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휘발되지만 기록은 오래도록 어록으로 남는다
적자생존의 의미는 '적'는 '자'만이 '생존'한다는 의미다!
기억은 휘발되지만 기록은 오래도록 어록으로 남는다
강의하기로 정해진 시간보다 한 시간 앞서 도착했다. 한적한 카페에 앉아서 앞으로 전개될 수업과 강연 구상을 하면서 다각적인 상상을 해본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날아가다 문득 어딘가에 잠시 정착하는 순간 단상의 실마리를 잡고 연상으로 뻗어나가는 과정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쫓아간다. 그 사이에 부각되는 아이디어를 붙잡아 휘발되기 전에 낙서라도 남긴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기 어렵다. 특히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지면서 종적을 감춘다. 퍼뜩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메모하는 방식을 묘계질서(妙契疾書)라고 한다. 묘계(妙契)는 번쩍 떠오른 기발한 생각이고, 질서(疾書)는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서 빨리 메모하는 것을 말한다. 묘계는 언제 올지 모른다. 깊은 상념에 잠기는 와중에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고 멍 때리는 순간에 문득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늘 질서 할 수 있는 메모장과 펜을 들고 다닌다.
진부한 타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끊임없이 색다른 생각이 잉태될 수 있는 신선한 자극에 의도적으로 노출시켜 놔야 한다. 색다른 책을 남다르게 부단히 읽어가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부단히 메모하고, 낯선 곳에서 만나는 마주침 속에서 다가오는 깨우침과 뉘우침과 가르침이 사라지기 전에 메모한다. 틀에 박힌 생각은 입력 없이 출력장치만 바쁘게 가동해서 생긴 관성의 산물이다. 색다른 생각의 임신은 늘 낯선 자극이 입력되어야 생기는 것도 아니다. 기존 생각을 다르게 정리하고 표현하는 가운데에서도 생긴다. 흔해빠진 생각도 이전과 다른 옷을 입혀 밖으로 내놓으면 식상해 보이지 않고 상식을 깨는 색다른 사고 양식으로 세상에 나온다. 이전과 다른 언어로 조합하거나 다른 구도로 기존 개념을 구조화시키면서 도식화해보면 전혀 다르게 각성을 선물로 가져다준다. 이런 점에서 생각하는 과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해시켜가면서 복잡한 생각을 단순화시켜 보면서 동시에 추상화 과정을 왕복하다 보면 진부한 생각도 색다른 옷을 입고 낯선 자극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복잡한 생각을 단순화시키는 도해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관념의 파편도 일정한 논리체계에 맞게 재구조화되기도 한다. 모래알 같은 개념도 구슬에 꿰어야 신념으로 재탄생한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읽으면서 느끼거나 깨달은 점을 나의 문제의식과 언어로 재정리해놓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정리해고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생각은 늘 사유의 바다를 노닐지만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하거나 끊어진 채로 산만하게 흩어지는 단상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관계를 만들어보고 도해시켜 봐야 한다. 사유의 흔적을 끄적끄적 적으면서 단상(斷想)을 축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번개처럼 전두엽을 밝혀주는 색다른 생각이 쏜살같이 달려오고, 이것저것 연상(聯想) 하다 보면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이상의 이질(異質)이 하나로 조합되어 동질(同質)의 형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여기저기 상상(想像) 하다 보면 현재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한계를 넘어 낯선 사유의 세계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데려다주고, 이리저리 구상(構想)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地圖)’가 갑자기 그려지기도 한다.
“강물은 바람 때문에 물결치지만 바람 때문에 갈 길을 바꾸지 않는다(p.23).” 장태평 시인의 《잠언시집》 의 ‘강물은’에 나오는 말이다.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은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막연한 기대와 불안감으로 시간을 낭비할 경우, 지금보다 나중에 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위기는 앞으로도 반복해서 다가올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코로나 위기 때문에 사유의 깊이를 파고들지 않을 수 없다. 넓게 내다보면서 깊이 파고들고 수시로 내가 파 들어간 사유의 깊이로 기피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자주 주변을 둘러보면서 한눈을 팔아야 한다. 한눈에 반하는 대상과의 마주침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생각을 가다듬고 일상을 살펴보면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사건과 사고는 사유와 사고의 원천으로 작용하면서 이전과 다른 깨달음을 주는 스승이다. 사건(事件)은 사유(思惟)가 잉태되는 터전이고, 사고(事故)는 사고(思考)가 바뀌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어제의 생각을 갖고 틀에 박힌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방식으로 색다르게 생각하려고 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당신은 오늘도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생각한다는 것은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반복하려는 관성에 통렬한 시비를 걸면서 던진 물음표 속에서 감동적인 느낌표를 찾아내려는 안간힘이다. 물음표가 품은 의문이 내일에는 감동의 느낌표로 다가와 새로운 관문이 활짝 열릴 수 있기를 기대하고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