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초등학교 근처에 갔다가 노란색 유치원복을 입고 시끌벅적 뛰노는 아이들을 봤다.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데서 지내다 보니까 어쩜 그렇게 생기가 넘치는지.
언젠가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집에까지 크게 들리자 시끄럽다고 투덜거렸더니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냅둬. 아이들이 있어야 좋은 동네야.”
이젠 알겠다. 우리 동네에도 아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노랑이들 곁에 있으면 싱그러운 기분이 든다.
아이들이 시끄럽고 떼쓰고 징징댄다고 좋아하지 않았던 건 스물두 살 여름까지였다. 그 여름은 8살부터 13살까지의 아이들과 하루 종일 함께 보냈다. 영어 보조 ‘선생님’이었으나 나부터가 아직 애라서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부족하게나마 사랑을 주면 더한 사랑이 돌아왔다. 그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다. 오래된 친구들은 내가 변했다고 놀랐지만 너희도 같이 있어보면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유치하게 상처를 주고 속 썩이는 일이 생겨도 하나하나 사정을 들여다보았더니 그럴 만했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다. 가끔 아이들이 생각나면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본다. 사진 속 꼬마들에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본연의 귀여움이 있다.
노키즈존 문제까지 가지 않아도, 아이들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시 보게 된다. 오래전엔 나도 곧잘 그렇게 말했지만, 생각해보면 참 무책임한 말이다. 그렇지 않나.
"나는 나이 든 사람이 싫어.", "나는 대학생이 싫어." 이렇게 말하진 않는다. 그런데 "나는 애들은 딱 질색이다."라곤 잘들 말한다. 다른 모든 계층에 대한 혐오는 검열되는데 아이들에겐 그렇지 않다는 게 이상하다. 어른에겐 성숙함이 필요하다. 그렇지도 않으면서 어른 딱지를 스스로 붙일 수 있을까.
영화 <생일>을 봤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아직도' 기념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는데, 왜 불과 2014년의 일을 '아직도'라고 말하는지. 그 말을 듣기가 지겹다. 2014년 4월 16일은 매년 생일처럼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되돌아봤다.
부끄러운 어른이 되지 말자고 우리 모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살고 있는가. 난 부끄럽다. 앞으로도 부끄러울 일이 많을 것 같다. 그렇지만 부끄러운 마음의 존재가 최소한의 양심을 말해준다고 믿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덜 부끄럽게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