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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많이 읽는 데
왜 한 페이지도 못 쓰는 것일까?

책을 읽고 책을 다르게 쓸 수 있는 5가지 비밀 노하우

책은 많이 읽는 데 책은 왜 한 페이지도 안 써지는 것일까

책을 읽고 책을 다르게 쓸 수 있는 5가지 비밀 노하우

책은 많이 읽는 데 책은 왜 한 페이지도 못 쓰는 것일까 


“독서 이후에 독서한 바를 자기 자신에게 다시 읽어 타자의 입으로부터 들은 바나 타자의 이름하에 읽은 진실한 담론을 자기화하기 위해 글로 씁니다”(387쪽).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 나오는 말이다. 책 읽기의 완성은 책 쓰기다. 쓰지 않는 읽기는 읽기가 아니라 그냥 보기다. 쓰기를 전제로 하지 않는 읽기는 관심을 갖고 다양한 개념들의 의미가 주는 시사점을 관찰하고 유사 개념들이 지니는 관계를 들여다보면서 심사숙고하는 읽기가 아니라 관망이다. 세심하게 살펴서 의미를 캐 들어가 파헤치며 반추하는 읽기가 아니라 수박 겉핥듯 주마간산의 대강 거들떠보기다. 이렇게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본 들 읽었다는 자기만족 이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진짜 독서는 독서한 바를 나에게 투영시켜 그것이 내 삶에 던져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숙고해보고 내가 해석해내는 의미로 나의 글을 쓰는 과정에서 끝난다. 독서는 한 권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끝나지 않는다. 진짜 독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누구나 쓰고 싶은 책은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쓴 글을 일정한 논리적 구조로 엮어낼 때 탄생된다. 일정한 주제가 논리적 구조로 엮인 책을 읽고 다시 나의 글로 녹여내서 다른 책을 쓰기 위해 필요한 5가지 독서방법을 알아본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고 남다른 지식을 창조하는 5가지 방법

오리무중(五里霧中)했던 책 읽기오색찬란(五色燦爛)하게 빛나다     


컨셉의 위력과 문제의식의 발견  

문제의식을 알아야 주제가 드러난다    

 

특이한 개념 임신과 출산

개념을 만나야 신념의 씨앗이 자란다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주장의 발견

공감 가는 문장을 만나면 주장의 힘이 강해진다    

 

독창적인 관점의 차용과 색다른 사유의 잉태

관점을 바꾸면 색다른 관심이 자라기 시작한다.   

  

저자 특유의 글쓰기 방식과 노하우 차용

방식을 익혀야 나만의 방도를 찾아낼 수 있다


컨셉의 위력과 문제의식의 발견  

문제의식을 알아야 주제가 드러난다   

  

모든 책은 저마다의 문제의식이 있다. 문제의식은 책이 탄생한 사연과 배경 뒤에 숨어 있는 저자의 컨셉이기도 하다. 이 책을 왜 썼을까? 제목을 보고 부제목을 보면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릴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최근에 쓴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는 띠지에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의 관계 에세이’라고 쓰여 있다. 저자가 사람을 만나면서 받은 상처, 상처를 준 사람들의 유형을 그동안 만났던 사람과 그리고 그 속에서 만들어진 인간관계를 반성하면서 쓴 에세이라는 말이다. 문제의식은 인간관계 속에서 깨달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의 유형이나 성격이라는 문제의식이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부각된다. 브런치 북 6회 대상 수상작인 《당신의 사전》은 부제목이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 위하여’다. 타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서글픈 마음, 애틋한 마음, 서툰 마음, 그리운 마음으로 범주를 구분한 다음 총 47개 단어로 써 내려간 글귀 모음집이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사람의 감정이 그렇게 천차만별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미적분할 정도로 미세하게 구분해서 자세하게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달래줄 방법을 찾다가 쓴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은 부제목이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다. 무례한 사람을 만나면서 생긴 난처한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에세이 형태로 풀어낸 책이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라는 칼럼이 히트 치면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책으로 연결된 경우다.      


"하루의 모든 내용을 칠판에서 지워내는 일, 우리 감정의 처녀성을 반복해서 부활시키는 일, 오직 그것만이 존재와 소유의 가치가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에 나오는 말이다.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세상에 알려진 작가 많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도 그런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1935년 고향인 리스본에서 죽은 뒤 친구들이 뒤늦게 그의 방에서 커다란 궤짝 하나를 발견한다. 궤짝 안에서 발견된 원고 중의 하나가 바로 ‘불안의 서’라고 적힌 봉투 5개에 약 350편의 초고와 단상이다. 그 후 페소아 연구자들은 유고 더미에서 ‘불안의 서’에 속한다고 판단할 만한 텍스트 150여 개를 더 찾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세상에 나온 작품이 바로 《불안의 서》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어제처럼 오늘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어제 느꼈던 것을 오늘 기억해낸 것이며, 어제는 살아 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루의 모든 내용을 칠판에서 지워내는 일, 우리 감정의 처녀성을 반복해서 부활시키는 일, 오직 그것만이 존재와 소유의 가치가 있다. 지금 밝아오는 이 아침은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이다”(185쪽). 페소아의 문제의식은 흔히 명예, 성공, 편리함, 소음과 번잡함 등이 인정받는 현시대에, 그와 정반대 되는 어둠, 모호함, 실패, 곤경, 침묵 등을 자신의 헤테로님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를 통해 노래하는 데 있다. 차분하고 섬세하고 치밀하면서도 치열하게까지 느껴지는 페소아의 글들을 통해, 혼자만의 시간에 삶에서 부닥치는 전반적인 주제들을 중심으로 고뇌하는 한 작가가 추구하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소아레스가 저물녘을 사랑하듯이, 저물녘에 창 바깥으로 바라보는 길거리 풍경을 사랑하듯이, 인간에 대한 회한밖에 남은 게 없는 듯한 그이지만, 익명의 사람들, 그 소소한 사람들을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사랑하듯이, 그 어떤 집요한 사색을 보탤 필요도 느끼지 않은 채로 그것들을 사랑하듯이,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페소아를 사랑했다.” 《불안의 서》에 대한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처럼 한 작가의 문제의식에 따라 세상은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상상력이 비상하는 영감의 천국이고, 아픈 상처를 반추하며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를 근본적으로 반성해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가 책을 읽고 책을 쓰는 과정에 반드시 주목하고 배워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책에 쏟아놓은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런 사유의 결과를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어떻게 복잡한 생각을 일정한 논리적 구조와 체계로 엮어낼 수 있었는지를 배워야 한다. 늘 우리 곁에 있는 나무를 만나지만 한 번 씨앗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평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궁금해서 쓴 책이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가 전해주는 나무에게 배우는 지혜라는 부제목이 말해주듯 나무를 인문학적 탐구 대상으로 삼아 나무의 일대기를 나무가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비추어 생각해본 에세이다. 문제의식만 있으면 글감은 도처에 산재한다. 집요한 탐구심만 있으면 그렇게 쓴 글을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정신으로 하나의 주제로 꿰어 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책을 읽되 책 속으로 파묻히기 전에 그 책을 쓴 저자의 아픔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사연과 배경을 품고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제목과 목차, 그리고 프롤로그를 유심히 살펴보자.     



특이한 개념 임신과 출산

개념을 만나야 신념의 씨앗이 자란다     


책을 읽으면서 습득하는 개념은 세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몰랐던 개념을 새롭게 습득하면 새로 배운 개념적 렌즈로 늘 경험하는 현상을 색다르게 조명해보고 해석하는 능력이 생긴다. 모든 글은 개념을 엮어서 문장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탄생된다. 개념적 사유가 부실한 사람은 글 역시 해상도가 높지 않고 뿌옇게 써진다. “우리가 누군가의 신체 표현을 보고 ‘깊이가 있다, 미적인 감동을 받는다’고 할 때는 대개로 그 움직임의 ‘분할도’ 또는 ‘해상도’가 치밀해서 그렇습니다”(126쪽). 우치다 타츠루의 《소통하는 신체》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의 해상도라는 개념을 만나는 순간 글을 읽고 나서 떠오르는 이미지의 선명도가 연상됐다. 글을 읽고 나면 무슨 글을 읽었는지 이미지가 뿌연 글이 있고 내가 마치 그곳에서 실제 경험하는 장면이 연상될 정도로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글이 있다. 그 차이가 바로 글을 쓰는 사람이 품고 있는 개념적 명료성과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철학자들이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체계를 풀어내기 위해 만들어내는 거의 모든 개념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색다른 개념이다. 철학책이 어려운 이유도 바로 어려운 개념으로 주장을 펼치는 철학자의 사유체계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데리다가 창조한 차연(differance)이라는 개념은 영어의 차이(difference)를 지금 여기서 당장 규정하지 말고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연기해서 그 의미의 차이를 계속 재규정하자는 말이다. 차연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터득함으로써 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책을 쓰는 것도 결국은 내가 살아오면서 내가 경험하고 느낀 점을 나의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내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녹여내는 과정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재료가 바로 내 생각을 적확하게 풀어내는 독특한 개념이다. 이런 개념은 기존 철학자들의 사유체계가 녹아 있는 기존 개념을 그대로 갖다 써도 되지만 기존 개념을 바탕으로 색다른 개념을 창조해낼 수도 있다.     

 


둘째,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을 전혀 다른 의미로 활용함으로써 이전과 다르게 주어진 현상을 재해석해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책을 쓰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되는 이유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나 용어를 재개념화 시켜 저자 특유의 문제의식으로 재탄생시키는 개념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예를 들면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 나오는 ‘자기 배려’라는 개념이다. ‘자기 배려’는 물론 자신을 배려하는 의미지만 사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예측하는 자기 배려와는 차원이 다르다. ‘자기 배려’는 “단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132쪽)” 위해서 기존의 “자기를 포기”(282쪽)에 가깝다. 더 구체적으로 ‘자기 배려’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자신을 점검하기”(120쪽),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신을 통제하기, 자신을 주장하기, 자신을 해방하기, 자신을 존중하기, 자기 자신을 돌보기,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 자기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발견하기, 자신을 치료하기, 자기 자신을 존중하기”(55쪽)이자 “자기 인식”(103쪽)이다. 푸코가 말하는 자기 배려는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 계발을 추진해왔지만 자기 계발이 추진될수록 자기는 탕진되고 진정한 자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배려는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우선 내면으로 향하게 만들어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지 않으면 기존의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와 무지를 모른다. 따라서 자기 배려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과거의 자기에서 벗어나 ‘자기에 의한 자기의 구축,’ 혹은 자기 자신의 ‘작품화’다.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나를 작품화시키는 과정에 필요한 노력이 바로 ‘자기 배려’다.   

  


셋째, 비슷한 개념의 미묘한 차이를 밝혀주는 책을 만나면 혼미했던 개념의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온다. 영어 단어 히어링(hearing)과 리스닝(listening)은 둘 다 듣기지만 큰 차이가 있다(배철현, 2019). ‘히어링(hearing)’은 자신에게 익숙한 말만 취해서 듣기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를 알 수 없는 낮은 수준의 자기중심적 듣기다. 이에 반해 ’‘리스닝(listening)’은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내기 위해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려는 수고와 노력이 따르는 타인 중심적 듣기다. 귀담아듣는 경청은 히어링이 아니라 리스닝이다. 오로지 상대방의 심장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가 말하는 모든 순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는 수고와 정성이 동반될 때 상대는 나의 곁으로 다가온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182쪽). 김소연의 《마음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해와 오해의 미묘한 차이를 국어사전에 나오는 개념적 차이로 설명하지 않고 저자 특유의 감각적 차이로 설명하는 데 묘미가 있다. 인간관계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는 이해와 오해, 관계가 경계로 바뀌기 전에 그 미묘한 차이를 극복하고 화해가 될 때 관계는 다시 지속 가능한 상태로 또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주장의 발견

공감 가는 문장을 만나면 주장의 힘이 강해진다     


책을 읽고 책 쓰기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원은 지금 고뇌하는 화제를 뒷받침해주는 문장이다. 문장에는 그 사람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문장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체험과 신념의 합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놀라운 문장, 어떻게 내가 고뇌하는 생각을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선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치고 더욱 공감이 가는 문장에는 형광펜으로 색을 칠한 다음 그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형형색색으로 붙여둔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밑줄 친 문장만 따로 워드 문서로 기록해서 독서일기 폴더에 주제별로 보관해둔다. 모든 창조는 참조해서 이루어지듯, 책을 쓰는 일도 다른 사람의 책을 참고해서 쓴다. 글은 순전히 내 생각(사실 어디까지 내 생각인지는 잘 모르지만)으로만 쓸 수 있다. 하지만 책은 한 가지 주제를 온전히 내 생각과 경험만으로 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가능할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해주거나 나의 생각의 깊이를 심화시켜줄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면 더욱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참고문헌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책을 빠른 속도로 쓸 수 있다, 분야별 다양한 책을 읽고 자신이 쓰려는 책의 주제에 맞는 문장을 책을 쓰면서 인용하고 거기에 내 생각을 덧붙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생각이 떠오르고 막혔던 사고의 물꼬가 터지기도 한다. 생각해서 글이 나오기도 하지만 글이 새로운 생각을 불러와 문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즉 다음 문장은 이전 문장이 물고 오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287쪽). 김연수의 《우리가 보낸 순간, 시》에 나오는 말이다. 책을 읽어야 된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기보다 김연수 작가의 이런 문장을 인용하면서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의 극명한 차이를 설득한다면 더 이상의 반론이 필요 없을 것이다. 작가가 품고 있었던 아름다운 생각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탄생하고 그 문장을 읽는 독자의 마음도 덩달아서 아름다워진다는 주장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결국 아름다운 문장을 품고 있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자연스럽게 펼칠 때 독자는 공감하고 바로 책 읽기를 시작할 것이다. 감동받은 독자는 바로 행동하지만 이해한 독자는 다시 생각하면서 행동으로 곧바로 옮기지 않는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혜택은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이 저마다의 경험으로 건져 올린 깨달음이 담긴 문장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거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조금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176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시행착오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시행착오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만 거듭하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또 다른 고민과 걱정거리로 생각이 온통 오염된다. 생각의 옳고 그름, 한계와 문제점, 색다른 가능성과 가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각한 대로 실천에 옮겨보는 것이다. 생각대로 잘 풀릴 수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오도되는 일도 많다. 다행스러운 일은 시행착오가 거듭될수록 판단 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을 읽을 때 눈길이 가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일상에 접하는 다양한 개념을 독특한 은유(metaphor)로 풀이할 때다. 은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닮지 않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며 닮을 점을 찾아 둘 사이를 새로운 의미로 연결하는 사유다.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는 뱃살을 촌철살인의 기지를 동원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문장이 나온다. “상반신과 하반신에 걸쳐있는 무책임한 비무장지대”(221쪽). 뱃살을 국어사전에 나오는 대로 의미 풀이를 하기보다 뱃살과 비무장지대를 연결시켜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찾아 놀라운 사유의 비약을 가져온다. 은유는 누군가 정의한 기존 개념을 논리적으로 다시 정의하지 않고 전혀 다른 의미로 개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인식의 지평을 열어준다. “숙고하는 것이 손전등이라면 행동하는 것은 전조등이다. 행동의 빛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훨씬 더 멀리까지 비춘다. 그러므로 흥미롭고 새로운 장소로 나아가려면 고민의 손전등을 꺼야 한다”(270쪽). 롤프 도벨리의 《불행 피하기 기술》에 나오는 말이다. 숙고를 손전등에 비유하고 행동을 전조등에 비유하는 순간, 숙고와 행동의 차이가 확연해진다. 앉아서 아무리 많이 생각해봐도 가까운 곳만 비출 수 있는 손전등 같은 아이디어밖에 안 나오지만 나가서 행동하면 멀리까지 비출 수 있는 전조등 같은 놀라운 아이디어를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숙고와 행동의 차이점을 논리적으로 비교하기보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보통명사, 즉 손전등과 전조등을 끌어와 연결시킴으로써 갑자기 숙고와 행동의 놀라운 차이를 아주 쉽게 이해시킨다.   

  


독창적인 관점의 차용과 색다른 사유의 잉태

관점을 바꾸면 색다른 관심이 자라기 시작한다.     


책은 나와 다른 생각이 자라는 사유의 보고이자 상상력의 텃밭이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와 다른 환경에서 다른 마주침을 통해 얻은 깨우침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 또한 책이다. 물론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지만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의 다른 경우도 많다. 책 속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부단히 출산하는 과정을 언어를 매개로 표현한 문장이 줄을 지어 행진한다. 저자의 남다른 생각에 접속하며 행간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과정은 그 자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다. 밥먹듯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느낌을 언어로 번역해놓으면 저자의 메시지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알 수 있다. 생각을 계속 생각하면 실체가 잘 잡히지 않지만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면 내가 무엇을 왜 생각하고 있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다. 느낌이나 생각이 조금 가시화되면 지금까지 했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 지도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간다. 책을 읽고 끝날 것이 아니라 나의 사유를 자극해서 색다른 생각의 씨앗을 발아시켜준 낯선 생각이 휘발되기 전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 그 생각을 붙잡아두는 방법은 나만의 비밀 문장 노트를 마련해서 묘계질서(妙契疾書)하는 방법이다. 묘계(妙契)는 책을 읽다가 묘하게 와 닿는 생각이고, 질서(疾書)는 빨리 적어둔다는 뜻이다. 다양한 디지털 메모장을 활용하는 방법이지만 나는 가급적 아날로그 방식으로 손을 움직여 내 사유를 자극하는 문장을 손으로 묘계질서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문장을 베껴 쓰는 일은 저자가 품은 그리움의 숨결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독자와 혼연일체가 되는 한바탕의 뜨거운 격정이다. 향기로운 그 몸짓과 함께 심장에 꽂힌 한 문장씩 따라 쓰다 보면 어느새 나는 그 속으로 젖어들고 그는 내 속으로 들어와 요동친다.       



“시계 바늘은 12시부터 6시까지는 우파로 돌다가 6시부터 12시까지는 좌파로 돈다. 미친 사람 빼고 시계가 좌파라고,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바빠도 벽에 걸린 시계 한번 보고 말해라.” 김승희의 《도미는 도마 위에서》 시집에 나오는 「좌파, 우파, 허파」라는 시의 일부다. 똑같이 벽시계를 수없이 봤지만 시인은 시계바늘에서 좌파와 우파와 허파를 상상하지만 우리는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틀에 갇힌 생각을 할 뿐이다. 시인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달인이자 세상의 모든 것은 한 몸이라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유가 몸에 밴 사람이다. 이문재 시인의 「사막」이라는 시를 보면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는 표현이 나온다. “사막에/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모래와 모래 사이다. 중략. 모래와 모래 사이에/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사막에 가서 모래만 보고 오는 사람과 모래와 모래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이를 보는 사람의 눈은 천지차이다. 사막과 모래를 등식으로 정리해서 사막하면 모래를 연상하며 틀에 박힌 생각을 하는 우리들에게 시인의 낯선 사유는 일종의 죽비의 깨달음이다. 우리가 시를 읽으면서 짧은 문장에 담긴 촌철살인의 통찰력을 배워야 하는 이유다. “이타심利他心은 이기심利己心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이 아니다.” 황지우 시인의 시집, 《게눈 속의 연꽃》에 나오는 「산경山徑」이라는 시의 일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모든 이타적 마음과 행동은 결국 나의 행복을 위한 이기적 조치라는 통찰이다. 역시 시인이 아니면 생각해낼 수 없는 놀라운 사유의 산물이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7쪽).” 우치다 다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라는 표현에서 번개 치듯 다가오는 통찰력의 위력에 한동안 말문을 잃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무지한 사람을 수없이 관찰해온 결과 어느 날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깨달음의 산물이었을까. 이런 문장을 만나면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나의 방식으로 패러디 문장을 만들어본다. “책을 읽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의지의 결핍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읽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지금 상태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습관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라는 한 작가의 통찰력은 다른 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처럼 다가온다. “내 머릿속에 들어온 오만가지 생각 중에서 몇 가지만 수태되어 새로운 생각으로 탄생한다. 생각은 본래 짝을 찾아 줄기차게 맞선을 보고 추파를 던지고 사랑을 나누기 때문에 부모가 정확히 누군지 모른다. 나는 남들의 생각이 그저 내 기억 속에 조용히 한 자리 하나만 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의 스위치를 눌러서 특정 주제에 관한 내 신념을 비추고 상반된 관점을 나란히 배치해서 명료하게 밝히고 이제껏 상상한 적도 없는 낯선 방식으로 생각을 바꾸도록 자극하는 순간을 사랑한다”(p.55).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에 나오는 말이다. 이 문장 역시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주인행세를 하는 많은 생각은 누가 낳은 자식인지 알 수 없다는 표현이 재미있으면서 의미심장하다. 부모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오늘도 낯선 생각과 짝짓기를 시도해서 전대미문의 새로운 생각의 자손을 출산하기 위해 책의 바다를 항해한다. 

     


저자 특유의 글쓰기 방식과 노하우 차용

방식을 익혀야 나만의 방도를 찾아낼 수 있다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방식을 배우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저자의 글쓰기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흉내 낸다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문체는 오로지 그 사람의 글에서만 묻어나는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그 근원은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스타일은 오랫동안 글을 써오면서 자신이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고유한 방식을 자기도 모르게 몸으로 익힌 습관이다. 모든 저자는 자기만의 글쓰기 방식이 있고 스타일이 있으며 칼라가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문체는 저자의 지문이다. 같은 지문이 없듯이 같은 문체도 없다. 문체가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삶을 주제로 자기 언어로 자기 생각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책 읽기를 통해서 문체를 배울 수는 없다. 문체는 오로지 쓰기를 통해서만이 드러난다. 나만의 문체, 즉 스타일과 칼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일상에서 건져 올린 글감을 내 생각으로 녹여내는 무수한 연습 끝에 저절로 드러나는 글 쓰는 스타일이나 색깔이다. 우리가 책 읽기를 통해서 배워야 할 점은 작가마다 문장을 건축하는 다른 방식과 특이한 논리 전개 방식이다. 김훈 작가의 문체는 엄격한 사실 중심의 단문이지만 묘사력이 정밀하고 경이롭다. 니체는 문장 속에 자신의 심장을 묻어둔다. 문장을 읽는 순간 심장이 뛰고 피가 끓는다. 괴테는 장편의 서사시 속에 인생의 파노라마를 선보인다. 집중해서 읽으면서 우주와 자연과 사람이 하나로 돌아가는 장엄한 파노라마를 연상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물 흐르듯이 글이 흘러가지만 뜨거운 태양 볕을 받아 열기가 넘쳐흐른다. 잘 못 읽으면 뜨거운 정열에 델 정도다.



어느 정도 모방은 가능하지만 오리지널을 능가할 수 없다.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배워야 할 점은 저자마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는 가다. 문체는 지문이라 배워도 동일할 수 없지만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배워서 사례와 에피소드를 나의 것으로 녹여내면 나만의 스타일과 칼라를 드러낼 수 있다.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 로자 룩셈부르크, 시몬 드 보부아르, 잉게보르크 바흐만, 버지니아 울프, 조르주 상드, 프랑수아즈 사강, 실비아 플라스, 제인 오스틴. 이화경 소설가가 자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 추동력이 되어 준 여성 작가 열 명의 삶과 문학을 조명한 에세이가 《사랑하고 쓰고 파괴하다》다. 그야말로 작가의 청춘을 매혹시킨 열 명의 여성 작가들이 시대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살면서 전투적인 글쓰기를 실천한 사람들의 뒤안길을 추적한 책이다. "불쑥불쑥 치밀고 올라오는 불안과 채울 길 없는 결핍과 알 수 없는 갈망에 미칠 것 같았던" 서른 살에 저마다의 인생을 살면서 자기 방식으로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고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 글로 녹여냈던 치열한 삶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에 긴장감이 감돈다. 삶의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앞서 산 '통 큰 언니이자 선배'들을 자신의 삶에 불러들여 뜨겁게 교감한 흔적으로 한 권의 책으로 남긴 기록이 바로 《사랑하고 쓰고 파괴하다》다. 들끓는 분노와 적개심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지, 세상과의 불화가 발생했을 때 대응논리를 어떻게 구상하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저자마다 고유한 논리 전개 방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에 보면 발견적 열정과 설득적 열정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지식창조와 전수 과정을 풀어낸다. 발견적 열정은 개인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수준으로 더 높은 지식 체계를 추구하게 만드는 감정적 에너지다. 설득적 열정은 보다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다 낮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지식창조 욕구를 불태우게 만드는 감정 에너지다. 마이클 폴라니의 발견적 열정과 설득적 열정을 배우고 가르치는 맥락에 적용해서 풀어내면 교수-학습과정을 다른 시각과 관점으로 풀어내는 논리 전개 방식을 배울 수 있다.     



“왼손으로 손잡이만 잡은 채 삽이 공중에 수평으로 뜨도록 이 동작은 같은 박자에 맞춰 뾰족한 삼각형을 만들어가는 탱고처럼 아름답다. 석탄을 멀리 던져야 할 때의 자세는 왈츠 동작을 연상시킨다. 커다란 삼각형을 그리며 몸의 무게중심이 이동할 때 상체는 45도까지 구부러진다. 석탄은 새 떼처럼 멀리 날아간다. 배고픈 천사도 함께 날아간다. 배고픈 천사는 석탄 속에, 심장삽 속에, 관절 속에 있다. 그는 안다 온몸을 먹어 치우는 삽보다 몸을 덥히는 것은 없음을. 그는 그러나, 배고픔이 그 기예마저 먹어치운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94쪽).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 나오는 말이다. 비상한 관심을 갖고 탄광에서 삽질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묘사 방식이다. 자세한 관찰이 통찰을 불러오는 논리 전개 방식이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329쪽).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말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겪은 소재에서 인간관계의 깊은 통찰을 이끌어내는 논리 전개 방식은 모든 작가가 배우고 익혀야 할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포함한 문사철과 에세이나 시처럼 글의 종류나 유형별로 작품의 특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논리 전개 방식을 배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반복해서 읽고 거기서 배운 방식으로 내 글을 써보는 길 밖에 없다. 이런 연습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남의 글쓰기 방식(方式)에서 나만의 글쓰기 방도(方道)를 찾아낼 가능성의 문이 곧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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