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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은 가능하지만
인공지혜는 불가능하다

지식으로 지시하지 말고 지혜로 지휘하라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 지성:
지식으로 지시하지 말고 지혜로 지휘하라


4차 산업혁명은 기계나 기술이 주도하는 혁명이 아니라 기계나 기술을 만드는 사람이 주도하는 혁명이다. 사람혁명 없이 4차 산업혁명도 없다. 사람혁명 없이 달려가는 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는 암울한 그림자가 기다릴 뿐이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사람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밝혀내야 한다.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이나 기계가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을 한다고 해도 동물성이나 식물성, 사물성이나 기술성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특이점(singularity)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이를 개발하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4차 산업혁명이 밀려오면서 인간의 지능과 지식은 인공지능이 대체하고 있다. 지능으로 지식을 축적하는 시기가 저물고 지성으로 지혜를 깨닫게 만드는 교육혁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때일수록 지능으로 축적하는 성적보다 지혜를 쌓아가는 적성을 강조하고, 정답을 찾아내는 모범생보다 문제를 일으키는 모험생이 필요한 시기다. 


성적을 뒤집어 적성을 찾고,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재창조하기 위해 지식으로 지시하는 전통적 교육에서 지성으로 지휘하는 혁신적인 학습으로 과감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지식은 책상에서 공부해서 습득할 수 있지만 지혜는 몸을 던져 체험하는 가운데 체화되거나 육화 된다. 자료를 정보로 바꾸고 문제 상황에 적용하는 연습을 통해서 생긴 지식까지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습득하고 있다. 즉 인간의 지능으로 습득한 지식은 인공지능에 비해 더 이상 인간의 경쟁력이 될 수 없다. 이제 지능을 넘어 지성으로 지식을 능가하는 지혜를 개발할 때 인간의 고유한 경쟁력은 살아 숨 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성으로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전개해야 할까요?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유한 첫 번째 능력은 바로 호기심을 기반으로 질문하는 능력이다. 기계는 정해진 알고리즘 안에서 가능한 질문을 하지만 인간은 무한한 호기심을 품고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한다. 인공지능도 질문을 다양한 경우의 수에 따라 무한정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쉽게 흉내내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바로 호기심을 기반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지나가다가 딱따구리가 나무를 찍어서 집을 짓는 걸 목격하고 아빠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빠, 딱따구리가 저렇게 나무를 찍는 데 왜 딱따구리는 두통에 안 걸려?” 아빠는 아마도 이런 질문에 당연한 거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에게 딱따구리가 두통에 안 걸리면서 나무를 찍어 집을 짓는 모습이 신기했을 것이다. 호기심은 동심을 먹고 산다. 


또 다른 예는 개미가 지나가는 지네에게 물어보았다. “지네야, 너는 앞으로 걸어갈 때, 수많은 다리 중에서 어떤 다리를 첫발로 내디뎌?” 이 질문을 받은 지네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지네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늘 하던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앞으로 걸어 다닌 지네가 깜짝 놀란 이유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질문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을 멈추어 서서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만드는 자극제다. 호기심의 물음표가 바뀌면 감동의 느낌표가 바뀐다. 내가 던지는 질문의 성격과 방향이 내가 얻을 수 있는 답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한다. 질문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전대미문의 색다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관문이다. 질문이 바뀌면 관문이 바뀌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뀐다. 질문은 익숙한 집단의 소속감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 진입하려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두 번째 기계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은 감수성을 기반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감수성은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공감 능력이다. 감수성으로 포착되는 측은지심이 있어야 타인의 입장에서 보고 들으며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감능력이 생긴다. 공감능력은 머리로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가슴으로 타인의 아픔을 마치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고 실제로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능력이다. 머리로 계산하면 분명히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타자의 아픔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미덕은 인간의 소중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내가 타자의 입장이 되어서 직접 해보지 않으면 공감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즉 책상에서 앉아서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가슴으로 느낌이 오지 않는다. 


예를 들면 열 십(十)자를 보고 교통경찰은 사거리라고 보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이라고 볼 수 있다. 약사나 의사는 적십자, 목사는 십자가로 본다. 똑같은 상징 기호를 보고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이유는 자기 경험적 범주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가 열십자를 보고 교통경찰처럼 사거리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산부인과 의사가 교통경찰처럼 열십자를 보고 사거리로 보려면 산부인과 의사직을 잠시 그만두고 교통경찰처럼 사거리에 나가서 교통정리를 해보는 체험을 해봐야 한다. 공감 능력은 책상에서 머리로 생각한다고 생기지 않는 이유다. 머리는 좋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는 책상 똑똑이(Book Smart)가 문제가 되는 것도 공감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리더는 다양한 체험 현장에서 타자의 입장이 되어 직접 체험하면서 그들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껴보는 이유다.



기계가 대체하기 어려운 세 번째 인간의 고유한 능력은 이연연상(二連聯想)의 상상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창의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은 밑도 끝도 없는 공상이나 허상, 망상이나 몽상 또는 환상이 아니다. 상상력의 출발은 감수성으로 포착된 타인의 아픔이다. 타인의 아픔에는 불편함, 불만족스러움, 불안감 등이 포함된다. 또는 고객이 말 못 할 사연을 갖고 혼자 견디며 삭히는 슬픔도 해당된다.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을 사랑할 때 그 아픔이나 슬픔을 치유하거나 해소하려는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예를 들면 한글을 모르는 국민을 긍휼히 여긴 세종 대왕이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밤잠을 안 자고 두 가지 이상의 아이디어를 연속해서 연결시켜 상상하는 이연연상(二連聯想)을 통해 한글 창제의 꿈을 꾼 것이다. 이처럼 상상력은 타자의 아픔이 숨을 죽이고 내재되어 있는 구체적인 현장에서 싹이 튼다. 


공상(空想)이나 허상(虛像), 망상(妄想)이나 몽상(夢想) 또는 환상(喚想) 뒤에는 힘력(力)자가 붙지 않는다. 즉 공상력, 허상력, 망상력, 몽상력, 환상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상(像 또는 想)으로 끝나는 말 뒤에 힘력(力)자가 붙는 단어는 상상력(想像力)이다. 상상력도 내가 직접 타자 입장이 되어 체험해보면 더욱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원동력이 되며 창조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상상력을 통해 잉태하는 창의적 아이디어는 없었던 생각을 새롭게 제기하는 발상(發想)이 아니라 익숙한 기존의 것을 낯선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연상(聯想)이다. 감수성으로 포착된 타인의 아픔을 어떻게 하면 치유할 수 있을 것인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이 바로 이연연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창의력이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근간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보는 가운데 떠오르는 연상의 결과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 해결을 통해 깨닫는 체험적 통찰력이자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다. 실천적 지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작,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말로 나온다. 영어로 번역하면 실천적 지혜라는 말이다. 딜레마 상황에 빠졌을 때, 심사숙고한 다음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공동의 선을 위해 올바르게 실천하는 가운데 생기는 지혜가 바로 실천적 지혜다. 실천적 지혜는 단순한 사실관계나 법률과 규칙이나 원칙, 직무기술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 갈등하는 몇 가지 선의의 목표를 조율하거나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절차와 규율만 고수하는 전문가가 많을수록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아진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의 《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나온다. 레모네이드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가게에 하나밖에 없는 마크스 하드 레모네이드(Mike's Hard Lemonade)를 무의식적으로 사주었다.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 레모네이드가 알코올 도수 5도인 제품인 줄도 모르고 레모네이드라는 글씨만 믿고 아들에게 사준 것이다. 때마침 경비원이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던 아들을 발견하고 경찰에게 신고한 것이다. 경찰은 구급차를 불러 급히 아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지만 아들에게 아무런 알코올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의사들은 아들을 퇴원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아들을 아동 보호소의 위탁 가정에 맡겼다. 경찰은 원하지 않았지만 절차에 따라야 했다. 3일 동안 보호소에 머문 아들은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가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아버지는 집을 떠나 2주 동안 호텔에 투숙해야 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판사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주정부의 법률적 절차에 따라야 했다. 2주가 지나서야 가족은 다시 만났다. 알코올이 든 음료수인 줄 모르고 아들에게 건넨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음료수를 정기적으로 주거나 아이가 알코올을 남용해도 눈감는 아버지와 동일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상황에 따른 도덕적 판단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지 않고 그냥 관례대로 규율과 절차에 따라 법집행을 감행한 판사의 고지식함이 가져오는 어처구니없는 사례다. 



원칙은 소중하지만 판단이 실종된 원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규율이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원칙은 또 다른 원칙과 갈등하지만 조율되어야 한다. 엄격한 규율과 교조적인 원칙이 상황판단과 조율에 필요한 실천적 지혜를 주변으로 몰아낸다면, 훌륭한 판단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려면 공감과 거리감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겪고 있는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다른 이의 관점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도 주어진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공감하는 의사는 미묘한 감정적 실마리를 알아채는 통찰력과 상상력이 있으며, 말로 표현하지 않는 내용을 듣기 위해 몸짓 언어와 얼굴 표정을 읽어내는 예민함이 있다. 


현명한 의사는 공감을 통제하고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다양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의 체험적 축적이 어느 순간 세상을 색다른 가능성으로 유도하는 실천적 지혜를 가져다준다. 4차 산업혁명이 주도하는 기술혁명 시대에 기술적 실수로 발생하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인간밖에 없다. 답이 없는 딜레마 상황에서 순간적인 판단과 과감한 추진으로 실행하면서 축적하는 실천적 지혜는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런 지혜는 책상공부를 통해서 머리로 배울 수 있는 지식의 수준을 넘어선다. 오로지 온몸으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판단 착오를 줄여나갈 때 자신도 모르게 몸에 각인되면서 체화되는 지혜다.



이외에도 인간이 지니는 소중한 지혜는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잠시만이라도 시름을 잊고 웃음 짓게 만드는 유머 구사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유머는 체험적 깨달음을 촌 철살인의 지혜로 버무려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유머는 맥락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과 순발력을 필요로 한다. 상황과 대상에 적합한 유머 코드를 포착, 기발하고 미묘하게 비틀어야 비로소 상대가 웃음을 짓는다. 생각지도 못한 언어적 표현, 타성에 젖은 관성을 깨는 동심이 어우러질 때 사람들은 기대가 망가지면서 웃음을 짓는다. 예를 들면 사과 열 개 중에서 세 개 먹으면 몇 개 남느냐고 물어보자. 대부분의 논리적인 사람은 일곱 개 남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대답을 듣고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어떤 아이가 손을 들고 “세 개 남는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먹는 게 남는 거니까”라는 대답을 듣고 안 웃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기대를 망가뜨리면서 틀밖에서 뜻밖의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머는 틀에 박힌 생각을 통렬하게 깨부수면서 기대를 저버릴 때 나도 모르게 터지는 웃음이다. 사람은 뻔한 대답을 듣고 웃지 않는다. 기대 밖의 답, 기대를 망가뜨리는 대답,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대답을 듣는 순간 사람은 시름을 잊고 잠시라도 크게 웃는다. 인공지능 시대, 인공 지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지혜는 기존 지식을 논리적으로 편집하고 가공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과정에서 생기지 않는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비전문가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안간힘에서 그동안 축적된 체험적 깨달음이 동원되는 과정에서 번뜩이는 지혜가 발휘된다.



인공지능이 인간 지성에 비해 결정적으로 취약한 능력은 맥락적 언어 구사 및 이해 능력이다. 예를 들면 사랑에 빠진 사람이 초반에 주고받는 “사랑해”라는 말과 어느 정도 사랑이 무르익어가면서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 “사랑해”라는 말은 전혀 뉘앙스와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다르다. 물론 헤어지기 일보 직전에 두 연인이 주고받는 “사랑해”는 이미 분노와 적개심 또는 복수심이 불타는 감정이 스며들어 있어서 초기와 중기에 주고받는 “사랑해”와는 또 다른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맥락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니는 언어적 의미를 정확히 파악해내기 위해서는 화자가 어떤 의도로 그 상황에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말하는 사람의 감정상 태나 표정, 언어적 여운에 담긴 뉘앙스를 상황적 맥락에 비추어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과연 복합적인 사고능력을 인공지능이 갖출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명절 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며느리는 이번 명절에는 코로나 19로 힘든 상황이니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시어머니가 오지 말라는 이야기는 진짜 오지 말라는 말일까?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의중이 들어 있는 말일 가능성도 높다. 의중을 꿰뚫어 보려면 그 말을 하는 사람과 다양한 인간적 관계 맺음을 비교적 오랫동안 해보지 않고서는 상대가 수시로 사용하는 언어적 의미의 심층을 포착하기 쉽지 않다. 인공지능은 이런 점에서 인간의 체험적 지혜를 흉내 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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