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추억>은 JTBC 단막극 프로그램 ‘드라마 페스타’의 2017년 작품이다. 제목과 반대로 12월 한겨울에 방영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올여름이 막 시작하는 5월의 어느 날, 왓챠플레이를 떠돌아다니다 발견했고, 빨려 들어갈 듯 시청했다. 단 두 편짜리 드라마로 사랑을 대하는 자세, 사랑의 의미, 사랑을 통한 성장을 이야기했다.
주인공 ‘한여름’은 30대 후반의 방송 작가다. 어느 더운 날, 여름은 선을 보러 나갔다가 답답한 법조계 남성에게 된통 스트레스만 받고 돌아온다. “남자는 40대도 괜찮지만 여자 나이 30대 후반이면…”이라고 말하는 전형적으로 꽉 막힌 대화 뒤로 여름의 지난 사랑들이 펼쳐진다.
먼저, 현재다. 가장 최근 여름이 발을 담근 관계는 담당 PD ‘제훈’과의 것이다. 이혼한 제훈은 책임 지기는 싫고 마음은 끌리는 사이에서 여름을 애매모호하게 대한다. 그러다 여름이 연인인지, 동료인지 이 관계의 이름을 묻자 그만 발을 쏙 빼버리고 만다. 제훈은 이혼 이후 여럿과 동시에 썸을 타고 데이트를 하면서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여름에겐 진짜 사랑이 필요하다. 6년을 만나고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본인의 꿈과 욕심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해준’, 대학 시절을 함께하며 때로는 풋풋하고 때로는 불처럼 사랑한 ‘지운’, 그리고 첫사랑 ‘현진’까지. 잊을 수 없는 사랑들이 항상 여름의 기억을 채운다. 그래서 더 나쁜 남자 제훈을 차갑게 뿌리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휴가를 떠나기 직전, 공교롭게도 여름이 맡은 라디오 프로그램 게스트로 팝 칼럼니스트인 ‘해준’의 초대가 결정된다. 동료 방송작가 ‘해원’의 도움으로 섭외를 마무리하고 곧, 여름은 미국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리고 변을 당한다. 언니의 집에 있다가 괴한에 피습되어 사망하고 만다. 이때, 아스라해지는 여름의 의식 속에서 지난 사랑들이 스쳐 지나간다.
여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한여름의 추억>은 여름의 추억 속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여름이라는 사람을 사랑했던 이들의 여름 이야기로 전이된다. 제훈에게 여름은 데이트하는 여자들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름의 휴가 전날, 여비로 쓰라고 돈 봉투를 건넨다. 그제야 여름은 제훈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각한다.
여름은 말한다.
내 욕심 때문에 상대 진심 짓밟으면 벌 받는다.
헤어지잔 말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내숭 떨면 기회 다 날아간다.
모두 지난 연애로부터 여름이 배운 것들이다. 그리고 여름을 간만 보고 떠나는 남자들로부터는 ‘내가 상처 받지 않게 치는 울타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여름은 제훈에게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이혼까지 해봤으면서, 왜 지난 사랑으로부터 배우지 않고 성장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다. 답을 듣지 못할 쓸쓸한 질문이다. 진심을 말하는 상대 앞에서 진심을 잊고 살던 제훈의 얼굴은 착잡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해준은 어떨까. 여름과의 6년 연애 이후, 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결혼하자는 여자 친구가 생겼지만 여름이 결혼을 거절한 이후로 굳게 닫힌 마음은 열리지 않는다. 부모님께 소개하고 싶다는 여자 친구를 뿌리치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소파에 앉은 해준은 라디오 녹음을 갔다가 ‘해원’으로부터 듣게 된 여름의 죽음과 그녀가 해준에게 하고 싶어 했던 말을 상기한다.
언니, 난 항상 그 사람에게 미안해.
이튿날, 문 앞엔 여전히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쪼그리고 앉은 그녀를 보다가 가만히 그 앞에 다가간다. 지난밤으로 말미암아 그는 다시 마음을 열기로 결심한 것 같다. 해준은 자신을 버리고 간 그녀, 여름을 비로소 용서한 것이다.
다시금 여름처럼 불 같은 여자와 연애 중인 ‘지운’도, 강렬했던 첫사랑 여름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긴 ‘현진’도 여름의 죽음 이후 사랑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지운은 화내고 소리치는 애인에게 홧김에 헤어지자고 해놓고 여름과의 일을 떠올린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건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려주었던 여름의 말을 생각해내고, 애인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한다.
현진도 선을 보는 자리에서 첫사랑 여름이 떠오르는 상황을 만난다. 현진은 햄버거를 못 먹는다고 했던 여름이 다른 남학생과 햄버거를 먹는 모습을 목격하고 여자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선 자리에서 음식을 조금씩 먹고 입을 닦는 상대편 여성에게 “여자들은 왜 내숭을 떨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옛날에 여름이 한 말과 정확히 같았다. 잘 보이려고 햄버거를 못 먹는다고 거짓말했다는 여름의 말, 현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란 여자의 말. 현진은 비로소 첫사랑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다.
<한여름의 추억>은 지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여름과 제훈은 제대로 만난 적 없고, 여름과 해준, 여름과 지운, 여름과 현진은 모두 끝난 관계이지만 여름은 그 모두를 사랑하는 동안 배웠고, 성장했고, 여전히 그들이 그녀와 함께한 반짝이는 시간을 기억한다. 여름이 사랑했던 남자들 역시 여름을 추억함으로써 사랑 안에서 마주하는 장애물을 뛰어넘는다.
아프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을까. 사랑만 가득 찬 연애가 어디 있을까. 행복하고 밉고 아프고 괴로운 감정의 파고를 선사하는 사랑이 지나고 난 후, 우리는 선택을 마주한다. 지난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장할 것인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할 것인지.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고 실수를 찾아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 옛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꽉 닫혀버렸지만 그 사람은 지나갔다는 걸 알고 다시 한번 마음을 열자 결심하는 것. 실패했으니까 배웠다고 위로하는 것. 다 여름이 전해준 것들이다. 여름이 시작하는 5월에 만난 <한여름의 추억>을 보며 울고 웃었다. 여름의 진심이 모든 옛사랑의 마음에 전해진 것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진심으로 말하고 진심으로 배워야 한다.
이렇게 별거 아닌 나를 한때라도 빛나게 해 준 당신, 고맙습니다.
빛나고 아팠어. 모두 네 덕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