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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식 Sep 15. 2023

내 몸에서 뭔가를 뺀다는 기분

내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우린 이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앓는 대부분의 질병이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고 우린 그걸 없애기 위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생이 있으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그 사이엔 늘 질병이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직장인, 학생, 여자, 남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렇다. 모두 스트레스와 지지고 볶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이러니 하게도 스트레스는 우리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게 해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우리는 스트레스와 함께 산다.


그래서 우린 각자의 방법으로 그걸 해소하려 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그걸 없애는 방법에도 개인차가 존재한다. 누군가는 드라이브, 매운 음식 먹기, 음악을 듣기 등을 하며 해소하려 한다. 각자의 방법이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을 일반화하긴 어렵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를 채워 넣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내 안에 가득차 있는 부정적 에너지를 긍정의 에너지로 덮는 방법이다. 드라이브를 해서 좋은 기운을 얻는것도, 매운 음식을 채우고 음악을 주입하는 것도 모두 그렇다.


나 또한 내 안에 뭔가를 채워 넣으며 스트레스를 없애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내게 스트레스는 대부분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 로 부터 오는 편이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 지하철에서 만난 다른 승객들로부터 말이다. 말하자면 ‘inevitable’ 한 상황들이다. 불가피하게 생기지만 어쩔 수 없는 것.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상황들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나는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내가 선택한 상황들을 만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대화를 밀어넣고 입 속엔 짜고 자극적인 음식들을 채워댔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스트레스가 겹겹이 쌓여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말이다.


그땐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스트레스는 감쪽같이 숨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치아 사이 칫솔모가 닿지 않는 부분에 낀 음식물이 충치를 만들어 대듯, 눈에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는 늘 예상치 못하게 더 크게 다가왔다. 무언가를 주입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보이지 않게 문제를 덮는 꼴이다. 잠깐은 즐겁지만 근원적인 해소 방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트레스는 뭔가를 채워서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꾸만 빼내야 그것이 없어진다. 이는 스트레스가 가진 기본 속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트레스가 발생될 때 흔히들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등의 말을 한다. 스트레스는 기본적으로 몸속에 축적이 되는 (+)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완전히 없애려면 (-)의 속성을 가진 행위들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 자꾸 뭔가를 채우려 하지 않고 뭔가를 빼는 행위를 찾았다. 더 나아가 분출의 욕망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몸에서 무언가 분출 될 때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카타르시스에 대해서 말하려면 먼저 내가 문학을 배우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문학 선생님은 학생들이 수업중에 화장실을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생 누군가 손을 들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하면 오히려 교실 뒤편에 나가 서 있어야 하는 벌을 내렸다. 그러다 학생들이 정말 못참겠다고 항의를 하면 줄곧 이런 말을 했다.


수업시간 얼마 안남았으니까 참고 쉬는 시간에 볼일 보거라. 끝까지 참고 마지막 순간에 볼일을 볼 때, 그때라야 느껴지는게 바로 카타르시스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생들의 인권이 처참히 짓밟히는 교육 현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선생님이야 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했던 비극 해소의 정서적 쾌감을 몸소 실천하게 해준 참 교육자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농담이다. 아무튼 나는 그 선생님을 통해 카타르시스 라는 그 개념을 정확하게 체득했다. 그리고 그 개념은 우리 몸에서 스트레스를 해소 할때도 적용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해소 하기 위해서 분출 욕망을 지속적으로 표출하면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곧 스트레스의 완전한 해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방법을 택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선택한 분출 행위을 지속한다.


하나는 육체적 분출을 위한 운동이다. 운동은 사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하는 방법이라 나만의 방법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하지만 나는 운동을 말 그대로 분출을 위한 행위로만 지향하고 있어서 단지 건강이나 근성장을 위한 운동과는 조금은 구별 될 수 있다. 운동으로 배출 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땀이다. 우리의 몸이 대부분 수분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몸에서 땀을 분출할때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종종 땀을 내기 위한 운동을 한다.


땀을 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신발 끈을 질끈 묶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리기 만큼 가장 정직하고 빠르게 땀을 낼 수 있는 운동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치지 않게 달리기 위해서 신발끈을 잘 묶어야 한다. 그리곤 20분을 내리 달린다. 러닝머신 위든 보라매공원 트랙이든 상관없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보면 온 몸에 땀 구멍이 열려 옷이 젖기 시작한다. 땀이 티셔츠를 너머 바지 까지 적시게 되면 내 몸에서 더이상 빠질 것이 없게 느껴진다. 그때 즈음이면 스트레스가 빠지는 기분이 든다. 그때라야 비로소 스트레스가 해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오줌보가 터질 때까지 참고 참다 화장실을 가던 때와 비슷했다. 땀 배출로 느끼는 카타르시스 인 것이다.


나는 정서적 분출을 통해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정서적 분출은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와 감정을 모두 쏟아내는 것이다. 언젠가 물건을 마구 때려 부수면서 감정 해소를 하는 방이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보단 조금 정적인 방법으로 정서적 분출을 한다. 바로 글을 쓰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도 이미 많은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또한 기록이나 메모의 목적이 아니라 배출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방법과는 조금은 구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글을 배설한다.


정서적 분출을 위한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배설’이다. 어떠한 생각이나 고민 따위는 제쳐두고 온갖 단어와 문장을 배설 하듯 적는다. 혹은 글을 토해낸다는 표현도 괜찮은 것 같다. 비문이어도 상관 없고 욕설만 가득해도 문제는 없다. 더이상 떠오르는 단어가 없을 때 까지 적는다. 그렇게 워드 페이지가 2장을 넘어갈 때 쯤 나는 땀을 빼낼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카타르시스와 함께 스트레스를 날려버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고생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연료를 모두 소모해야 새 연료를 채울 수 있듯이 스트레스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보이지 않게 덮지 말고 빼내 없애는 노력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내 몸에서 뭔가를 빼내는 기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면 스트레스 해소는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두 저 마다의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방법이 또 다른 스트레스를 낳는 것은 아닐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스트레스를 다른 일로 덮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앞서 소개한 나의 방법들이 정답은 아니지만 그런 고민들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에서 스트레스를 완전히 빼내고 행복한 일만 가득 채우고 싶다. 스트레스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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