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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은 ‘마감’시간에 온다!

기록하기 시작하면 기적이 시작된다

영감은 마감시간에 온다!

기록하기 시작하면 기적이 시작된다     


매일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읽는다. 매일 책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다. 읽기는 쓰기 없이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나는 쓰기 위해서 읽는다. 쓰려면 쓸 재료가 있어야 한다. 글감이 없으면 어떻게 쓸지 날밤을 새도 해는 떠오르지만 도무지 영감은 떠오르지 않는다. 영감이 안 떠오른다고 계속해서 기다리다 보면 영감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고 영구히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영감을 받으려면 영감이 언제 올지를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해야 될 일을 무조건 시작하자. 시작(始作) 하지 않으면 시작(詩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작품은 완벽한 영감을 받은 다음 시작해서 탄생한 결과가 아니다. 작가들이 쓰는 대부분의 작품은 어렴풋하게 써보고 싶은 주제가 떠올랐을 때 무조건 시작해서 마침내 빛을 본 산물이다. “기다리면 늦어지고 생각하면 어긋난다!” 이성복의 《무한 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다 글 쓰고 싶은 감정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머리로 생각만 하다가 쓰면 안 되는 10가지 이유를 생각하다 한 문장도 못 쓰고 좌절하고 글쓰기는 내가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한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시작하는 방법을 너무 많이 연구하다 시작하는 방법을 준비하는 방법까지 연구하는 악순환의 반복을 경험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방법을 너무 많이 연구하다 아예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는 악순환의 덫에 걸릴 수도 있다.     



위험한 경험으로 글을 쓰면 경거망동(輕擧妄動) 하지 않는다     


“진리탐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두 번째 방법의 탐구를 위해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인식에도 이르지 못한다.” 스피노자의 말이다. 글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별도의 방법은 필요하지 않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최상의 방법은 우선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쓰기 시작해야 첫 줄을 쓰고 첫 줄을 써야 두 번째 줄이 생각난다. 두 번째 줄을 쓰면 첫 번째 줄과 두 번째 줄 사이에 내 생각의 물꼬가 트이면서 그 사이에 집어넣을 또 다른 생각이 떠올라 어느 사이 그 사이에 또 한 줄을 쓰기 시작한다.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언가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니체가 한 말이다. 사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하나도 위험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본다고 해도 위험할 것 까지는 없지 않은가. 나의 고백을 들여다봤어도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일단 저질러 놓으면 뒷수습은 가능하다. 글을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면서 위험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글의 재료 자체가 작가 자신이 경험한 교훈에서 비롯된다. “영어로 ‘경험’을 뜻하는 experience는 라틴어로 ‘실험을 뜻하는 experimentia에서 유래했으며 라틴어로 ‘위험’을 뜻하는 periculum과도 연관이 있다”(p.350). 로먼 크르즈나릭의 《인생을 짧다 카르페 디엠》 중에 나오는 말이다. 위험한 경험으로 쓰는 글이 안락지대에 머물며 안주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일격을 가할 수 있다. 그들의 삶이 위험해질 때 위험한 삶을 재료로 쓴 글은 자기 본분과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위험한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경거망동(輕擧妄動)하거나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경험의 뜨거운 열기 속에 푹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만족감을 느끼는(또는 못 느끼는) 직업을 찾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p.349). 역시 로먼 크르즈나릭의 《인생을 짧다 카르페 디엠》 책에 나오는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의 뜨거운 열기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서는 글쓰기의 즐거움과 기쁨은 물론 글쓰기의 재능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글을 잘 쓰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자질, 그리고 능력과 도구가 무엇인지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글을 잘 써지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고 생각하는 모든 고민은 글쓰기의 입력 요인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의 강도가 높고 깊을수록 진짜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검토할수록 글쓰기 능력을 신장시키는 방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왜냐하면 글은 쓰지 않고서는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쓰면 어설픈 글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름대로 쓰임이 생긴다. 써야 어디를 고치면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쓰지 않고 잘 쓸 수 있는 어떤 노하우를 아무리 배운다고 해도 글을 잘 쓸 수 없다. 써야 다르게 쓸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써야 이전과 다르게 쓰는 방법을 몸으로 시도할 수 있다. 쓰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글쓰기 전략과 방법을 구사해도 무용지물이다. 오로지 쓰는 사람만이 이전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을 품는다.     



쓰지 않고 검토를 거듭하면 글은 나오지 않고 토()만 나온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조직에서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위원회를 어떻게 운영할지를 고민하는 위원회가 다시 만들어졌고, 그 두 위원회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위원회를 하나 더 만들었다. 세 위원회는 실제로 실천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해당 문제나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검토하면서 적극 검토하다 시간을 다 허비했다. 위원회를 존재 이유는 특정 과제를 추진하는 팀이나 조직이 본래의 목적에 맞게 정확한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위원회는 주로 복잡한 사안을 정면에 드러내 놓고 검토하고 검토를 거듭하다 의사결정을 자연스럽게 지연시키는 경우가 많다. 검토에 검토를 거듭하다 거의 토할 때까지 검토하는 역기능과 역효과를 산출하기 일쑤다. 국회의원이 대정부 질의할 때 장관에게 질문하거나 따지고 물어보면 한결같은 공통적인 대답은 “검토해보겠다”는 말이다. 국회의원이 화를 내면서 더 격렬하게 따져 물어보면 “적극 검토해보겠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이미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의미하는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를 다른 의미로 바꿔 쓴다. NATO는 No Action Talking Only, 즉 행동은 하지 않고 말로만 하거나 No Action Thinking Only, 행동은 하지 않고 생각만 반복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검토 공화국으로 전락해서 실천과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노력보다 모든 사안을 책상 위에서 검토만 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많다. “통찰이 행동으로 이어지기보다 행동이 통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137쪽). 칩 히스와 댄 히스의 《순간의 힘》에 나오는 말이다. 통찰력을 얻은 다음 행동하려다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시간을 다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행동으로 과감하게 옮기다 보면 놀랍게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행동이나 실천이 그 이전에 계획하지 않았던 놀라운 발상을 불러온다. “배워야만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하면서 배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이다. 완벽하게 다 배우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뭔가를 하려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또 다른 계획을 세우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 범하고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첫 문장을 쓰는 방법, 문법에 맞게 단어를 골라 연결시키는 방법, 목차를 정하고 제목을 정하는 방법, 에세이를 쓰는 방법, 하루 일과를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쓰는 방법 등 온갖 방법을 다 배우다가 기력을 상실하고 더 이상 쓰기를 포기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글쓰기는 오로지 쓰기를 통해서만이 향상될 수 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거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조금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176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 잘 못된 문장과 어설픈 논리, 근거 없는 주장의 나열이나 주어와 술어가 구분되지 않는 장문체 속에서 읽는 사람을 혼란시키는 글을 쓰다 보면 이렇게 쓰면 안 되는구나를 스스로 깨닫는 순간이 온다. 책으로 글을 쓰거나 책 쓰는 방법을 아무리 배웠어도 글쓰기 시행착오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판단 착오를 줄일 수 없다.     



쓰는 방법을 찾아야 쓰는 게 아니라 쓰면 쓰는 방법을 만난다     


“일단 내 앞에 있는 조잡한 도구로 시작하라, 망치로 삽을 만들면 삽으로 사과나무를 심고 사과 열매를 팔면 책을 살 수 있다. 시작을 해야 능력의 확장이 일어난다”(55쪽).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에 나오는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우선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과거의 스토리, 오늘 하루 보고 느낀 점, 늘 만나지만 눈여겨보지 않았던 일상의 사물이나 현상, 그리고 최근 누군가를 만났거나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말이나 문장을 일단 써놓고 다음 문장을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한 문장을 쓰면 다른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온다. 한 장을 쓰기 전에는 다음 문장을 어떻게 써야 될지 고민만 하고 있을 때와는 천지차이다. 문장이 문장을 불러온다는 말이 맞다. “방법을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쓰고 싶어 하면 손이 움직인다. 대상이, 상황이, 문제가 길을 알려준다. 가난한 어머니가 별 재료 없이도 어떻게든 음식상을 차려 내듯 글쓰기란 백지 위에 펜으로 어떻게든 뭘 적어 내는 것이다. ‘어떻게든’은 눈물겨운 것이다. 방법은 실행 속에 있다”(197쪽). 이영광,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에 나오는 말이다. 정말 그렇다. 방법은 실행 속에 있다. 쓰다 보면 다음 문장을 쓰는 방법이 떠오르고 한 장을 쓰면 다음 장을 어떻게 써야 될지 애초에 없었던 생각이 떠오른다. 쓰기 시작하면 이제 시작을 멈출 수 없다. 문장이 다음 문장의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진기한 실험이 계속된다.      



“숙고하는 것이 손전등이라면 행동하는 것은 전조등이다. 행동의 빛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훨씬 더 멀리까지 비춘다. 그러므로 흥미롭고 새로운 장소로 나아가려면 고민의 손전등을 꺼야 한다” (270쪽). 롤프 도벨리의 《불행 피하기 기술》에 나오는 말이다. 백지를 펴놓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지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들 숙고는 숙성된 생각을 고통 끝에 불러내지 못하고 생각은 고사되어 한 글자도 쓰지 못한다.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 일해 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183쪽). 그리고 “머리는 하나지만 손가락은 열 개나 되잖아요”(184쪽). 신영복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책상에서 숙고를 거듭해도 답은 안 나오지만 일단 손가락을 움직여 쓰기 시작하면 열 가지도 넘는 문장이 쏟아져 나온다. 어떻게 써야 될지 막막한 상황에서 안개가 걷히고 앞이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무엇을 어떻게 써야 될지 완벽한 시나리오나 계획을 갖고 출발할 수 없다. 그럴수록 한 글자도 쓰지 못한다. “무엇 하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슨 일이든 다 시도해보는 것이다. 놀이하듯 즐겁게 그리고 일시적이고 즉흥적으로 해보는 것이다(330쪽).” 빈스 에버트의 《세상에서 가장 기발한 우연학 입문》에 나오는 말이다. 말이 되든 안 되는 그건 나중 문제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는 대로 쓰기 시작하라.      



글을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글은 삶으로 쓸 수도 있고 쓴 대로 살아갈 수도 있다. 삶이 글을 불러올 수도 있고, 글이 삶을 바꾸라고 명령할 수도 있다. 분명한 점은 복잡한 삶을 고스란히 글로 담아낼 수도 없고, 글로 쓴 대로 내 삶이 실현되기도 어렵다. 하지만 삶과 글, 그것을 매개하는 생각 사이에는 언제나  삼위일체를 추구하지만 현실은 늘 그 사에 줄일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한다. “삶이 고차 함수인데 글이 쉽게 써지면 반칙이다.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고심하다 보면 자신을 스스로 속일 가능성이 줄어들고, 몸을 숙여 한 사람의 내면의 갱도에 들어가는 훈련으로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149쪽). 은유의 《다가오는 말들》에 나오는 말이다. 처음부터 글이 잘 써지리라고 기대하지 말자. 아예 그런 기대는 안 가질수록 실망도 작아진다. 어차피 나는 글을 쓰기보다 생각을 입으로 말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는가. 적확한 단어를 찾아 문장을 만들어내기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글을 쓰는 연습도 하지 않았다면 깨끗하게 마음을 비우고 누가 보든 말든 내 생각을 쏟아놓자. 그리고 수습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내가 살아온 삶, 살아갈 삶을 고스란히 다 담아내기에는 여전히 언제나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망설일수록 글쓰기 인생은 망한다. “나로서는 지금 당장 써 나가느냐, 아니면 그만두느냐, 둘 중의 하나였다. 전자를 선택했다”(22쪽). 요한 하위징아의 《놀이하는 인간》 중에서 마음에 남는 문장이다. 지금 당장 펜을 들고 쓰거나 키보드로 내 생각을 번역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 



“경험하지 않고 얻은 해답은 펼쳐지지 않은 날개와 같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22쪽).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글을 써보지 않고 펼치는 모든 논리는 관념적 파편에 불과할 수 있다. 내가 직접 내 생각을 내가 갖고 있는 어휘력으로 녹여내는 산고의 진통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글은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는 걸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몸으로 겪은 체험적 느낌을 언어로 번역하는 지난한 과정임을 알게 된다. 머리로 아무리 많이 알아도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확신과 신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확신이 들고 갖가지 의견이 난무해도 나의 주장을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신념이 필요하다. 신념은 관념이 현실에 부딪히면서 상처 받을 때 생기는 주관적 가치판단의 중심에 서 있는 생각이다. 글쓰기에 관한 나의 신념은 무수한 글쓰기를 통해서 시행착오도 경험해보고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문장과 씨름하면서 긴 밤을 보냈던 고통의 흔적과 얼룩이 무늬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기술하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과정이 우리의 남은 삶을 위한 이야기의 요지를 담을 기억의 구조를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136쪽). 아서 프랭크의 《몸의 증언》에 나오는 말이다. 아무리 많은 경험을 갖고 있어도 그것을 일정한 논리체계로 꿰어 나의 스토리로 만들어내는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저 내가 과거에 경험했던 추억의 한 점으로 머무를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경험을 일정한 구조와 체계를 갖춘 스토리로 엮어 나갈 때 비로소 과거에 경험한 사건과 사고에 대한 교훈이 일정한 구조를 갖춘 체험적 지혜로 내 몸에 각인되는 것이다.     



발명(發明)해서 저명(著名)해지기보다 발견해서 예견(豫見)하는 사람이 되자   

  

“발명은 천재가 하는 거고 발견은 성실한 사람이 하는 거다.” 월간 윤종신 발행자, 윤종신 가수가 한 말이다. 글쓰기는 발명보다 발견에 가깝다. 누구나 만나는 일상의 하찮은 사물이나 현상을 작가는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사물이나 현상이 보이면 다른 생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어렵다. 다르게 보려면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 발견은 어제와 다른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결과 생기는 깨달음의 산물이다. 발명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발견은 조금 관심 있게 일상을 관찰하면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발견할 수 있다. 발명도 결국 발견의 누적이 가져온 선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없었던 것이 발명되지 않는다. 기존의 것에 대한 관심으로 생긴 불편함이나 불만족, 그리고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을 발견해야 근본적으로 세상을 이끌어가는 발명으로 이어진다. 발견하려면 매일 보고 만나는 익숙한 현상일지라도 어제와 다른 관심으로 관찰하고 고찰해야 볼 수 없었던 이면의 구조나 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 발견(發見)하려면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보는 나만의 시각과 프레임이 있어야 한다. 발견을 통해 축적한 익숙한 것의 낯선 깨달음이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발명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늘 봤지만 이전과 다르게 관찰하면서 얻은 통찰력으로 소실된 집단적 상상력을 촉발시킬 수 있는 대안을 같이 마련할 필요가 있다.     



발견은 어디에나 있지만 남다른 관심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황무지에서 색다름을 주목할 수 없다.  뭔가 다른 발견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접근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글쓰기야말로 발견을 촉진하는 촉매제다. 모든 사람이 매일 바라보는 사물이나 현상도 작가는 어제와 다른 관심으로 도처에 널려 있는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한다. 거기서 얻은 단순하지만 색다른 통찰력은 그대로 글쓰기의 주요한 재료가 된다. 경험의 축적이 글감의 원동력이 되고 영감을 불러오는 주요한 원동력이 된다. 문제는 어제와 다른 경험을 축적하면서 새로운 통찰력과 직관으로 삶의 지혜를 얻으려고 바라는 데 있다.  “40대가 되면 그들은 작은 집착이나 몇몇 개의 속담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자동판매기가 되기 시작한다. 왼쪽 주입기에 2수를 넣으면 은종이에 싸인 일화가 나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연인과의 데이트도 끊긴다. 과거의 경험에 매몰된 꼰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의 경험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차세대 리더로서 비상할 때 꼰대는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깨어있는 미래로 향할 수 있다.온다. 오른쪽 주입기에 2수를 넣으면 물렁물렁한 캐러멜처럼 이에 달라붙는 듯 한 귀중한 충고가 나온다(131쪽).” 사르트르의 《구토嘔吐》 중에 나오는 말을 끄집어냈다. 고시 공부하는 사람은 법률서적을 뒤적이며 과거로 향하고 리더는 설레는 마음으로 미래를 향한다. 경험이 과거에 묶여 있을수록 미래로 향하는 움직임은 둔해질 수밖에 없다. 생각의 뿌리를 과거에 내리고 미래로 향하려고 발버둥 치는 한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은 언제나 삶과 밀착 접촉하면서 거기서 몸으로 느낀 위험한 발상을 연상으로 연결시켜 보려고 발버둥 치는 가운데 비로소 고개를 내밀어 나타난 사고의 응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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