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본리세거지, 도동서원, 양진당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일본 근대문학에서 가장 명문장으로 꼽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이다. 2022년 3월 여전히 코로나는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우리 반에서도 매일 한두 명의 어린이들이 돌아가며 확진이 되었다. 3월 첫 주를 보냈을 뿐인데 방역과 교실살이에 치여 방학내 축적했던 에너지가 한순간에 빠져나가 버린 듯 했다. 새봄의 생기를 찾아야 했다. 새봄이면 언제나 매화가 떠올랐고, 올봄에는 특히 꼭 보고 싶었다. 그렇게 매화를 찾아 길을 나선 토요일 아침, 느닷없이 함박눈이 내렸다. 3월 봄에 눈이라니, 그야말로 ‘눈의 고장’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고속도로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봄의 고장으로 가는 길 자체가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봄의 고장, 대구를 찾았다.
대구‘남평문씨본리세거지’. 마을 입구부터 매화가 몽글몽글 피어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매화를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설경을 지나 만난 꽃들이라 그 자체가 황홀했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는 문익점의 18대손인 문경호가 1840년을 전후하여 터를 닦고 ‘남평 문씨’들이 모여 세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로 현재는 기와집 70여 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다. 마을의 첫 시작은 초가집이었던 탓에 현재 남아 있는 기와집들은 200년 미만의 그리 오래된 건물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영남지방의 양반집 형태를 띠고 있다. 기와집들 사이로는 조금은 높은 어른 키 정도의 흙과 돌로 쌓은 담장들이 둘러쳐져 있는데 아늑함을 느끼며 걷기에 좋다. 또 담장 위로 조금씩 보이는 매화가 마을의 아름다움을 더해서 봄의 생기를 느끼기에는 아주 좋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 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한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거당 그리고 인수문고를 들 수 있다. 수봉정사는 세거지 입구에 있는 정자로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꾸민 곳이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거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 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 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된 옛 마을이다. 수봉정사와 광거당은 아쉽게도 코로나19로 출입이 제한되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담장 너머로 살짝살짝 보이는 공간만으로도 한옥이 담고 있는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직접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수봉정사 앞으로는 목화밭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아무래도 문익점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목화밭을 자연스레 일궈놓았겠지. 떨어진 목화를 조금 주워가지도 와서 반 어린이들에게 보여주니 매우 신기해하였다. 흔히 ‘매화’ 하면 광양이나 하동을 꼽지만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서는 한옥 마을이 주는 사람 사는 생기와 매화의 생기를 함께 느낄 수 있어 색다른 꽃 구경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수봉정사는 1936년 수봉 문영박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기리고 후손들의 교육 장소로 지은 곳이라 한다. 문영박은 1880년에 태어나 1930년까지 살았는데 별세하기 직전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지속적으로 보냈다고 한다. 1930년 문영박이 죽었을 때 임시정부에서는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이교재(李敎載)를 보내 추도문을 전달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 이교재의 집 천장에서 발견되어 후손에게 전달되었고,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일제강점기 이 정도의 집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국가를 위한 헌신이 먼저였다는 것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수봉정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은 툇마루를 꼽는다. 우리나라에서 여름철 더위 하면 손에 꼽히는 곳이 바로 대구인데, 수봉정사의 툇마루를 보고 있자면 여름철 더위가 왔는지도 모르게 지나갈 듯 싶다. 가운데 방을 둘러싸고 있는 툇마루는 앞뒷면을 모두 합치면 방 크기 정도가 될 듯 싶은데 한옥의 장점인 문을 위로 걸어올리면 자연스럽게 바람이 통해 더운 여름에도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낙동강을 따라 도동서원(道東書院)으로
두 번째 답사지로‘남평문씨본리세거지’를 나와 40여 분 정도를 낙동강 줄기 따라 달려 도동서원에 갔다.
도동서원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시작은 김굉필 사후인 1568년 사우(祠宇)를 지어 제사를 지내오다 1573년 쌍계서원으로 사액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이후 김굉필 선생의 외손인 한강 정구 선생을 중심으로 현재의 자리에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을 세웠고 선조 40년인 1607년에 ‘도동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김굉필(金宏弼)은 충신(忠信)하고 독행(篤行)하여 학문으로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근본으로 삼을 뿐, 급급히 진출을 구하지 아니하니, 그 입심(立心)의 바름과 제행(制行)의 높음을 옛사람 가운데서 찾아야 하겠다.
연산군일기, 연산 4년 8월 16일(1498년)
김굉필 선생은 김종직의 제자로 고려말 백이정과 안향에게 시작한 사림의 학맥을 이었다. 1480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494년 남부참봉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1496년에 형조좌랑까지 올랐지만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의 제자로 붕당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로 귀양을 갔다. 김굉필 선생은 유배지에서도 후진양성과 학문에 힘써 중종 대에 활약한 조광조를 사사하기도 했다. 1498년 일어난 갑자사화 때 김굉필은 유배지에서 효수되었다. 김굉필 선생은 중종 대에 우의정으로 추증되었고 광해군 대에는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모셔졌다. 이황은 김굉필 선생에 대해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 부르며 수신(修身)을 통한 실천적 의리 학문 즉 도학(道學)을 추구한 인물로 평가했다. 이런 김굉필 선생에 대한 평가로 도동서원(道東書院)이란 이름은 공자의 도가 동쪽(김굉필)으로 왔다 하여 ‘도동(道東)’이라 붙여졌다 한다.
도동서원에서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400년 된 은행나무다. 우리나라 서원이나 학교에 가면 은행나무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연유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을 기념하여 심었다 한다. 도동서원 은행나무는‘김굉필 나무’라 불리지만 사실 외손인 한강 정구 선생이 심은 것이다. 400년이나 되어서인지 커다란 가지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내려앉았다. 가을날 온다면 노란 은행나무 아래서 멋진 사진 한 장 남길 수 있을 듯싶다.
은행나무를 지나 서원으로 올라가다 보면 정문인 ‘수월루(水月樓)’를 만나게 된다. 수월루는‘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라는 말 즉, 가을 달이 찬 강물을 비춘다.’라는 말에서 따왔다. 그런데 서원으로 처음 조성할 때는 수월루가 없었고 1849년에 지었다고 한다. 수월루를 지나면 좁은 돌계단이 나오는데 좌우로는 화단이 있다. 9개의 계단을 오르면 한 사람 정도만 겨우 (갓을 쓰고 있다면)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환주문이 나온다. 환주문은‘마음의 주인을 찾아 부른다.’라는 뜻이 있는데, 도동서원에서 배워야 할 것이 ‘나(我)’이기 때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환주문은 사모지붕에 단정하게 만들었는데, 한가운데에는 항아리 모양의 특수기와인 절병통을 올려놓았다. 모임지붕은 추녀마루가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절병통은 착고- 부고와 함께 모임지붕을 눌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환주문에서의 절병통은 안이 텅 비어 있는 항아리이다 보니 눌러주는 그것보다는 장식적 역할이 크다 할 수 있다. 절병통이 올라가 있어 환주문이 한층 더 안정되고 아름다워 보인다.
환주문 아래에는 꽃봉오리가 돌조각 되어 있는데, 다른 서원에 비해 도동서원에는 돌조각들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도동서원을 방문할 때면 돌조각들을 찾는 재미도 있다. 환주문 아래의 꽃봉오리 조각, 강학당인 중정당에 가는 돌길에 거북 머리 조각, 중정당의 기단에는 물고기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조각, 기단의 석축 양쪽에는 세호라 불리는 다람쥐 조각과 꽃 조각, 중정당에서 사당으로 가는 돌계단에는 꽃문양, 태극 문양 등이 새겨져 있는데 양 머리 조각도 함께 있다.
도동서원에 있는 돌조각들을 각각의 의미를 담고 조각되었을 텐데 정확한 이유가 담겨 있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는다. 꽃봉오리는 학문적 성취를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고, 거북 머리는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산-건강-장수와 더불어 힘과 인내를 상징하기도 한다. 학업과 자신의 삶에서 인내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계단 사이의 용머리는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고 계단 밖의 용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용은 선비에게서는 입신양명(등용문 登龍門)을 상징하고, 건물에서는 물을 다스리는 의미를 가지고도 있다. 서원 앞으로 낙동강이 있어서 범람하지 말라는 의미가 더 담겨 있지 않았을까. 세호는 대표적으로 왕릉 앞에 있는 망주석에 새겨 놓는 것으로 작은 호랑이를 의미한다. 세호가 상징하는 바는 정확하지 않은데 무덤이나 건물을 지키는 의미로 새겨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양은 유교에서 제사 때 쓰이는 대표적인 희생제물이다. 음력 2월과 8월에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때 양 머리를 사용한다. 동양에서 일찍이 양은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졌는데 정직과 정의, 선량함을 상징한다.
환주문으로 서원에 들어가게 되면 강학당에 오르기 전에 꼭 보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원을 감싸고 있는 담장이고, 다른 하나는 중정당의 기단이다. 환주문을 중심으로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장 제일 밑은 돌로 몇 줄을 쌓아 올린 다음 황토와 암키와를 번갈아 가며 쌓아 올렸다. 그리고 군데군데 1미터 간격으로 수막새를 박아놓았다. 황토와 암키와 그리고 담장에 박아놓은 수막새의 조화가 생경하여 투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리듬감도 느껴지고, 나지막한 담장이 서원을 아늑하게 감싸주는 듯하여 편안함도 더해준다.
담장을 둘러보았다면 이젠 중정당을 바라보자. 어딘가 조금 다르게 보이는 중정당의 기단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우리나라 건축물에서 흔히 사용하던 화강암으로 줄을 맞춰 반듯하게 쌓은 것이 아니라 사임 계열의 돌을 사용했으며 제각각으로 허튼층쌓기를 했다. 부러 좋은 돌을 구해와서 모양을 깎고 다듬어 만들기보다 서원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돌들을 모아 쌓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도동서원만의 소박한 멋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마침 내린 봄비로 젖은 돌들이 저마다 다른 색깔을 띠어 더욱 운치 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중정당의 ‘중정(中正)’은 음양의 조화에 있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중용의 상태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서원 강학당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이뤄져 조금도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다. 수월루에 중정당에 이루는 돌길을 기준으로 중정당 좌우로 계단을 설치했고, 가운데 3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한 칸 반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한옥에서는 보를 어떻게 올려놓느냐에 따라 민도리집과 익공집 그리고 포집으로 구분되는데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은 강학당을 가장 단출한 납도리 양식으로 하였다면 중정당은 주심포 양식으로 지붕을 받치고 있다. 조금(?) 멋을 부렸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멋이 과해 보이지 않는 건 무심한 듯 올린 맞배지붕 때문이다. 멋이라곤 일도 없는 맞배지붕과 기둥 위를 화려하게 장식한 공포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중정당의 멋을 만들었다.
중정당 앞 기단 위에는 육각기둥 위에 사각형의 평평한 돌판이 올라가 있는 정료대가 있다. 사찰의 전각 앞에는 불을 밝히기 위한 석등이 있다면, 서원에는 마당을 밝히기 위한 정료대가 있다. 정료대는 관솔이란 소나무의 사지를 자른 부분의 끝에 송진이 묻어 있는 부분을 태우는데 기름기가 엉켜있기 때문에 불이 잘 붙고 오래 타며 불길이 세다고 한다. 그래서 관솔대라고도 한다. 서원마다 정료대의 모양과 위치는 조금씩 다르다.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은 강학당 기단 아래에 원형 돌판으로 정료대를 만들었다.
중정당 오른쪽으로 돌아가다 보면 버섯 모양의 작은 돌판을 보게 된다. 생단이라고 하는데, 제사 지낼 때 쓸 가축을 메워두었던 용도를 쓰였다. 서원은 단순히 교육 기관이 아니라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그 절차와 예법이 일반 사가에서 드리는 그것보다 엄격하다 할 수 있다.
중정당 뒤로 돌아가면 사당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만나게 된다. 서원을 건축할 때는 <주자가례>에 따라 강학당 오른편에 사당을 짓게 되어 있는데 도동서원은 중정당 바로 뒤에 사당이 있다. 수월루에서 시작한 직선의 축은 환주문과 중정당을 지나 사당까지 이어져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삶 모두를 따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도동서원의 건축 구성과 배치는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 가장 규범을 공간 구성을 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월루에서 사당까지 중심축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좌우대칭으로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런 대칭성은 도동서원뿐 아니라 우리나라 유교와 관련된 대부분 건물이 그러하지만 도동서원만큼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당까지 올랐다가 되돌아 나올 때는 이러한 도동서원이 가진 건축적 미학을 바라본다면 더 좋겠다.
이상한(?) 이층집 양진당
대구까지 내려온 김에 한 곳을 더 들르기로 했다. 도동서원에서 나와 1시 40여 분 북쪽으로 고속도로와 국도를 달리면 ‘상주 양진당’에 다다르게 된다. 양진당 하면 하회마을이 유명하여서 ‘상주’를 내비게이션에서 확인하는 것도 잊지 말자.
양진당을 건축한 사람은 검간 조정이다. 검간 조정은 풍양 조씨 사람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여 외가가 있는 이곳 상주에서 성장했다. 검감 조정은 서애 류성룡의 제자로 18세에 성주 목사인 약봉 김극일의 사위가 되었는데, 약봉의 동생이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이다. 검간 조정은 퇴계학파의 학맥을 이은 명문가의 자제가 되었으나, 학문이 그리 뛰어나진 못해 정계에 진출하진 못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검간은 상주에서 가장 먼저 의병 활동을 시작했고 그 공으로 임진왜란 후 46세에 관직에 나가 73세에 지금의 조달청장에 해당하는 봉사시정까지 올랐다.(임진왜란 중에 군수물자를 탁월하게 조달하였다고 한다.) 검간이 양진당을 지을 때 안동에서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처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재산 상속에 있어 자녀 균분상속을 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검간에게 처가의 재산이 옮겨왔다.
검간이 노년에 정성을 들여 지은 양진당 답사를 위해서는 문간채는 우선 과감히 생략하고 안채로 들어가자! (양진당 문간채는 1966년 대홍수에 유실되었던 것을 2004년 복원했다고 하는데 복원 공사 당시 고증이 명확하지 않았다고 한다) 옛 양진당을 완벽하게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진짜(?) 양진당은 안채를 중심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문간채로 들어가면 바로 커다란 마당과 안채가 보이는데 중층 구조로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정면 9칸과 측면 6칸으로 지어졌다. 정면의 9칸은 부엌이 2칸, 방이 3칸, 강당 마루 3칸, 방 1칸이 모두 앞뒤로 포개져 있어 양통집 구조를 하고 있으며 실제 규모는 2배로 보면 된다. 정면은 완벽한 중층은 아니고 1.5층 정도 된다. 좌우에 붙어 있는 건물을 익사라 하는데, 양익사는 1층엔 창고 2층엔 고방이 있는 완벽한 2층 구조이다.
양진당의 안채를 처음 보았을 땐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건물 구조라 놀라게 될 것이다. 흥분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이곳저곳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는데, 보다 보니 집 구석구석을 다 보려면 신발을 벗고 신었다 해야 하고, 문도 여닫고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우선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면이나 우익사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 툇마루를 따라 걸어야만 방안이나 강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고방도 바로 갈 수 없고 정면이나 측면의 방으로 들어가야만 고방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물론 양진당의 중층 구조는 남방식 가옥의 특징으로 여름철 땅의 열을 덜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낙동강의 범람에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양진당은 북방식 가옥의 특징도 담고 있다. 정면의 방이 두 줄로 배치된 겹집 구조인데, 앞방은 누각형이고 뒷방은 일반형으로 모두 온돌을 깔아 놓았다. 겹집 구조와 온돌로 한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양진당의 이러한 건축 양식은 다양성이란 점에서는 귀한 연구자료가 된다.
하지만 살림집으로 물음표를 달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불편한 게 한 두 가지 아니다. 게다가 족히 50명은 들어갈 수 있을 법한 강당에서 보면 흡사 서원이나 관청 같다는 느낌에 위축되었다. 주변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그런 우리 건축의 기능적 배치와 미학이 빠진 채 덩치 큰 커다란 건물이 위압적으로 서 있구나, 싶었다.
건축가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에서‘집은 집답게, 학교는 학교답게, 교회는 교회답게’라는 말로 건축의 합목적성에의 추구를 말하고 있다. 승효상의 말처럼 우리에게 ‘집’은 어때야 할까, 양진당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든 생각이었다.
다시 설국의 고장으로
상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점심을 때우기 위해 속리산 휴게소에 들렀다. 차에서 내리니 눈으로 덮인 속리산의 풍경에 꿈을 꾸고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시 설국이다. 하루의 고된 답사에 뱃가죽은 등에 척하니 붙어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정신만은 맑고 생기가 넘쳤다. 답사가 주는 선물은 이렇듯 생생하다. 특히나 매화와 봄비로 만난 남쪽 지방의 봄은 코로나로 지친 3월의 내게 ‘생기’를 불러일으키기 충만했다. 두 발로 걷고 직접 만져보며, 같이 호흡하며 마주하는 것이 주는 기쁨이리라. 아름다운 우리나라 국가유산앞에 감탄하기도 하고, 아주 때때로는 실망하기도 하며 그럼에도 일상을 떠나 낯섦과 마주하는 기쁨과 설레는 그 마음이 즐겁다. 그 속에서 우리는‘생기’를 느낀다. 결코 비대면 만남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코로나로 절실히 경험했다.
자, 이제 코로나19라는 설국의 시간도 끝나가는 듯하다. 그동안 꼭꼭 감추어두어야 했던 여행의 갈증을 맘껏 누리시라. 우리 안의 생기를 회복하는 그런 시간이 저기에서 달려오고 있다.
■ 참고
1. 이종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Jinhan M&B, 2019
2. 김희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 미술문화, 2019
3.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2, 돌베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