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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회 Feb 02. 2021

24. 지키고 싶은

너를 강하고 책임감 있게 만들 무엇

김 조카는 잘 생겼다. 큰 키는 아니지만 178센티미터에 80킬로그램으로, 몸도 건장해 보인다. PT를 한 후 몸이 더 좋아지고 있다. 피부도 좋다. 후원자로 처음 만난 날 봤던, 잡티 하나 없이 뽀송뽀송한 피부는 단지 어려서 좋은 게 아니었다. 뭘 바르지 않아도 뽀얗고 탱탱한 피부를 가졌다.


“삼촌 저는 피부가 참 좋은 것 같아요.”하고 나한테 종종 자랑을 한다. 자기가 괜찮은 피를 타고난 것 같다고도 한다. 그러면 나도 우리 식구들은 원래 피부가 좋다고, 삼촌이 어릴 때 소개팅 나가면 여자들이 만나자마자 “아! 피부!!”라고 얘기했다고 한술 더 뜬다. 물론 조카랑 나랑 피 한 방울 섞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조카도 내 가족이니 ‘가족의 전통(?)’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조카에게 호감을 보내는 여자 아이들이 좀 있는 듯하다.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소개받은 다른 학교 여학생이 있었다. 귀엽게 생기고 김 조카를 잘 따르는 것 같아, 한 번 만나보라 했는데 녀석은 귀찮아했다. 보육원에 친여동생처럼 생각하는 아이가 있다며 후원해주면 안 되겠냐고 물은 적도 있다. 그래서 너한테 좋고 그 아이가 원한다면 해주겠다며 어떤 아이인지 물었다.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왔는데, 정말 딱 모범생처럼 착하게 생긴 아이였다. 밤늦게  종종 전화도 하기에 여동생 이상의 감정이 아닐까 조용히 지켜봤지만, 조카가 이성으로 그 아이를 바라본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에도 몇몇 여자아이랑 만나고 연락하는 게 보였지만, 적당히 견제구만 던지다가 그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저는 여자 친구를 못 만들 것 같아요.”나 “사랑 같은 건 평생 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는 등의 극단적이고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내 가장 오랜 친구 얘기를 해줬다.     


< 판타지 작가인 삼촌의 가장 오래된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자신을 독신주의자라고 하고 다녔는데, 고등학생 때 자기 글의 팬이라는 사람과 만났다가 사랑에 빠졌단다. 물론 전혀 그럴 맘이 없었고 당연히 팬도 남자일 줄 알았는데, 만나러 나온 사람이 참한 소녀였지.

그 여자아이의 부모가 해외에서 오래 체류하는 직업이라 부모를 따라 추운 나라도 떠나 버렸지만, 둘은 한 동안은 메일 등으로 연락을 했어. 결국 연락을 할 수 없게 되었던 시점도 서로의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라, 여자아이는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나 버렸을 때였지. 너무 먼 곳. 돌아올 수 없는 그곳.

친구는 자신에게 그런 사랑이 찾아올 줄 몰랐고, 그건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이제 친구는 자신을 독신주의자라고 하지 않아. >


아직 한참 만나고 사랑할 나이인데 단정적으로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사랑이나 운명 등으로 표현되는 설레는 감정들은 내가 원하든 원지 않든,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모른다고.    


 

괜찮은 아이들도 주변에 있는 듯한데 너무 썸만 타는 것 같아서 한 번 만나보는 건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조카는 여자아이들은 대하기가 어렵다며, 사귀면 책임져야 할 게 많고 자신이나 상대방이 상처 입을 것을 걱정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조카가 자신의 출생 때문에 이성과 거리를 두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랑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어떤 무책임한 감정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고통받은 김 조카니까. 자신이 누군가를 책임진 다는 것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낳은 사람들처럼 무책임한 사랑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내 마음도 무거워졌다.     


조카는 썸을 타는 순간이 가장 설레고 재미있다고도 했다. 물론 나도 일부 동의하는 바였지만, 때론 싸우고 서로에 대하여 맞추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도 있는 거라고 했다. 라면이 맛있다고 주식(主食)으로 하면 건강을 망치듯, 썸만 타겠다는 건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감정만 섭취하겠다는 거라서 정신건강에는 안 좋다고 했다. 음식을 편식하듯 감정마저 편식하려 들지 말라고.      



조카의 생일이 1월이라 친구들과 만남이 잦았다. 한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이 소고기를 20여만 원 어치나 사줬다고 했다. 저녁 한 끼에 20여 만원을 쓰는 건 직장인인 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라, 여자아이가 조카에게 호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감정을 이용하면 안 된다고, 혹여나 여자애들의 감정을 알면서 썸만 타며 얻어먹는 짓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그러자 조카는 “와! 삼촌 저 그렇게 인간쓰레기는 아니에요.”하며 반발했다. 녀석의 격한 반응이 웃겼다.    


어느 날 자기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한 아이에게 얘기했다고 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얘기한 적이 없었던지라 어떤 아이인지 궁금했는데, 소고기를 사준 여자 아이였다. 코로나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힘든 이 시기에 아르바이트도 주선해 준 것도 그 아이였다. 괜히 재미 삼아 감정을 찔러보면 안 될 것 같아, 가만히 지켜봤다.     


조카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졌다. 방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요새 밤에 누구랑 늦게까지 통화하더라?”하고 물었더니, 또 그 아이였다.  부모 때문에 속상하다고 울더란다. 무능력한 부모탓에 대학을 합격했지만 바로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하고 있다고 했다. 어린 동생들 걱정에 독립도 못하고 알바로 생활비를 보태는, 사실상 소녀가장이었다.


가족이라는 게 밉다고 쉽게 등지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족 중에 사고를 치거나 무능력한 사람이 있다면 다른 가족들이 오래도록 힘들다고 조카에게 설명했다. 너도 자라오면서 많이 힘들었겠지만 최소한 삼촌은 네 앞길을 막는 사람은 아니니, 현재는 그 아이보다 네 상황이 나을 거라고 했다. 동생들 때문에 집을 뛰쳐나오지도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가 안타깝다고도 했다.     



그런 아이한테 소고기를 그렇게 많이 얻어먹었냐며 조카를 나무랐다. 그 아이가 돈을 안 쓰게 네가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많이 사주라고 했다. 나로선 ‘그 아이를 지켜줘라.’는 표현하고 싶었지만, 완곡하게 ‘그 아이가 돈을 쓰게 하지 말아라.’로 바꾼 것이었다. 조카는 자기가 밥을 사줘도 그 아이가 토스(toss, 송금 결제 어플)로 밥값을 송금해 버려서 소용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인데도 신세 지지 않으려는 모습이 가상하게 여겨졌다.     


지키고 싶은 게 생기면 인간은 강해진다. 그래서 대개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온갖 수모를 참아 내고, 제 몸이 아프더라도 자식을 먼저 챙긴다. 좋아하는 이성이 생긴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호받는 데만 익숙하던 너에게도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기길 바란다. 독립심 강한 이 아이가 네가 지키고 싶은 첫 번째 사람이 되면 어떨까 기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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