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당신의 글발이  서릿발처럼 얼어붙은 이유는?

책 읽기로 시작하는 글쓰기의 묘책(妙策)

당신의 글발이 서릿발처럼 얼어붙은 이유는?

책 읽기로 시작하는 글쓰기의 묘책(妙策)     


다른 책을 읽고 다르게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책을 왜 읽느냐고 물어보면 머뭇거리지 않고 이전과 다른 책을 쓰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책을 읽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 역시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5가지 이유를 일반적인 수준에서 주장했다. 책을 읽으면 남다른 개념을 습득하고, 인두 같은 한 문장을 만나 위로도 받는다. 책을 읽으면 놀라운 사유의 흔적을 발견하고 생각 너머의 상상을 하며 남들이 체험한 흔적을 따라 간접체험을 하며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어떻게든 이전과 다르게 살아보기 위해서다. 아침에 여전히 눈이 떠진다. 그래도 출근할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전쟁 같은 출근시간을 통과해서 회사에 간신히 도착하면 늘 같은 일의 반복이지만 또다시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된다.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동분서주하다 퇴근 전에 잠시 다시 생각해본다. 내일도 여기로 출근해야 되는 거 맞나? 전과 다르게 살아보려는 사람은 뭔지는 모르지만 살아가면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거나 해결될듯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을 괴롭히는 고민거리가 있는 사람, 늘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전보다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은 깊은 상처를 입고 말 못 할 사연을 품고 있는 사람, 힘들지만 대놓고 힘들다고 말하기 어려운 사연을 끌어안고 끙끙거리며 견디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책은 말하지 않으면서 속삭이며 다가오는 친구다. 안간힘을 쓰면서 살지만 가까운 친구에게 쉽게 전화할 수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을 때, 바동거림의 흔적을 글로 남기고 싶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뻥 뚫린 허공이 나를 슬프게 한다.      



어떻게든 다르게 살아보기 위해 책을 본다     


잘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견뎌온 한 많은 인생을 한 페이지라도 남기려고 애간장도 녹여 봤지만 한 줄도 써지지 않는다. 나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서 누굴 만나면 할 말이 많아서 그렇게 수다를 떨었지만 왜 그 많던 생각과 말이 글로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기존의 생각을 토해내서 그냥 쓰자니 너무 생각이 허접하다는 자기 판단이 들었기 때문일까. 힘든 세상을 나름 열심히 살아와서 한 번쯤 내 인생을 정리해보고 싶었지만 정리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경험을 하나의 일관된 논리적 구조와 체계로 녹여낼 콘셉트(concept)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콘셉트는 영어의 ‘concept’을 번역한 의미를 능가한다. 경험은 많이 했지만 그 경험을 포착해서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로 구현해낼 개념도 부족하거니와 그럴만한 사유가 성숙되지 않아서다. 방법은 성숙한 사유체계로 자기만의 특이한 경험을 독특한 개념으로 문장을 건축해내는 선각자들의 다양한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그들은 험난했던 삶을 어떻게 적확한 개념으로 녹여 자기만의 칼라와 스타일이 살아 숨 쉬는 문장을 건축했는지 유심히 읽으면서 저자의 입장이 되어 깊이 생각해본다. 책은 내 생각의 한계와 무지한 인식을 깨우쳐주는 죽비(竹篦)다. 죽비로 한 대 얻어맞는 순간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깨달음의 빛이 순간 번쩍이면서 얼어붙었던 사유체계가 한순간에 깨진다. 낯선 발견의 선물이 책 곳곳에 숨어 있다. 행간을 비집고 들어가면 저자가 숨겨 놓은 놀라운 생각의 정수(精髓)들이 흐르고 있다.     


도처에 책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책을 읽을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책이 나에게 주는 엄청난 각성의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책은 결국 마음속의 심각한 위기의식을 품고 있는 갈급한  사람이 읽는다. 책을 읽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떻게든 이전과 다르게 살아보려는 결연한 문제의식이나 지금 이 상태로 계속 살아간다면 심각한 위기가 몰려올 것이라는 다급함과 간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이전과 다르게 살겠다는 다짐은 이전의 생각과 다른 생각으로 다르게 행동해서 다른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나만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하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르게 살기 위한 다른 생각과 행동에 관한 아이디어는 어디로 얻을까. 남다른 경험의 현장에서 애간장 태우면서 저마다 고유한 사유체계를 구축해놓은 책의 바다로 빠질 때 나 역시 쉽게 빠질 수 없는 깊은 발견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놀라운 생각과 행동으로 무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발견은 《개인적 지식》과 《암묵적 영역》이라는 책을 마이클 폴라니에 따르면 “해석 구조 틀의 변화”이자 “의미의 변화”이고 “개념의 변화”이며 “실존적 존재양식의 변화”다. 책을 읽음으로써 이전과 다른 통찰을 얻고 이전에 몰랐던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빠져서 읽되 다시 빠져나와야 한다     


특히 책을 쓰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복잡하게 얽혔던 생각의 실타래를 푸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는 순간 네가 지금까지 세상의 변화를 해석했던 틀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골머리를 앓던 문제의 본질적 의미를 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단순히 책에서 얻은 특정한 문제의식을 함의한 개념을 나의 문제 상황에 적용해서 해석했을 뿐인데 신천지가 펼쳐지는 경이로운 경험을 한다. 경이로운 경험은 같은 분야의 저자가 쓴 책 보다 나와 다른 분야에서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뇌했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다른 분야의 책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평범한 걸 보고고 비범한 역발상을 잉태하는 시인의 상상력을 배우기 위해 시를 읽는다. 사소한 것에서도 남다른 의미를 발굴하는 관찰과 통찰을 배우기 위해 에세이를 읽고, 인생 다반사의 희로애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하나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자기만의 사유체계로 사람과 삶의 근본을 캐묻는 문제의식을 배우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고 지나간 과거에 오래된 미래의 지혜를 얻기 위해 역사책을 뒤적인다. 사람의 아픔에 담긴 아름다운 무늬를 상상하기 위해 문학 책을 읽고 전공에 대한 깊이 있는 지적 사유를 얻기 위해 각종 전문서적을 읽는다. 무엇보다도 나의 인식 관심의 지평을 확대라고 깊이를 심화시키는 다양한 지적 자극을 얻어 이전과 다르게 살아보기 위해 오늘도 사유의 바다를 유영(遊泳)하고 있다. 우리가 읽기에 심금을 울리는 한 문장의 심오함도 작가의 만만치 않은 삶의 무게가 생각의 정수(精髓)로 농축된 결과다. 똑같은 인생을 살면서 사랑을 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기쁨을 얻기고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때로는 한 가지에 꽂혀서 열정을 발휘하며 몰입하고 창작하는 희열을 경험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책 속으로 빠져들되 완전히 빠지지 말자는 이야기다. 저자가 던진 화두에 공감과 감동의 메시지를 접해서 한 동안 빠져 살아도 좋다. 하지만 반드시 빠져나와서 나의 입장과 처지에 비추어 그 메시지가 던지는 의미를 곱씹어 내 것으로 만들어보려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많은 책을 읽어도 다른 저자의 생각에 뒤범벅되어 나만의 사유의 씨앗을 발아시킬 수 없다. 철학자에게 철학이라는 내용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과 철학적 문제의식,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걸러내는 사유체계의 증축 과정을 배운다. 그것도 한 사람의 이론체계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편파적 세계관을 생성하지 않도록 또 다른 철학자의 사상적 편력에 부단히 비추어보면서 각성하고 통찰하는 과정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저자의 종횡무진 책 읽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철학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들이 내뱉는 한 마디는 모드 특유의 칼라와 스타일을 지닌 목소리다. “언어는 신체가 되어버린 기계다. 웃음은 심과, 울음은 폐와, 노래는 비장과 서로 공생하며 신체가 되어버린 언어-기계들이다. 따라서 언어를 바꾼다는 말은 신체를 바꾼다는 말과 같다. 언어의 배치를 바꾸는 것은 이 의미에서 내 신체를 변형시키는 문제이고, 분명히 건강의 문제인 것이다”(729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책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와 신체와 건강의 삼위일체론, 너무 아름다운 조화가 아닌가. 글은 저자의 신체가 경험한 생각과 느낌을 언어로 번역해낸 창작물이다. 글 속에 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이유다. 철학자의 고뇌에 찬 한 마디 말과 하나의 개념, 그리고 한 문장에 함유된 신념의 목소리는 곧 그 철학자의 신체가 담고 있다 겉으로 토해낸 사유의 진액이자 정수다. 언어는 관념적 표현의 산물이 아니라 신체적 물질로서 독자의 신체를 직접 때린다.    

 


위험한 생각을 잉태하는 매개체가 바로 책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도 어떻게든 어제와 다르게 살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위기 상황에 몰아넣고 가열 찬 사고 실험을 감행해야 한다. 나를 만들어준 사고기반을 끊임없이 의심해보고 내가 당위적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의 터전에도 물음표를 던져 자주 시비를 걸어봐야 한다. 한 마디로 밑바탕이나 뿌리 채 뒤흔들어 정초를 무너뜨리고 다시 집을 짓기를 반복해야 한다. 나도 모르게 근거하고 있는 사유의 집안에는 어느새 타성과 통념이 꽈리를 틀고 있다. 그것이 새로운 생각을 재단하고 평가해서 뭔가를 시도하기 전에 안 된다는 자기만의 타당화 논리를 내 세운다. 더 이상 진전이 없어지고 현실에 안주하는 관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전에 쌓았던 업적과 성취를 뒤흔들어 무너뜨리고 색다른 곳에서 다시 정초부터 쌓으려는 무모한 노력은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체험적 깨달음과 독서를 통해 습득한 개념적 통찰이 묶여 생긴 나다운 신념과 가치관의 터전에 안주하려는 나 자신을 또 다른 생각과 접속시켜 기존 생각 바깥으로 나가려는 시도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미래를 앞당겨 실험하고 예측해볼 수는 없다. 책은 나를 계속해서 위험한 곳으로 끌고 간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내 몸을 내 맡기는 순간 온 세상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아직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예상할 수 없다. 오로지 상상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면서 꿈꾸었던 세상이 갑자기 비상할 뿐이다. 백척간두 진일보를 통해 내 몸을 우연의 허공 속에 내던지는 것이다. 떨어지는 순간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 순간만이 내가 여기서 저기로 도약하며 위험한 미래를 잉태하는 순간이다.


“나는 책 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89쪽). 김현의 《행복한 책 읽기》에 나오는 말처럼 읽기는 곧 시대 역사적 맥락을 읽어내는 일이다. 맥락을 읽어내지 못하는 독서일수록 맥을 추지 못한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이 집결된 사고체계라고 할지라도 내가 직접 사고 치면서 내 삶의 맥락으로 녹여내지 않으면 관념의 파편에 불과하다. 내가 직접 다른 사람의 사상을 사용할 때 사용 과정에서 내 생각이 스며들어가고 내 몸으로 빨려 들어와 나의 감각 체계를 변형시키는 각성제가 된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재단하기 이전에 몸으로 느끼고 각인시키는 과정, 신체성으로 재탄생시키는 사용 과정이 동반되지 않는 사유는 현실 변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유약한 사색의 파편에 불과하다. “그의 시는 치열한 번역 과정, 즉 외국어와의 침통한 투쟁 속에서 체득한 것이다(염무웅). 그(김남주)에게 번역은 혁명의 번역이었다. 그것은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원문에 숨어 있는 새로운 타자를 발견하는 욕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584-584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책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책은 번역을 통해 나의 것으로 전환된다. 다른 언어로 바꾸는 작업만이 번역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탈바꿈시키는 변혁의 과정이 바로 번역의 혁명이다. 저자의 문제의식 속으로 파고들어가 어떤 맥락과 사연을 배경을 이런 생각을 잉태시킬 수밖에 없었는지를 반추해보고 추체험해보지 않으면 맥락성을 잃어버리고 부유(浮遊)하는 사유의 거품에 불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책을 읽는 모든 행위는 오리지널 저자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전환시켜 또 하나의 생각의 집을 짓는 건축행위다. 단어와 개념으로 건축된 문장을 빌어다 용처에 맞게 재조립하고 아예 다른 개념으로 재개념화 시켜 내 집의 성격을 전혀 다르게 번안해내는 변혁 작업이다. 책을 읽는 모든 순간은 저자와 독자가 합작해서 벌이는 공사현장이다. 공사가 언제 끝날지는 책을 읽는 독자가 저자와 합의하는 순간에 따라 결정된다. 공사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 이전과 다른 개념 건축을 지을 수도 있고, 공사기간에 깨달은 또 다른 깨우침으로 글짓기로 연결할 수도 있다.      



낯선 생각과 접속해야 낯선 생각이 잉태된다     


나는 자주 학부 수업, 특히 대학원 수업에서 평온한 생각을 혼돈의 바다에 빠뜨릴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경제학자, 교육학자, 인지 생물학자 등을 강의장으로 소환해 한 주에 한 사람씩 관련 책과 논문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진행한다. 교육학이든 교육공학이든 자기 전공에 빠져 비슷한 개념과 이론을 동종교배(同種交配)하는 연구를 반복할수록 바깥세상과 소통은 단절되고 관성을 반복하는 타성에 젖은 연구를 자기들끼리만 아는 용어로 무한 재생산한다. 늘 쓰던 개념을 쓰기 때문에 사고는 언제나 울타리 안에서 맴돌고 연구 문제의식은 대상을 바꾸거나 변수를 바꿔서 “∼가 ∼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대대손손 반복한다. 학문 후속 세대는 이전 선배가 걸어간 길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고 선배가 가졌던 문제의식의 미세한 대상과 변수를 바꿔서 “∼가 ∼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무한 복제한다. 가끔은 낯선 세계로 스스로를 이끌고 가서 생전 들어보지 못한 개념과 논리적 자극을 받을 때 학문적 충격이 일어나면서 기존 사유체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학자는 논문과 책을 읽고 끊임없이 어제와 다른 논리로 문제의식을 잉태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기존의 사유체계와 접속을 시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느새 늘 쓰던 개념과 이론체계에 길들여지면서 학문적 경계를 가르고 벽을 쌓기 시작하면서 비슷한 분야의 전공끼리도 소통이 단절되기 시작한다. 미시적 현상을 세분화, 파편화, 단절화시키는 연구가 계속될수록 연구자는 전체와의 구조적 관계성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나와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앞날을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는지를 알 길은 요원해진다.      


특히 낯선 개념과 이론적 문제의식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고 자신들이 구축한 학문적 울타리 안에서 끼리끼리 연구공동체를 만들어나갈수록 연구현장은 물론 다른 연구자와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결국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현실이나 현장과는 더욱 무관 해지는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연구결과물만 양산될 뿐이다. 매주가 늘 기대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이 설레기도 한다. 타성에 젖은 편안한 공부보다 스스로를 낯선 세계에 진입시켜 일정기간 혼란기를 겪겠지만 그럼에도 개념적 명료함과 지적 명쾌함을 맛보는 공부 여정은 언제나 새로 떠나는 여행이다. 지적으로 불편한 순간이 많아야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또 다른 지적 투쟁을 감행한다. 불편한 지적 투쟁에 관여된 몸이라야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내 생각은 내가 보유하고 있는 개념적 수준을 능가할 수 없다. 한 연구자의 사유체계와 사상적 깊이는 그 사람이 동원해서 사용하는 개념적 수준에 정비례한다. 이전과 다른 사유체계로 다른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곳을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개념적 렌즈를 바꿔야 한다. 내가 쓰고 있는 개념적 안경 색깔이 빨간색이면 그 사람의 눈에는 온통 세상이 빨갛게 보일 뿐이다. 개념은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경험적 현상을 독창적인 나만의 사유체계로 구조화시키는 논리적 무기다.      

읽기의 완성은 쓰기이고 쓰기가 시작되면 혁명이 일어난다     


낯선 지적 사유의 씨앗을 잉태할수록 도와주기 위해서는 낯선 사유와 접속할 수 있는 다양한 책을 읽고 다시 나의 관점에서 이들을 해체해보고 재구성하는 글쓰기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읽고 끝나면 그 순간 사유도 거기서 끝난다. 사유가 나의 관점에서 다시 잉태되기 위해서는 읽으면서 보고 느낀 점을 메모해놓고 그것이 나에게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부단히 고뇌해보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수업 마지막 시간은 한 학기 동안 배운 모든 개념을 엮어서 짧은 글을 써야 한다. 글로 써서 정리하지 않으면 수많은 개념은 관념의 파편으로 머릿속 어딘가에 야적되어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읽기는 쓰기이고 쓰기는 다시 읽기로 선순환되는 과정에서 내 몸이 노동을 하는 시간이다. 고통스러운 노동, 몸이 관여하는 정리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읽은 책은 휘발성이 강해서 기억의 저편으로 금방 사라지기 일쑤다. 읽는 순간 감동받았어도 감동의 흔적을 기록해놓지 않으면 기억은 추억의 한 페이지도 남기지도 않고 사라진다. 기록하는 수고스러운 노동의 시간만큼 글쓰기의 기적은 가능성의 상태로 내 몸에 축적된다. 축적된 기록이 어느 순간 몸 밖의 부름을 받고 폭발적으로 튀어나온다. 글쓰기 주제가 결정되면 몸 안에 축적된 책 읽기의 흔적이 연결되면서 상상력의 꽃을 피운다. 쓰기는 읽기가 축적되어 어느 순간 숙성된 글감이 영감을 받아 탄생하는 경이로운 기적이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으로 읽기는 다름 아닌 쓰기이자 실천이며 내 삶을 바꾸는 혁명이다.    

  

읽기에 투자한 시간은 한 인간이 특정한 공간에 자리 잡고 사투를 벌이며 보낸 전쟁 같은 시간이다. 텍스트에 감춰진 저자의 의도와 문장과 개념 속에 묻어둔 의미의 껍질을 깨고 파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저자의 노력에 우리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종일관 자기 주관으로 작가들의 사유체계를 따라가서 읽되 다시 내 입장에서 해체해서 재구성해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을 사로잡게 만드는 개념 체계와 사상적 원천에 깊이 빠지지만 다시 빠져나와 나의 사고 양식에 비추어 재개념화 시켜 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의 놀라운 개념 사용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 개념을 어떤 사연과 배경으로 창조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개념으로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펼쳐나가는지를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결국 할 일은 저자의 문제의식으로 읽어보고 나의 입장으로 재해석 보면서 결국 나는 똑같은 문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생각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철학자들은 이전 철학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해부하는 사람이다. 책을 읽되 철학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풀어낼 또 다른 개념을 창조하기 위해 부단한 사유 실험을 하는 사람이다. 안간힘을 쓰면서 위험한 사유 실험을 하는 와중에 자기만의 독창적인 철학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 다시 읽기로 빠져들게 만들고 그 읽기로 생긴 상처 받은 삶을 다시 글쓰기로 연계하는 작업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바로 작가다. 결국 삶과 읽기와 쓰기는 한 몸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삼위일체다. 누구나 다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삶과 인생을 저마다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서 자기만의 사유체계를 구축해가는 다양한 작가의 다른 시선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책이라는 세계다. 하루 24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인생사가 펼쳐진다. 바로 이점이 내 삶도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책 읽기를 통해 내 책을 쓰는 과정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다른 책을 읽지 않으면 왜 다른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일까? 다른 글을 쓰지 못하면 내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는 과정도 판에 박힐 수밖에 없다. 책 읽기를 통해 내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엮는 방법, 그것이 궁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