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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글짓기의 터전으로
바꾸는 7가지 방법

일상은 비상하는 상상력이 글감으로 달려오는 영감의 텃밭이다

삶을 글짓기의 터전으로 바꾸는 7가지 방법


일상은 비상하는 상상력이 글감으로 달려오는 영감의 텃밭이다     



내가 세상에서 배운 생각으로 언어를 사용하여 문장을 만드는 건축이 바로 글짓기다. 글짓기는 혼자 생각을 언어로 번역해 문장으로 건축하는 집 짓기다. 작가는 그 집으로 독자를 초대해서 쓴 글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글짓기는 세상을 향한 짖기다. 글을 쓰면서 하루를 반성하며 나를 꾸짖기도 한다. 반성하고 성찰하는 글을 쓰는 동안은 나의 잘못을 스스로 질책하고 바로잡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짓기는 또한 내면의 아픔을 토해내며 삭히는 울부짖기다. 울부짖는다고 아픔이 해소되지 않지만 적어도 아픔을 감당하는 내공은 깊어진다. 하루를 살면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지는 삶과 작별하고 어제와 다르게 살아내려고 버둥거린다. 안간힘을 쓰면서 애간장을 녹인다. 글쓰기는 이런 삶을 살아가면서 힘들여 쓰는 애쓰기이기도 하다. 글감은 애쓰면서 살아가는 일상에서 떠오르는 영감이다. 글을 짓는 과정은 특정 시간에  어떤 공간에서 만났던 인간과의 교감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전쟁 같은 하루를 견디고 버티면서 내면에 쌓인 슬픔이나 고통과 같은 감정을 가끔은 억누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부르짖기도 한다. 글짓기는 바로 이런 점에서 내 감정을 언어로 번역, 문장에 담아 세상을 향해 호소하는 울부짖기나 부르짖기다. 고독으로 농축된 생각의 정수를 언어로 정제해서 수많은 독자를 향해 울림으로 다가가는 울부짖기다. 늘 반복되는 하루 같지만 폴란드 여성 시인,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는 시에서 두 번은 없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맹자(孟子)에 좌우봉원(左右逢原)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좌우 주위에서 맞닥뜨린 모든 사건과 현상들이 내겐 스승이 되고 수양의 원천이 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일상은 비상하는 상상력이 날아가는 글쓰기의 텃밭이다.  "책은 우주다. 세계는 책이다. 우주만물은 하나하나가 열려진 텍스트다. 거기에 적힌 의미의 정수를 빨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훌륭한 독서가다”(45쪽). 정민의 《죽비소리》에 나오는 말이다. 책은 우주를 담고 있고 세계가 들어 있으며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이 녹아 있다. 책은 저자가 매 순간을 보내면서 몸으로 느끼고 깨달은 남다른 생각을 글로 써서 묶은 한 편의 파노라마다. 



저자는 책 속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다시 태어난 수많은 글로 저자의 한 세상을 묶어낸 스토리(story)의 보고(寶庫)다. 저자가 살아내려고 버둥거리며 살아온 삶에 담긴 사연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 바로 스토리가 된다. 그 스토리가 시간과 더불어 축적되면 나의 히스토리(history가 되며 그 히스토리 속에 내가 살아가는 나만의 방식(way)이 열린다. 모든 스토리는 지금 여기서 저자가 만나는 인간과 시간과 공간의 합작품이다. 스토리는 진공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저마다의 스토리는 살아내려고 버둥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삶의 현장에서 태어난다. “시의 밑바닥에는 인생이 있어야 해요. 아, 이게 인생이구나, 하구 느껴지면 제대로 씌어진 시예요.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일을 한 거예요”(p.81).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글의 밑바닥에는 인생이 있어야 해요.. 아, 이게 인생이구나, 하구 느껴지면 제대로 써진 글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일을 한 거예요.” 누구나 매일매일 경험하는 일상적 삶의 무대는 글짓기의 터전이다. 주의 깊게 주변을 살펴보면 일상은 글감이 잠자는 영감의 텃밭이다.



1. 덕분에 행복하다고 감사하며 글쓰기

감사하면 감동하고 감동하면 감탄하는 세상이 펼쳐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다. 아침에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풍성한 식탁은 아니지만 하루에 세 끼 밥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아직은 걸어 다닐 수 있어서 감사하고 매일 밥 먹듯이 운동하며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 아직은 두 눈으로 세상의 경이로운 기적을 관찰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두 발로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어서 감사하다. 매사를 덕분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자.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누군가가 노트북을 개발해준 덕분이고 책과 의자를 누군가 만들어준 덕분에 이렇게 앉아서 편안하게 생각의 향연을 펼칠 수 있다. 덕이 넘치는 연못, 덕택(德澤)에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감사할 일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오늘도 봄부터 땀을 흘려 한여름의 폭염을 이겨내고 땀을 흘려 가을에 추수하는 농부 덕분에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음에 무한 감사를 드린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음식과 다르게 뇌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지식 덕분에 생각도 나날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다른 세계에서 색다른 깨달음을 얻어 안간힘을 쓰며 쓴 책 덕분에 마음의 양식을 거둘 수 있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힘든 사투 덕분에 편안함을 즐기고 배경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많은 노동의 덕분에 전경으로 드러나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일상은 그 자체가 글이고 책이며 세상이다.  


   

2. 매일매일 뜻깊은 순간을 떠올리며 글쓰기 

일상은 글감이 영감으로 비상하는 텃밭이다     


일상은 감사할 일도 넘쳐나지만 매 순간이 기적이다. 모든 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순간이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자두 하나를 보고도 감탄하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에 무불경(無不敬)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주와 자연 삼라만상에는 존경하지 않을 만한 것이 없다. 모두가 저마다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갖고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생명체든 비 생명체든 다 거기에 있는 이유가 있고 살아가는 방식과 원리대로 자기 삶을 살아간다. 일상의 무수한 생명체든 무생물이든 늘 마주치면서 얻는 깨달음의 정수를 잊고 살아간다. 무불경의 근저에는 세상의 어떤 만물도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물체나 생물체는 없다는 것이다. 매일 보고 마주치는 일상의 작은 생명체나 주변의 사물이지만 어제와 다른 눈으로 바라볼 때 그들은 모두 글감을 자극하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익숙한 현상이나 사물을 어제와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한 가지 방법은 입장을 바꿔서 그 들의 편에 서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역지사지나 물아일체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들이 말하고 싶은 고민이나 애환이 들리기 시작하고 하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다. 매일 내 몸을 떠받들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의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의자는 얼마나 힘이 들까? 의자는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보면 의자에 관한 하나의 시가 탄생할 수도 있다. 주변에서 만나는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자유로운 생각의 날개를 달아보면 갑자가 색다른 글감이 나를 엄습할 수 있다.     



3. 책 읽다가 인두 같은 한 문장으로 이어 쓰기

인두 같은 한 문장에서 거두절미(去頭截尾)의 지혜를 스며들어 있다.     


색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글쓰기에 방해를 받을 때 누군가 말한 명언이나 작가의 문장을 내가 말하고 싶은 방식대로 바꿔 써 보면 막혔던 생각의 출구가 활짝 열리면서 전두엽에 환한 불이 켜지는 경우를 만날 수 있다. “훌륭한 예술가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멀리서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피카소의 말이다. 이 명언을 훔쳐다 석박사의 차이점을 밝히는 데 사용하면 이런 문장이 탄생된다. “석사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 박사는 멀리서 훔친다.” 이 문장을 한 번 더 바꿔서 쓰면 “이류는 티 나게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 일류는 티 안 나게 원리를 훔친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글감을 찾아서 백 지위에서 새로운 창작을 시도하기보다 이미 있는 의미심장한 명언이나 문장을 나의 아이디어를 추가해서 번안하면 색다른 문장이 탄생된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 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7쪽).” 우치다 다쯔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을 독서에 대입해서 다르게 바꿔 쓰면 재미있는 문장이 탄생된다. “‘책을 읽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의지의 결핍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읽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 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지금 상태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습관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책을 읽지 않게 된 배경에는 나태함보다 읽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근면의 성과라는 새로운 통찰력을 기존 문장을 바꿔 쓰기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4. 우연히 마주치는 글귀로 쓰기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삶도 기울어진다     


낯선 생각을 잉태하게 만드는 우발적 마주침이 깨우침을 준다. 지나가다 생각을 잠시 멈추게 만드는 간판의 글귀를 만난다. 이태리면사무소? 아! 이탈리안 음식 전문점이다. 면만 전문적ㅇ로 파는 가게라는 뜻이다. 혼탕카페. 폐업한 목욕탕을 카페로 바꿔서 목욕합니다. 커피합니다라고 입간판을 써 붙여 고객을 유혹한다. 홍대 고깃집 이름, 육(肉)갑하네라는 가게가 있다. 고기 육(肉)자를 집어넣어 만든 재치 만점을 음식점 이름이다. 닭치거라. 치킨집 이름이다. 영계소문 역시 치킨집이다. 이쑤신 장군, 삽겹살집 간판이다. 거기 먹다 이빨 사이에 낀 고기를 이쑤시개로 제거하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놈이라면. 라면집이다. 분식회계전문. 분식집 이름이다. 일상 언어를 패러디하거나 살짝 바꿔치기해서 비슷한 의미나 발음을 연상시켜 순간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간판들이다. 거리에서 만나는 재미난 간판 문구처럼 기존 문구에 특정 글자를 바꾸거나 패러디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짧은 카피 같은 문구를 뽑아낼 수 있다. 이런 간판에 담긴 촌철살인의 지혜를 생각해보는 짧은 글을 쓸 수도 있다. 사람의 생각을 순간적으로 사로잡는 것 중에 광고 카피를  빼놓을 수 없다. 치킨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 배달의 민족이 만든 치킨 광고 카피다. 어느 목욕탕 간판에 붙어 있는 말,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보자마자 웃음이 나오지만 잠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촌철살인의 지혜가 담긴 말이다.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에서 몸에 붙은 더러운 때(dirt)를 순간이나 시간을 의미하는 때(time)로 바꿔 쓰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 누구나 재능의 꽃이 피는 때가 온다. 그때를 위해 지금 부지런히 실력을 연마하는 공부를 하거나 연습을 하자는 뜻으로 바꿔 쓰면 똑같은 때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소한 간판이나 늘 접하는 광고 카피라도 눈여겨보거나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하는지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생각지도 못한 글감을 얻을 수 있다.     



5. 사진으로 사유하며 쓰기

관심으로 포착해서 진심을 담아내면 진실이 드러난다     


글은 꼭 책을 통해서 만나지 않고 일상의 수많은 읽을거리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가을이 단풍으로 불게 물들면서 만산홍엽으로 변해갈 때 한 여름의 녹음으로 축적한 에너지를 잃어버리고 힘없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낙엽도 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낙엽을 사진으로 찍어 새순에 희망을 담고 시작해서 한여름의 폭염을 연료로 짙푸른 녹음을 자랑하던 나뭇잎을 되새겨본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불태우면서 단풍으로 세상을 뜨겁게 달구다 자신을 붙잡고 있었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정처 없이 떠도는 나뭇잎의 일생을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의 비약일까. ‘계단’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잠시 생각해본다. 계단의 의미는 단계적으로 올라가라는 의미가 아닐까. 계단을 뒤집어 생각해보니 단계가 나오지 않는가. 생일잔치를 아이를 보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찍은 다음 생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 일지를 생각해본다. 생일을 뒤집어 보니 일생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아 생일은 일생일대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행복한 하루를 보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겨울로 접어들면서 모든 낙엽을 땅으로 돌려주고 앙상한 나뭇가지로 삭풍을 견디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리고 나뭇가지가 여러 가지지만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말을 생각해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 마찬가지 문제다. 숲 속에 들어가 줄기차게 자라는 나무줄기와 줄기 사이를 사진으로 찍은 다음 안도현 시인의 ‘간격’이라는 시를 떠올려본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나무줄기 라야 줄기차게 자랄 수 있다는 깨달음을 불현듯 얻을 수 있다.     

 


6. 사람과의 마주침으로 얻은 깨우침 쓰기

만나는 사람을 바꾸지 않으면 사람이 위험해질 수 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인간관계의 역사적 과정이 한 인간의 성격과 인성을 만들어간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오늘의 내가 되는데 큰 도움을 준 은인일 수도 있고, 깊은 상처를 준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다. 은혜를 입은 사람에는 미덕을 배우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는다. 내가 살아오면서 생긴 내 생각이라는 것도 어디선가 읽은 다른 작가의 생각으로 뒤섞인 것이고, 내가 겪은 경험도 결국 다른 사람과 결부되어 얽힌 얼룩과 무늬다. 지난 일주일을 생각해보자. 내가 만난 사람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일하면서 가까운 동료나 선배 또는 상사나 후배와의 만남 속에서 내가 깨달은 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깊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고 긴 만남이었지만 견디기 어려운 피곤한 만남일 수도 있다.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나는 지난 일주일을 보낸 것이고, 그 일주일 속에서 나는 이전과 다른 생각과 경험을 쌓아나가며 또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해나가는 것이다. 글은 사람과 만남 속에서 태어난다. 내가 배운 생각과 다른 경험, 그리고 언어도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내 몸 안으로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는 매개체들이다. 나로 하여금 어제와 다른 생각을 품게 만드는 것도 타자의 생각이 내 생각 속으로 불법 침입해서 생긴 사유의 흔적 덕분이다. 글은 이런 사유의 흔적을 토해내면서 적확한 언어로 짓는 문장 건축의 결과물이다.     


7. 마지막 단어로 쓰기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한 가지 단어에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서 ‘마지막 단어(Final Vocabulary)’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마지막 단어’란 개인 혹은 집단이 최후까지 의지하는 신념어이자 보통 의식 아래 있다가 삶이 흔들릴 때 표면 위로 솟아올라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결연한 단어다. 마지막 어휘는 보통 의식 아래 있다가 삶이 흔들릴 때 표면 위로 솟아올라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결연한 어휘다. 예를 들면 간디에게 마지막 어휘는 비폭력일 수도 있고 부처님에게는 자비, 공자에게는 인(仁)이 될 수 있습니다. 잡스에게는 혁신일 수도 있고, 리처드 브랜슨에게는 상상이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 사르트르에게는 실존, 스피노자에게는 코나투스, 니체에게는 아모르파티, 라캉에게는 욕망,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언어가 로티가 말하는 마지막 어휘다. 저마다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한 가지 단어,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내 삶을 이끌어가는 견인차 같은 단어가 지금 여기서의 삶에서 머무르지 않고 보다 소중하고 숭고한 삶, 자기를 넘어 타자와 공동체로 연결되는 삶을 꿈꾸게 만든다. 리처드 로티의 마지막 단어는 의사결정과 판단 기준이자 나다움을 드러내는 핵심가치다. 나의 마지막 단어는 ‘도전’이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호기심의 발로이자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삶의 원동력이며, 능력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내 삶의 ‘카니발’ 바로 도전이다. 이런 마지막 단어와 관련된 과거의 기억나는 체험이나 재미난 에피소드, 웃지 못한 사건과 사고를 반추해서 현재로 끌어다 쓰면 훌륭한 글쓰기의 전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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