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스포 후기
인생 영화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감명 깊게 본 영화나, 책, 드라마, 혹은 맛있게 먹었던 맛집들 앞에 ‘인생’ 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단어를 자기가 보고 듣고 맛본 것들 앞에 붙이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인생에서 느껴본 가장 최고의 것이라는 뜻이니까. 다만 내가 그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고 경계하려는 이유는 인생에 최고를 정하는 시점이 너무 이른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최고를 단정 짓기엔 아직 우리는 젊다. 졸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내게도 인생 영화가 있다. 물론 앞서 말한 인생과는 조금 구별되는 표현이다. 인생에 최고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인생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인생과 너무 잘 맞다는 뜻이다. 내 인생과 내 상황을 너무나도 잘 대변해준다거나 내 생각과 너무 똑같아서 ‘이 영화 딱 지금의 나잖아?’ 하고 생각이 드는 영화. 그리고 그 영화를 통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인생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거나 지금의 내 인생을 위로 해주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누군가는 그게 그거 아니야? 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결국 남들이 말하는 그런 인생 영화잖아 라고 말이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결국 나와 비슷한 이유까지 포함해서 인생영화를 꼽을 테니까. 하지만 난 그 경계를 좀 더 명확하게 구별하고 싶다. 지금의 내 인생을 위로해준다고 내 생애 최고의 영화는 아니다. 진정한 인생 영화는 눈을 감는 직전에 정하고 싶다. 내 생애 최고의 영화는 내 장례식장에서도 틀어 놓을 만한 그런 영화여야 한다. 그때까지는 아직 봐야할 영화들이 남아있다. <아바타3> 도 봐야하고 <듄2> 도 봐야한다고.
그리고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세 문단이나 할애한 이유를 밝힌다. 최근 앞서 설명한 인생 영화를 기준으로 나는 내 인생 영화를 갱신하게 되었다. 요즈음 내 인생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그 고민에 대한 위로를 이 영화가 조금은 해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다. 얼마 전 개봉하여 많은 논란을 빚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그 주인공이다.
나는 이 영화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개발한 원자폭탄이 빵빵 터지는 영화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삶과 고뇌, 그리고 그를 둘러싼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원자폭탄은 그저 그 장치 중 하나다. 이 지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전 내가 했던 생각처럼 놀란 표 아날로그 연출과 스펙터클한 장면을 기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영화는 3시간 내내 수 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기대한 모습대로 영화가 전개되진 않았지만 <오펜하이머>는 내 인생 영화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꽤나 자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원자폭탄의 아버지' 라는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하고 복합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인간이 겪는 수 많은 시대의 시련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 모습이 내게 참 위로가 됐다. 나는 요즘 내가 가진 다양한 모습들과 자아로 인해 힘들어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들로 많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고민을 하기도 한다. 시련을 이겨내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에서 해답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위로는 조금 되었다. 노벨상을 받을 만큼 한 분야에 정통하고 인류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이룬 인간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 고민과 오펜하이머가 했던 고민은 당연히 비슷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것이 더 크고 내 것이 더 작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간이라도 책 종이에 손을 베이면 손에 피를 빨며 아파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와 나는 노벨상을 논하기 전에 인간이라는 더 큰 전제의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공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제 발이 저려 미리 밝혀 둔다.
유대계 미국인이면서 이론 물리학자이고 한 때 공산당 활동을 했던 오펜하이머 처럼 내게도 여러 수식어가 있다. 사실 이건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나는 한 회사의 인사팀 직원이고 주를 따르는 크리스천이며 친구들 사이에선 놀기 좋아하는 망나니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사회적 역할과 지위가 섞여 '나' 라는 인간을 구성한다. 때때로 그런 역할과 지위가 서로 상반되어 모순적인 행동을 하는 나를 본다. 그때마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곤 자책하게 된다. 진짜 나는 누굴까? 나는 왜 이렇게 모순적인 사람일까?
오펜하이머도 이런 고민들로 스스로를 자책했을까?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 나오진 않는다. 오히려 시종일관 그가 했던 생각과 행동과 발언들에 대해 꽤나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공산당 활동을 했던 것, 친구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것,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한 것, 그리고 국가를 위해 평생을 바쳐 무기를 개발한 것들을 부정하지 않고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비록 시대가 그 행동들을 시대 이념에 맞춰 비판하고 비난해도 말이다. 그의 그런 복합적인 생각과 복잡한 인생이 좋았다. 그도 분명 그 모든 행동들을 본인의 판단에 의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굉장히 많은 역할과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예배당에 앉아 울부짖으며 주님을 찾을 때도,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시면서 음담패설을 하며 놀 때도, 회사의 중요한 회의에서 내가 준비한 보고서를 막힘 없이 발표할 때도 그 모든 모습 중에서 내가 아닌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 하지만 때때로 그 행동들의 간극이 나를 괴롭게 할 뿐이다. 어쩌면 나와는 다르게 초연하게 행동하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이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복잡한 인간인 것이 내가 가진 원죄가 아니라 인간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말해주는 놀란의 메시지에 힘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게 <오펜하이머>가 지금 내 인생에 인생 영화가 된 이유다.
한 동안은 인생 영화가 바뀌진 않을 것 같다. 내 인생의 고민이 바뀌거나 <오펜하이머>보다 내 고민들을 어루만져줄 영화가 나오지 않는 한 말이다. 오펜하이머의 고민과 오해도 그가 죽은 지 5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풀렸다. 과연 나에 대한 평가와 오해도 풀릴까? 내가 죽은 뒤에 라도 풀릴 수 있을까? 굳이 풀리지 않아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내 뜻을 대신 전해 줄 <오펜하이머>라는 영화가 남아있으니까. 굳이 풀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