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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은 쓰지(읽지) 마세요!:

읽고 나면 머리가 복잡해지게 만드는 10가지 글 쓰는 비법

이런 글은 쓰지(읽지) 마세요!:

읽고 나면 머리가 복잡해지게 만드는 10가지 글 쓰는 비법     


이런 원고(原稿)를 쓰면 피고(被告)로 독자에게 고소(告訴)당할 수 있는 글이다. 주의해서 쓰지 않으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고질병이다.      


①왜 쓰는지 모르고 쓰는 글-목적의식을 잃고 횡설수설(橫說竪說)하는 원고

②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글-중심을 잃고 헤매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의 원고

③자기주장은 없고 남의 주장으로 도배한 글-남이 글에 무임승차(無賃乘車)한 원고

④만연체로 장황하게 이어가는 글-언제 끝날지 모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인 원고

⑤근거없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퍼뜨리는 글-아는 체 말하는 도청도설(道聽塗說) 원고

⑥전문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글-범접하기 어려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원고

⑦틀에 갇혀 틀 밖을 내다보지 못하는 글-좌정관천(坐井觀天)의 한계에 빠진 원고

⑧의미는 있지만 재미없고 지루한 글-의미심장하지 않은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원고

⑨똑같은 이야기를 무한 반복하는 글-했던 말을 반복하는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원고

⑩타성에 젖어 통념에 갇힌 글-과거를 답습하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원고     


왜 쓰는지 모르고 쓰는 글-목적의식을 잃고 횡설수설(橫說竪說)하는 원고    

 

글을 쓰는 목적의식이나 문제의식이 없다 보니 주장하는 바도 일관성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따라 읽었지만 갑자기 다른 주장을 하면서 삼천포로 빠진다. 그쪽에서 간신히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왔지만 다시 문맥을 잃고 방황 중이다. 언제나 끝날지 참고 기다리면서 읽었지만 여전히 횡설수설(橫說竪說)한다. 글을 통해서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가 불분명하다 보니 가는 와중에 만나는 모든 삼라만상이 이야깃거리로 등장한다. 작가의 여유로운 사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통찰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쓰는 사람은 왜 썼는지 모르겠고 읽는 사람은 왜 읽고 있는 모르는 글이라면 한 번쯤 의문의 물음표를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횡설수설하는 글을 읽으면 어느새 독자의 머릿속도 횡설수설로 가득 찬다. 왜 쓰는지 모르고 글을 쓰면 독자도 왜 읽는지 모르고 읽는다.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글-중심을 잃고 헤매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의 원고  

   

글을 쓰는 이유도 분명해야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메시지의 핵심과 본질이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으면 글을 쓰다 엉뚱한 곳으로 자주 빠진다. 메시지가 없는 글은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무엇을 주장하려고 썼는지를 잊어버리면 주장에 일관성이 없어진다. '주유소 습격사건(Attack The Gas Station, 1999년)'이라는 영화를 보고 기억에 남은 명대사가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유오성(무대포 역)은 "나는 한 놈만 팬다"라고 한다. 글도 마찬가지다, 공략해야 될 메시지의 핵심을 정해놓고 일관되게 두드려야 한다. 한 가지 주제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사례, 에피소드,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명언을 인용하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일관된 이미지를 심어준다. 다 읽고 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글에는 언제나 메시지 중심을 잃고 흩어져 있다. 메시지가 분명하면 글을 읽고 난 후에 남는 이미지도 분명해진다.   

  

자기주장은 없고 남의 주장으로 도배한 글-남이 글에 무임승차(無賃乘車)한 원고     


글은 체험과 개념의 합작품이다. 하지만 체험은 없고 남의 주장이나 이야기가 너무 많으면 도무지 누구의 글인지,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조차 의심이 가는 글이다. 내가 이 사람 글을 읽는 이유는 이 사람의 독특한 체험적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읽고 싶어서다. 어디에서도 읽을 수 있는 글, 다른 사람에게서도 비슷한 주장을 접할 수 있는 글을 굳이 여기도 다시 읽을 필요는 없다. 복사와 붙이기로 일관해서 접속사만 내 주장인 글이 여기에 해당된다. 복사해서 붙이고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하고, 복사해서 붙이고 ‘따라서’로 결론을 맺으려는 글이다. 다 읽고 나면 인용의 마술 경연장에 다녀온 기분이 드는 글이다. 내가 썼지만 글에는 내가 없는 글이다. 객관적(客觀的)으로 쓰다 보니 손님(客)의 관점(觀)만 있고 주인의 관점, 주관(主觀)이 실종된 글이다. 자기주장 없이 편집한 글은 독자를 집중시킬 수 없다.     



만연체로 장황하게 이어가는 글-언제 끝날지 모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인 원고     


잘 읽히는 글, 읽고 싶은 글은 모두 짧은 단문으로 이루어진다. 호흡이 길어지면서 글을 마치지 않고 접속사를 쓰고나 쉼표를 찍은 다음 계속 이어지는 만연체 글은 우선 글을 따라 읽기가 어렵다. 만연체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조차도 이해하기 어렵다. 언제 끝날지 예측이 되지 않으니 글을 읽는 사람 마음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마침표에 인색한 글은 마치지 않고 따라 읽을 수밖에 없다. 다 읽었지만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한 문장에 한 가지 생각만 담아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호흡이 길어지면서 한 문장 안에 여러 가지 주장을 담으려다 글이 길어진다. “무엇을 쓰든 짧게 써라. 그러면 읽힐 것이다. 명료하게 써라. 그러면 이해될 것이다. 그림같이 써라. 그러면 기억 속에 머물 것이다.” 퓰리처 상을 만든 미국의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의 말이다. 무조건 단문으로 쓰지 않으면 사고도 단절된다.  

   

⑤근거 없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퍼뜨리는 글-아는 체 말하는 도청도설(道聽塗說원고     


도청도설(道聽塗說)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한다는 뜻이다. 즉 길거리에 퍼져 떠도는 뜬소문을 말한다. 길에서 주고받는 말은 근거 없고 허황된 말이 많으니 함부로 떠들면서 남에게 퍼뜨려서는 안 된다. 거리에서 들은 것을 남에게 아는 체하며 말하거나 깊이 생각 않고 예사(例事)로 듣고 말하는 경박함을 경계하는 말이다.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글은 옳은 이야기가 너무 자주 나오거나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글이다. 그런 글을 읽고 나면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 자신 있게 주장한다. 물론 경험을 근간으로 주장한다. 어떤 경험이 이런 주장을 하게 만들었는지 사연과 배경을 알면 훨씬 믿음이 가고 설득력이 간다. 그래서 좋은 글에는 일방적 주장보다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로 남을 설득할 수 없다.      



전문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글-범접하기 어려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원고     


전문가일수록 걸리지 말아야 하는 병이 바로 ‘지식의 저주’다. ‘지식의 저주’는 전문가가 전문용어를 사용해서 비전문가에게 전문적으로 설명하지만 비전문가가 못 알아듣는 아픈 마음을 전문가가 몰라주는 병이다. ‘지식의 저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전문용어를 사용하되 전후좌우 맥락을 고려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쓰라는 충고다. 글을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글은 종이 위에 뿌려진 문자 암호 코드나 난공불락의 벽에 불과하다. 암호 코드를 해석하는 사람만이 문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글이 아니라 비밀문서나 다름없다. 경지에 이른 사람의 한 가지 공통점은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도 아주 쉽게 표현한다는 점이다. 단순함이 곧 위대함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삶의 철학으로 간직한다. 쉽게 표현할 수 없으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아인슈타인의 명언을 명심하자.     


틀에 갇혀 틀 밖을 내다보지 못하는 글-좌정관천(坐井觀天)의 한계에 빠진 원고     


이런 글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갇혀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글이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의 의사결정과 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피력하는 글이 무조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내 생각과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내가 살아온 삶의 행동반경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다 보니 다른 세계에서 다른 경험을 통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사람의 글은 이유 없이 읽기 싫어진다. 읽었어도 독후감이 부정적인 인상으로 각인된다. 우물 안에서 밖을 내다봤지만 언제나 안의 생각으로 밖을 재단한다. 좌정관천(坐井觀天)의 오류와 한계에 빠진 글의 한계다. 좌정관천의 한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내 경험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접해봐야 한다. 다른 삶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다른 글을 쓸 수  없다.     



의미는 있지만 재미없고 지루한 글-의미심장하지 못한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원고

     

의미는 있지만 재미가 없는 글은 옳은 이야기지만 먹히지 않는 글이나 다름없다. 이해는 가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무미건조(無味乾燥)한 글이다. 글의 공통점은 자기 체험으로 깨달은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서 배운 옳은 이야기가 주류를 형성하는 글이다. 대부분의 개론서가 재미가 없는 이유는 체험적 깨달음을 배경으로 구성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옳은 자기주장이 반복될 때 독자는 글을 끝까지 읽지 않고 덮어버린다. 재미없는 글의 공통점은 기대했던 바를 저버리지 않고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과 같은 삼단논법에 따라 논리적 주장을 의미 있게 설명하는 글이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는 이유를 글 쓰는 사람이 알아야 하는 이유다. 의미를 머리에 꽂으면 골 때리고, 심장에 꽂으며 의미심장해진다. 글이 무미건조한 이유는 글 쓰는 사람의 삶이 무미건조하기 때문이다. 글을 그 사람의 삶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무한 반복하는 글-했던 말을 반복하는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원고     


글을 쓰는 사람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하지만 읽는 사람은 앞에서 봤던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한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이야기도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고 맥락을 바꾸면 다르게 읽힌다.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별다른 문장의 변화 없이 반복해서 주장하는 글을 읽어줄 독자는 없다. 반복하되 동일한 개념을 반복하거나 비슷한 사례나 에피소드를 반복하면 지루하고 의미조차 없어지고 재미는 달아난다.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는 하나지만 그 와 관련된 사례나 에피소드를 바꾸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바꿔 글을 풀어가도 색다른 재미를 준다. 하나의 글이나 책 안에서 반복하는 주장도 지루하지만 비슷한 주장을 다른 글이나 책에서 반복하는 순간 신뢰는 전복당하고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작가로 낙인찍힐 수 있다.      



타성에 젖어 통념에 갇힌 글-과거를 답습하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원고     


과거의 성공체험을 다른 상황에 반복해서 적용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수주대토(守株待兎)라고 한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와중에 토끼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다 나무 밑동이에 부딪쳐 죽는다. 농부가 농사를 그만두고 나무 밑동이만 쳐다본다. 토끼가 다시 올 것이라는 가정을 갖고. 과거에 성공했던 체험은 과거가 양산한 체험적 교훈이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서 그때 얻은 성공체험은 더 이상 효력이나 효용가치가 없다. 그럼에도 그때 얻은 성공체험을 상황이 다르게 변했어도 반복해서 적용하려는 어리석음을 수주대토라고 한다. 타성에 젖어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주장하는 글에는 비난받아 마땅한 꼰대 의견이다. 관성대로 따라가는 식상한 글도 통념에 갇혀 다른 세상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수주대토형 글이다. 삶을 바꾸지 않고 책상에 글을 반복해서 쓸 경우 글도 타성에 접고 통념에 갇힌다. 삶을 바꿔야 글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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