고 폭포를 옆에 끼고 올라가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 조금의 ‘땀’이라는 값을 치르고 피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맑은 마음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인현왕후와 함께 한 청암사     

사실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절 대부분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기에 웬만한 절 어딜 가나 땀 정도는 씻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끼가 낄 만큼 협곡으로 둘러싸여 사람이 발길이 잘 닿지 않으면서도 볼거리가 있는 작은 절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두 번째로 소개할 절은 비구니의 수도 도량이 불영산 청암사다. 

김천 증산면에 있는 청암사는 김천 시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아무래도 시내와 멀다 보니 계곡이 좋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물놀이하러 올 만한 곳은 아니어서 절 아랫마을은 식당이 두어 개 정도만 있을 만큼 아주 자그마하다. 

아랫마을에서 청암사까지 걸어서 30분 남짓 걸리기 때문에 자가용보다는 도보로 이동할 것을 권한다. 오래된 나무들이 숲을 이뤄 한여름에도 시원한 나무 그늘로 걸어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길옆으로는 작지만, 계곡물이 흘러내려서 물소리에 상쾌함을 더할 수 있어 좋다. 마을에서 20여 분 걷다 보면 일주문 앞에 다다르게 된다. 큰 절들은 일주문 옆으로 도로가 있어 차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는데, 청암사는 일주문 앞에서 무조건 차를 세워야 하고, 걸어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일주문 뒤로 한 사람 정도 오르내릴 수 있는 반듯한 오솔길이 보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올라가면 나무로 뒤덮여 하늘이 나무 사이로만 보일 정도의 숲길과 더위에 지친 발을 시원하게 해 줄 식혀줄 제법 너른 바위와 계곡물이 보인다. 바쁘지 않다면 계곡물에 발 한 번 담갔다고 올라가도 좋겠다. 예부터 경치가 이름난 곳이었던지 계곡에 있는 큰 바위에는 이곳을 찾았을 법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만의 흔적(?)을 남기고팠던 사람들의 마음이 엿보인다. 

청암사는 통일신라의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조선 중기와 후기에 중창과 중건(인조 25년, 정조 6년)을 거듭하였고 1897년 고종 34년에 폐사되었다. 1900년에 극락전과 보광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40년대 정법루와 1976년 사천왕문을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창과 중건 그리고 폐사까지. 청암사의 역사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대웅전과 다층석탑, 보광전이 남아있다. 

대웅전은 2단의 석축 기단 위에 정면 3칸과 측면 3칸으로 지었는데, 겹처마 팔작지붕 위에는 청기와 얹었고 용마루 양쪽 끝은 용머리로 장식했다. 청기와는 보광전에도 얹었는데 조선시대에도 그랬지만 청기와 비용이 만만찮다. 청암사에서 값비싼 청기와를 올렸다는 것에서 청암사의 재력을 알 수 있다. 

청암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에는 선정인(부처가 수행할 때 선정(禪定)에 들었음을 상징하는 수인)을 하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석가모니불 한 분만이 단출하게 모셔져 있다. 화암사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대웅전 석가모니불 위에도 보궁형 닫집으로 만들어놓긴 했는데 헛기둥은 보이지 않는다. 대웅전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가 그려져 있는데, 항마촉지인(석가모니가 악마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을 하는 석가모니불을 커다랗게 그리고 좌우로 협시보살인 보현보살(연꽃 온갖 종이)과 문수보살(여의 온갖 종이)을 그려놓았다. 탱화의 맨 아래에는 사천왕이 석가모니불을 호위하고 있다. 선정인 과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를 모시고 그려놓은 것은 아무래도 청암사가 비구니의 수도 도량이기 때문이지 싶다.                                        대웅전 앞에는 4.53m의 다층석탑이 있다. 조선 후기 양식을 하는 탑으로 1912년 성주의 논바닥에 있던 것을 청암사 주지였던 대운대사가 주워왔다고 한다. 맨 아래 지대석을 두고 2층의 기단 위에 4층 석탑으로 세워놓았다. 기단에 비해 탑신이 가늘어 가냘픈 감을 주는데 거기에 더해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커서 불안정해 보인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4층이었다기보다는 탑 일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이름도 ‘다층석탑’이다) 2층 기단에는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1층 몸돌에는 살짝 오목하게 파서 감실을 만든 다음 사방불을 돋을새김하였다. 연꽃무늬와 사방불의 조형미가 떨어져 멋진 작품이라 볼 수는 없지만, 마치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그림 같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미소를 짓게 하는 편안함을 준다. 

대웅전을 나와 다리를 건너 조금 내려오다 보면 절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민가 모습의 한옥이 나온다. 간혹 절에도 민가가 있긴 하지만 청암사의 한옥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다. 4개의 계단을 올라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과 마주하게 되는데 현판에는 극락전이라 쓰여있다. 극락전은 정면 7칸, 측면 7칸인데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측면의 2칸은 2층 누대를 설치했다. 현재의 극락전은 고종 9년인 1905년에 대운화상이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옛 모습을 따라 중창했을 거로 생각한다.      

그러면 극락전과 같은 민간의 한옥이 청암사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숙종 대에 인현왕후가 폐비가 되었는데, 이때 청암사로 내려와 3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서인으로 삼으며 비망기(備忘記)라는 명령서를 내렸는데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양조(兩朝 성종과 중종대) 의 폐비(廢妃)할 때의 고사(故事)를 보건대, 윤씨(尹氏)가 잘못한 바는 단지 투기(妬忌)에 있었는데, 죄상이 이미 드러나자 성묘(成廟 성종)께서 종사(宗社)를 위해 깊이 근심하고 먼 앞날을 생각하시어 단연코 폐출(廢黜)하셨다. 더욱이 오늘날 민씨는 허물을 지고 범한 것이 윤씨보다 더하고, 윤씨에게 없었던 행동까지 겸하였으며, 선왕(先王선비(先妃)의 하교를 지어 내어 종사에 죄를 얻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아 사제(私第)로 돌려보내니, 종묘에 고하고 교서(敎書)를 반포하며 그 부모의 봉작(封爵)을 빼앗는 등의 일은 한결같이 구례(舊例)에 의하여 즉시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숙종 15년 5월 2일 정유 1번째기사(1689)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인현왕후에 대한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인현왕후는 굉장히 어진 왕비였고 시기 질투가 심한 장희빈에 의해 쫓겨났다고 드라마에서 많이 보았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그렇지 않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보다 허물이 더하’고 ‘선왕과 선비의 하교를 지어’내는 행동도 했다고 한다. 숙종이 쓴 비망기이기 때문에 쫓아내는 처지에서 기록되었다고 볼 수 밖에.                                                     

 어쨌든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었고 이곳 김천 청암사로 내려와 지냈다고 한다. 아무리 폐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왕비였던지라 민간의 한옥을 지어 인현왕후를 모셨다고 하는데 그것이 지금의 극락전이다. 인현왕후는 이곳에 지내면서 자신의 복위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훗날 복위가 되어 궁궐로 들어간 뒤에 감사의 편지와 함께 향과 비녀 등 선물 3가지를 보냈다고 한다. 인현왕후가 보냈다는 편지는 현재 본사인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지금의 극락전은 숙종 대에 지어진 건축물은 아니고 고종 9년인 1905년에 대운화상이 지었던 것을 1993년에 해체보수하였다고 한다. 극락적인 만큼 안에는 돌을 조각한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극락전에는 1781년(정조 5년)에 그린 신중탱화도 모셔져 있었는데 현재는 본사인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신중탱화는 상단과 하단으로 나뉘어볼 수 있는데, 상단에는 제석천과 그 아래 무리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중을 그렸다. 제석천과 위태천이 함께 그려져 그동안의 도상이 변화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색감이 뛰어나다.

청암사에서 마지막으로 볼 곳은 극락전 바로 옆에 있는 보광전인데, 42수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음보살은 우리나라 불교도가 가장 좋아하는 보살이 아닐까 싶다. 관음보살은 많은 중생의 병과 악업 그리고 큰 죄를 없애주기도 하고, 모든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는 보살이다. 많은 중생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손과 눈이 많아야 한다. 그래서 관음보살을 ‘천수천안관음보살’이라 하고,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모두 표현할 수 없어서 보통 ‘42수 관음보살’과 ‘십일면관음보살’로 만든다. (여기에서‘천(千)’은 ‘많다’라는 의미다.)      

계절이 주는 선물     

화암사와 청암사는 그리 유명한 절은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동지들 대부분이 처음 들어보지 않을까 싶다. (물론 화암사에 우리나라 유일의 하앙구조 건물인 극락전이 있고, 청암사는 승가대학으로서 교세가 만만치 않은 절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명하지 않아서 좋은 곳들이 있다. 또 계절이 주는 선물이 있다. 여름은 우리에게 더위라는 고통을 주지만 다른 한 편으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갔을 때의 그 찌릿찌릿함과 큰 나무 그늘에 돗자리 깔고 앉아 부채를 부치면서 수박 한 입 베어먹는 소소한 일상을 즐거움으로 선물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름은 방학이 있으니까! 사람들 붐비는 휴양지에서 보내는 것도, 맛집 찾아다니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여행도 좋겠지만 올여름은 화암사와 청암사같은 곳에서 고요한 평안을 느껴보면 어떨까. 찾아가는 길은 덥고 힘들지라도 시원한 바람이 분명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내려오는 길에 계곡물에 발도 담그고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한 학기 동안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씻어냈으면 싶다. 그래야 또 힘찬 2학기를 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도 이번 방학 때는 더더더 멋진 곳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보려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라는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 특별전을 열고 있다. 특별전 이름이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기증이라 하지만 조 단위의 세금을 감면받았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토기와 도자기, 목가구, 조각, 조선 회화, 서양화, 현대미술 등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뛰어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좋은 작품들이 많이 했지만, 리움의 전시관에 들어서면 정말 ‘와~~~’를 연발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삼성가에서 모은 예술품은 최고 중의 최고라 할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은 삼성가에서 모아온 작품과 더불어 광주시립미술관, 박수근미술관 등에서도 좋은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출품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 제주도 동자석(무덤 주인의 영혼을 위로하고 수호한다.), 백자 청화 산수 무늬 병, 권진규 손 등이 있다. 8월 28일까지 전시가 진행되니 아직 보지 못한 동지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꼭!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매달 1개월 전 월요일에 표를 예매할 수 있다. 

■ 참고

1.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1, 돌베개, 2006

2. 최광진, 기교 너머의 아름다움, 현암사, 2021

3. 탁현규, 아름다운 우리 절을 걷다, 지식서재, 2021

4. 국립중앙박물관,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시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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