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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삶을 못 살았어도
쓸 말과 글은 있다

살아온 삶이 살아갈 삶에게 건네는 말은?

쓸 만한 삶을 못 살았어도 쓸 말과 글은 있다

살아온 삶이 살아갈 삶에게 건네는 말은?    

  

글을 쓰라고 하면 쓸 게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쓸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글로 쓸 생각이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은 이미 한 권의 책이다. 그 책에는 그 사람의 고유한 삶의 족적이 담겨 있다. 쓸 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결정하는 기준이 없듯이 쓸 만한 삶을 살아왔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보편적인 평가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어떻게 살면 쓸 모 있는 삶을 사는 것이고 어떻게 살지 않으면 쓸 모 없는 삶이 되는지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없다.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판단하는 주체는 오로지 나다. 남들이 내 삶을 평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평가를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나의 주관과 신념에 달려 있다. 아집과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다. 그 누구도 나 대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삶이 쓸 모 있는 삶인지를 내 대신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상대가 판단하기에 별로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게는 그 일을 매개로 색다른 가능성의 문을 열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은 이미 한 권의 책이다. 그 책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책이다. 그 책에는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담기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삶이 책으로 엮이는 과정에서 삶의 매 순간 경험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는 글감으로 쓰인다. 그래서 내가 살아오면서 몸으로 겪으며 감각하는 모든 경험을 글로 쓰고 책으로 엮지 않으면 쓰임을 받지 못하고 기억의 파편으로 사장될 수 있다. 삶과 글, 그리고 책은 삼위일체로 엮여야 하는 이유다. 삶을 글과 책으로 엮는 재료가 바로 단어다.  

    


단어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다     


단어들이 모여 앉아 저마다 품고 있는 세월의 무게를 재고 있다. 내리막길에서 숱한 슬픔과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 버둥거리는 절망, 밑바닥을 오랫동안 기어 다니며 힘든 세상을 살아온 좌절, 걸림돌에 넘어져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실패, 혼돈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긴 세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긴 방황이 어느 순간 내가 살아가는 방향을 잡아준 원동력이지 않았을까. 한두 번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시련, 

어두운 밤을 벗 삼아 홀로 시간을 보내며 내면으로 침잠한 고독한 시간의 축적이 고뇌를 거듭하다 뿌연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태양빛을 만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다가오는 난국을 온몸으로 극복하며 통증을 호소하는 고통, 배고픔을 견디며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버텨온 가난, 끝을 알 수 없는 긴 터널을 간신히 빠져나와 음지에서 쉬고 있는 우울이 합작해서 힘든 시절을 버티고 견디게 만드는 디딤돌로 변신하지 않았을까.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온 단어들이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고 쓰다듬어주고 어루만져 주며 위로를 건넨다. 절망과 좌절, 실패와 방황, 시련과 고독, 고통과 가난, 그리고 우울이  모여 앉아 지난 세월을 살아온 삶의 무게를 잰다. 헐벗고 굶주린 저 많은 단어의 무게가 내 인생의 무게다. 단어에 담긴 사연의 무게가 내 인생이 무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의 뒤안길을 파헤치면서 갖고 있었던 생각과 느낌의 변화를 적확한 단어로 번역해내는 작업이 곧 삶을 매개로 글을 쓰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은 삶을 나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글쓰기다. 돌이켜보면 부실한 삶을 살았다고 글쓰기도 부실하다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한다. 모든 삶은 생각해볼 의미와 가치가 있는 그 자체가 기적이며 경이로운 역사다. 사소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내 삶의 역사를 구성하는 의미심장한 사건과 사고가 될 수 있다. 사소함을 어떤 생각의 틀로 해석해내느냐에 따라 색다른 의미체계로 재구성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고를 경험하면서 내 몸에 각인된 느낌과 감정, 생각과 사고를 적확한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특정한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느낀 점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언어를 선택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런 단어를 내가 모두 다 습득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경험과 생각과 느낌은 언제나 삼위일체로 통일되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경험은 언어로 전환되어 표현되지 않는 이상, 과거에 겪었던 추억의 한 점으로 남아 산산이 흩어져 신체의 어딘가에 야적되어 보관된다. 하이데거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니체도 “꿀벌은 밀랍으로 집을 짓고 살아가지만 사람은 개념으로 집을 짓고 살아간다”라고 했다. 내가 어떤 언어와 개념으로 집을 짓는지에 따라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성격과 본질도 바뀐다. 살면서 겪은 사건과 사고를 나만의 언어로 재진술 하지 못하면 내 생각은 남의 언어와 사고에 종속된다. 내가 살아가고 있지만 내 삶이 아니다. 내가 겪은 경험과 체험이지만 그걸 나만의 언어로 번역해내지 못하면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의 언어와 생각으로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내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글은 쓸 수 없다     


우리는 오늘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안간힘을 쏟는다. 전쟁과도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함께 느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렇게 살아내는 한순간의 누적이 한 사람의 한평생을 만들어간다. 그런 삶을 굳이 글쓰기를 통해 기록하려는 이유는 쓰지 않으면 지난 시절의 경험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글쓰기를 통해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대한 구상도 잘 세울 수 없다. 미천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추체험하면서 살아온 시기별 내 생각의 변화를 추적하면서 당시에 겪으면서 배운 삶의 교훈을 정리하는 시간이야말로 나를 지적으로 숙성시키는 소중한 깨달음의 시간이다. “대체로 내 삶을 이해하고 버텨내기 위해 쓰인 글들이어서 내 글의 시야는 넓지 않고, 살아낸 깊이만큼만 쓸 수 있는 것이어서 글이므로 나의 책이란 결국 나의 한계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9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겪으면서 각성했던 사건과 사고의 뒤안길을 따라 가보는 이유도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였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다. 나의 책과 마찬가지로 나의 글도 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377쪽).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말이다. 체험해보지 않은 현상에서 이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체험해보지 않은 것을 상상할수록 자꾸  공상과 망상, 환상과 몽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일갈은 의미심장하다.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9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써야 한다”로 바꿔 써도 여전히 일리 있는 말이다. 글쓰기의 재료는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삶에서 얻는다. 삶이 없다면 글도 없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삶이 있어야 한다. 글쓰기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먼저 고민해야 되는 이유다. 자기 삶을 능가하는 글을 쓸 수 없다. 삶을 바꾸지 않고 글을 바꾸기 어려운 이유다. “좋은 글을 쓰려면, 대단한 삶은 아니더라도 기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자기기만 없는 글쓰기의 비결은 어쩌면 내 삶 안에서 떠올릴 수 있는 얼굴들, 내 삶을 비교적 잘 아는 얼굴들을 향해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249쪽). 제주현의 《일하는 마음》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쓴 글을 나를 잘 아는 가까운 친구가 본다고 가정할 때 나는 글 속에서 거짓말을 쉽게 할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삶대로 글로 전환하지 않고 꾸미기 시작할 때 글을 읽는 사람도 글 속에서 글을 쓴 사람의 진정성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글을 쓰다 보면 내가 경험하고 생각해서 정리했다고 판단했지만 여전히 경험과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는 무의식적인 욕망과 통재할 수 없는 편견이나 선입견이 개입된다. 그 사이에서 몸으로 느낀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거나 탈색되기도 한다.      


체험으로 녹여낸 글만이 독자의 몸을 관통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느낌의 시행착오다. 그 오락가락과 아리송함을 통과하면서 느낌은 단련된다”(101쪽).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에 나오는 이 말을 생각하면 느낌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느낌을 글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성찰하고 점검해보는 것이다. 시행착오를 경험해보면 판단 착오가 줄어든다. 삶에서 범한 시행착오가 글로 옮겨 적으면서 다시는 그런 삶을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한다. 살아온 삶을 반영했던 글이 다시 살아갈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글은 삶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쓴 대로 살아가야 되는 정언명령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글쓰기는 이전과 다르게 살아가겠다는 자신과 다짐하는 약속이기도 하다. “글쓰기란 사건들을 돌파하기 위해 준비하는 실천이다”(96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책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글쓰기는 책상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과정을 옮겨 적는 정신노동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멀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꾸며 살아가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며 몸을 쓰는 육체노동이다. 글쓰기는 책상에서 쓰는 사고행위다. 하지만 글은 곧 삶이기에 삶을 다르게 살아내기 위한 사생결단이며 분투노력이다. 글쓰기는 그래서 몸 쓰기다. 몸으로 쓴 글만이 삶과 맞닿아 있는 글이다. 몸으로 쓴 글만이 독자의 몸을 관통하는 글이 된다. 글은 눈으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몸으로 읽는 것이다. 글이 독자의 몸을 관통할 때 전율하는 깨달음이 몸에 각인된다. 몸으로 쓴 글만이 몸을 움직이게 만들고 몸으로 느끼게 만든다.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의 삶이 만들었다. 나를 바꾸는 방법은 내 삶을 바꾸는 것이다. 프랑스의 문학가, 폴 브루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는 대로 삶이 풀린다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재미없을까를 상상해본다. 삶의 재미있고 살아볼 만한 의미가 있는 이유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잡고 사투를 벌이며 해결하는 과정에서 찾는 의미와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많아지거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할 때 생각지도 못한 생각이 탄생된다. 이런 삶 속에서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한 사건과 사고, 그 속에 담긴 사연이 글의 재료로 쓰일 때 삶은 글이 되고 글은 다시 삶으로 전환되는 선순환을 겪는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에 전적으로 기대어 쓴 텍스트가 한편 에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이론과 지식에 선행하는 삶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힘으로 쓴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으로 쓴 텍스트에는 논리적 엄밀성이 있지만,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파고드는 떨림이 없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 노명우 교수가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추천사 중에서 한 말이다. 체험하지 않고 머리로 쓴 글을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 체험을 했지만 적확한 언어가 없어서 날 것으로 드러낸 글은 거치질만 그럼에도 삶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어설픈 논리지만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글이라야 독자가 진정성으로 받아들이고 공감한다. 공감하면 감동하고 감동하면 행동한다. 글이 생각을 넘어 행동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삶을 바꾸는 혁명으로 연결된다. 살아온 삶이 살아갈 삶에게 넌지시 건넨다. 쓴 대로 삶은 쓰일 것이라고. 그리고 혁명은 나를 위해 계속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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