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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사고 없는 관찰은 맹목이다

관찰하고 기록하며 실험을 반복하면 통찰이 다가오고 기적이 일어난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개발하는 실천적 삼단논법:

관찰하고 기록하며 실험을 반복하면 통찰이 다가오고 기적이 일어난다

     

창조는 통찰이 낳은 산물이고 통찰은 관찰의 결과다. 자기만의 이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관심을 갖고 관찰하면서 일어나는 색다른 통찰이 필요하다. 관찰(觀察)은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는 것이다. 관찰 없이 통찰(洞察) 없고 통찰 없이 색다른 생각의 창조가 일어나지 않는다. 통찰은 불규칙해 보이는 평범한 일상을 관찰하는 순간 불현듯 찾아오는 선물이다. 관찰은 자동적으로 통찰로 이어지지 않는다. 관찰한 결과를 면밀히 따져보는 집요한 물음 속에서 영감이 서서히 익어가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일정한 패턴이나 관계를 발견하면서 갑자기 통찰이 부각된다. 

     


관찰은 비범한 관계를 발견하는 통찰의 출발점이다


만유인력 법칙을 비롯해서 과학적 발견과 창조의 첫 번째 단계는 관찰이다. 관찰은 관심을 먹고 자란다.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관찰해도 통찰에 이르지 못한다. 깊은 관심으로 관찰하면 색다른 인식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관심’은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알고 싶은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 안다는 것은 사기이자 허구다. 대상에 대한 앎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앎의 주체와 앎의 대상 간에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대상을 알 수 없다.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깊은 관계가 맺어졌다는 이야기다. 깊은 사랑과 관심이 돈독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관심’이 없으면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관심’을 갖고 ‘관찰’하면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무관심으로 ‘관찰’하면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아무 ‘관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심’을 갖고 ‘유심’히 ‘관찰’하면 보이지 않던 이면의 ‘관계’가 겉으로 드러난다. 관찰을 통해서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구축할 일정한 패턴이나 관계를 발견하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한다. 모든 생각은 일상이나 주변 현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가운데 생긴다. 아무런 의미 없이 발생하는 산만한 현상은 모두 모래알 같은 자료다. 도처에 산재하거나 아무런 관계없이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자료 수준의 사에 머무른다.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고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며 책을 읽으며 저자의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관찰하면서 부단히 기록하는 와중에 새로운 생각이 잉태되기 시작한다. 관찰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기록하지 않으면 관찰로 얻은 영감이나 아이디어가 한순간에 휘발될 수 있고, 나중에 일정한 논리적 패턴이나 관계를 발견하는 데에도 애를 먹을 수 있다. 중심을 잡고 자세히 살펴는 관찰이야말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자극제다. 


예를 들면 교회 다니시는 분들을 관심을 갖고 유심히 관찰한 결과 놀라운 패턴이나 속도와 각도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했다. 교회 다니시는 분들의 주행속도에 따라 찬송가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60Km 주와 함께 길 가는 것

80Km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100Km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120Km 주여 나 이제 갑니다!


주행속도와 찬송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유심히 관찰한 결과 속도가 빨라질수록 하늘나라로 빨리 갈 수 있다는 놀라운 관계를 발견한 것이다. 속도가 빨라지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각도가 좁아진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각도가 좁아지는 이유는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속도가 빨라지면 각도가 좁아진다는 원리도 관찰하고 고찰해서 통찰한 결과다. 속도와 각도의 관계가 발견된 것은 달리는 주행속도와 찬송가가 달라지는 장면을 반복해서 관찰한 덕분이다. 속도와 각도를 이제 목표와 행복이라는 개념과 연결시켜 새로운 관계를 확장시킬 수 있다. 행복은 목표를 빨리 달성하는 ‘속도’에서 오지 않고 ‘각도’와 ‘밀도’에서 온다. 각도를 넓게 확장하고 삶의 매 순간 느끼는 밀도감을 늘리면 행복해진다는 관계는 추상적으로 얻은 관념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을 관찰해서 얻은 통찰의 산물이다. 목표 달성 속도가 빨라지면서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각도는 좁아지고 매 순간 삶의 충만감을 느끼는 밀도감 역시 떨어진다. 세상을 어제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속도를 줄이고, 각도를 넓혀야 한다. 각도를 넓혀야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관문도 보이기 시작한다. 관찰은 이처럼 아무런 관계없는 것처럼 평볌한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을 기르는 비범한 관계를 발견하는 원동력이다. 



관찰결과를 고찰하면서 자기만의 성공원칙과 규칙을 만든다


관찰과 통찰 사이에 고찰(考察)이라는 다리가 있다. 관찰이 통찰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관찰한 것을 고찰해야 한다. 고찰은 어떤 것을 깊이 생각하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며 연구하는 과정이다. 관찰을 통해 의미 없이 발생하는 산만한 현상이나 사건이 일정한 관점으로 체계화되고 정리된다. 관찰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나 사물 간에 관계를 만들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이에 비해서 고찰은 관찰을 통해 정리된 구조적 관계나 일정한 패턴의 의미를 이리저리 따져보고 그 의미를 궁리를 거듭하면서 연구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만드는 잉태과정이다. 고찰은 관찰을 통해서 부각된 현상이나 사물 간의 연계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석하기 위해 조목조목 따져보며 심사숙고하는 과정이다. 고찰단계부터 비판적 사고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주어진 현실에서 관찰한 복잡한 현상, 난리법석이 일어나고 진저리가 쳐지는 루틴한 삶에서 건져 올린 자료를 일정한 범주로 나누고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개별적 현상의 의미나 그것을 움직이는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자문하고 자답하는 과정이다. 자료가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과정에서 경향성이나 방향성을 잡아낼 수도 있고, 특정 자료가 숨기고 있는 잠재성이나 가능성도 발굴해 낼 수 있다. 


아무리 오랫동안 관찰해도 관찰하면서 얻은 아이디어나 영감을 붙잡아 기록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휘발되어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다시 포착하기 어렵다. 작은 흔적을 부단히 축적하는 기록이 없으면 당시에 느꼈던 영감이나 색다른 돌파구에 대한 아이디어는 순식간이 사라질 수 있다. 관찰한 결과를 귀찮지만 기록해 놓을수록 기록된 숱한 데이터 중에서도 지식으로 승화되고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의미 없이 기록된 정보라고 할지라도 정보와 정보 사이를 오고 가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결하고 관계를 만들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가 그려질 수도 있다. 관찰한 데이터가 기록되어 체계화되고 구조화되면 정보로 탄생한다. 정보를 다시 한번 문제상황에 적용해서 나의 깨달음이 추가되면 지식으로 발전한다. 기록을 하면 할수록 산만한 자료의 개별적 의미에서 공통적인 패턴이나 관계를 찾아 정보로 연결할 수 있는 관점과 접근논리가 생기고 경험적인 교훈이 추가되면서 나의 신념과 철학이 담긴 지식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높여갈 수 있다. 시시각각 호기심을 자극한 다른 사람의 데이터나 정보에 길들여지고 나의 경험적 깨달음이나 비판적 사고를 통해 데이터나 정보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의견에 끌려다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집대성하려면 주변에 흘러 다니는 수많은 자료나 정보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갖고 당연하고 원래 그렇고 물론 그렇다고 생각하는 통념에 통렬한 시비를 걸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전문가가 수행하는 일을 관심을 갖고 관찰한 결과 그들은 주로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기존 지식을 벗어나 다르게 생각하는 가능성은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으며, 넓이 파서 다른 분야와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려는 경향성이나 잠재성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전문성의 깊이가 심화될수록 주변 다른 전문가와의 소통 채널은 닫히고 그럴수록 좌정관천의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반복해서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문제의식을 갖고 질문을 끈질기게 던져 본다. 전문가의 당연한 일상적 관행과 통념에 문제의식을 갖고 반복해서 관찰하면 모든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나 한계를 간파할 수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다. 관찰을 통해서 수집한 자료 속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정한 패턴이나 관계가 발견되면 이를 토대로 정리해서 몇 가지 규칙과 원칙을 만들 수 있다. 


전문가는 반드시 내가 전공하지 않은 전문분야와의 접목을 주기적으로 시도해야 한다는 규칙이나 전문성은 전문가 혼자만의 독립적인 노력이 아니라 다른 전문가를 포함, 주어진 환경과 여러 가지 제약조건이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탄생되는 사회적 합작품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깨달음을 기반으로 전문가는 반드시 다른 전문가와 배운다는 자세로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원칙도 수립할 수 있다. 더 깊이 파기 위해서 더 넓게 파야한다는 말도 전문가가가 지켜야 할 한 가지 원칙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만의 주장으로 한 우물을 파다 매몰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다른 전문가는 물론 이해관계자들에게 기피 대상이 될 수 있다. 문제의식을 갖고 관찰하면서 수집된 자료를 연결하면 문제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나 주어진 현실을 움직이는 진실을 포착할 수 있다.



생각이 통찰을 낳기보다 행동이 통찰을 낳는다


‘모든 전문가는 사이 전문가’라는 문제의식은 수많은 전문가를 관찰한 다음, 기존 전문가의 치명적인 한계나 문제점을 반복해서 고찰한 끝에 도달한 통찰이나 경험적 깨달음이다. 여기서 경험적 “깨달음은 ‘사실’과 ‘진실’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교차로에서 태어난 유령”(12쪽)이다. 기존 전문가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나 한계를 전문성이 실천되는 현장에서 사실적으로 만나는 가운데 전문가가 지녀야 할 이상적인 덕목이나 자질에 대한 진실이 충돌되는 지점에서 전문가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나 이미지가 부각된다. 그것이 바로 사이 전문가다. 돋보기로 전문가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유독 자주 눈에 띄는 현상이 반복해서 출현하거나 공통적인 문제 패턴이 부각되면서 특정한 모습으로 귀결되는 장면이 일정한 주기로 나타나는지의 여부를 유심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관찰을 아무리 했어도 관찰결과를 고찰을 통해 반추해 보고 이질적인 둣 보이는 두 가지 이상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정립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를 해석해서 정리하지 않으면 현실 속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없거나 생각의 혁신과 창조로 연결되지 않는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문제의식으로 주어진 현상을 관찰하고 고찰하며 부각되는 패턴이나 관계를 집대성하다 보면 법칙과 원리를 정립, 일리 있는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때 비로소 법대로 되지 않는 일이 발생할 때 딜레마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된다.


고찰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통찰(洞察)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다. 관찰이나 고찰이 오랜 시간을 두고 시계열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통찰은 불현듯 갑자기 일어난다. 고찰하는 과정에서 무의식 중에 새로운 관계나 구조가 떠오르는 경우다. 통찰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번뜩이는 깨달음이다. 관찰과 고찰이 순서대로 차근차근 보고 연구하는 가운데 선형적으로 일어나지만 통찰은 관찰과 고찰결과를 보고 한꺼번에 일어나는 놀라운 생각의 기적이다.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잠깐 쉬는 사이에 그동안 복잡하게 얽혀있던 복잡한 화두가 실타래 풀리듯이 술술 풀리는 순간이다. 통찰은 무조건 노력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집요한 문제의식과 확고부동한 목적의식을 갖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무의식적-의식적으로 연결되는 가운데 보이지 않았던 해결의 실마리나 단서가 갑자가 부각될 때 발휘되는 능력이다. 다르게 조합해 보고 다르게 생각해 보고, 고정관념이나 통념에 문제를 던져보는 가운데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다가 갑자기 통찰이 천둥번개 치듯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볼 수 있는 관점과 접근논리가 생긴다. 통찰은 반복되는 패턴이나 이질적 정보가 맺는 특정한 관계를 발견할 때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에서 법칙을 정리하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법칙을 통해 근본적인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원리를 만드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기존의 정보를 집대성해서 문제 상황에 적용하는 가운데 깨달음이 추가되면 지식으로 발전한다. 지식은 일리 있는 자기만의 주장을 낳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정보가 자료를 일정한 목적으로 조직화 또는 체계화시킨 결과라면 지식은 정보를 실제 문제 상황에 적용해서 나의 깨달음이 추가된 결과다. 주어진 정보가 틀린 정보일 수도 있고 맞는 정보일 수도 있다. 정보는 정보를 소유한 사람과 분리 독립시켜 생각할 수 있지만 지식은 오리지널 지식을 소유한 사람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정보는 정보처리를 통해 시스템을 통해 공유할 수 있지만 지식은 지식을 창조한 사람 몸에 체화되어 있어서 지식 보유자와 분리시키는 순간 정보로 전락한다. 남의 정보가 나의 지식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문제 상황에 직접 적용하면서 나의 각성이 추가되어야 한다. 통찰은 그래서 깊은 사고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어제와 다른 시행착오를 통해 탄생되는 경우가 많다. 생각이 통찰을 낳기보다 통찰은 행동의 산물이다. 어제와 다르게 시도해 보고 실험하고 모색하면서 책상에서 배운 진리가 실제로 통용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불행 피하기 기술》을 쓴 롤프 도벨리는 숙고는 손전등이지만 행동은 전조등이라고 한 이유다. 앉아서 생각을 거듭할수록 가까운 곳밖에 비추는 손전등에 불과하지만 나가서 움직이며 아이디어를 적용하다 보면 멀리까지 비출 수 있는 전조등에 비유할 수 있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실천적 신념의 부산물이다


마지막으로 통찰은 성찰을 통해 이전의 통찰보다 더 높은 통찰력으로 발전한다. 성찰은 통찰에 이르는 과정을 반추해 보고 혹시 내가 놓친 부분이 없는지를 반성하며 보다 나은 통찰력을 얻기 위한 반성과 숙고의 과정이다. 성찰 없는 통찰은 자만에 빠질 수 있고 통찰 없는 성찰은 불찰일 수 있다. 성찰은 보나 나은 통찰에 이르기 위해 이전과 다르게 노력해야 될 부분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점검해 보는 겸손한 사색의 과정이다. 주로 통찰은 성찰을 통해 일어난다.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기대했던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그 원인을 분석하면서 다양한 사례를 분석하고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된 사연이나 배경을 조 사하다 보면 불현듯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개입되었다는 통찰을 얻는 경우가 많다. 주로 의미심장한 학습은 성공체험보다 실패체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성찰을 통해 일리 있는 깨달음을 주었던 법칙도 원리로 발전하면 변함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설명해 줄 수 있다. 통찰 단계에서 나오는 법칙과 원리는 규칙이나 원칙과 다르게 법대로 움직이는 반복되는 패턴이나 일정한 관계를 관찰하다 얻은 통찰력의 산물이다. 규칙이나 원칙은 주관적 신념의 산물이지만 법칙이나 원리는 객관적 관찰결과 얻은 통찰력의 산물이다. 성찰단계에서는 그동안 고심과 노력 끝에 만든 자기만의 규칙과 원칙, 법칙과 원리를 또 다른 상황에 반복해서 적용하면서 여전히 동일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를 점검해 보고 수정하거나 보완할 포인트가 없는지를 검토해 보는 과정이다.



난리법석인 경험의 바다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서리를 치기도 하고 진저리를 경험하기도 한다. 아무리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적용해도 실마리를 잡을 수 없는 미스터리의 세계가 매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다. 직접 몸으로 겪어보기도 하고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의 책을 읽어보는 가운데 만나는 수많은 자료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도처에 산재하는 모래알에 불과하다. 지금은 빅데이터로 미래를 예측하는 데이터 공화국이다. 아무리 데이터가 많이 쌓여도 자기만의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을 갖고 데이터를 수집해서 비교하고 분석하며 관찰하지 않는 이상 데이터가 품고 있는 경향성이나 잠재성, 가능성이나 방향성을 포착하기 어렵다. 관찰은 고찰과 만나 관찰로 수집된 자료를 분류하고 가공해서 정보로 만들지 않으면 현실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캐내기 어렵고 세상을 내가 중심이 되어 정리된 원칙을 갖고 나만의 규칙을 궁리하며 정립하지 않으면 남이 만든 원칙과 규칙에 휩쓸려 정보의 바다로 떠내려간다. 정보의 바다에서 휘몰아치는 파도에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독창적인 관점으로 다양한 정보를 집대성, 오랫동안의 고찰 끝에 다가오는 통찰로 일리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법칙과 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방황을 거듭하며 산만한 자료더미에 떠내려가다 고찰에 고찰을 거듭하다 정보를 체계화시켜 나만의 원칙과 규칙으로 만들었지만 여전히 누군가 정한 법을 따라가는 종속적인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통찰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기존 정보를 집대성, 법칙과 원리를 만들어 법대로 안 되면 방법을 개발하는 주도적인 위치에 설 수 있게 된다. 


통찰의 단계에서 독창적으로 창조하는 일리 있는 지식은 반복되는 성장패턴 속에서 나만의 법칙을 만들고 그 법칙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천하면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원리를 개발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한다. 통찰력 있는 식견과 안목으로 주체성을 갖고 이전과 다르게 문제상황에 대응하고 난국을 돌파하며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깊은 성찰을 반복하다 보면 나만의 방도가 부각되고 나만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단독적인 지혜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지혜는 지식이 축적되면서 어제와 다른 문제상황에 반복해서 직면하면서 어제와 다른 통찰력이 추가될 때 탄생된다.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 지혜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도리(道理)가 담겨 있고 그 사람의 성장과 발전과정을 지켜낸 철칙이 하나의 철학으로 녹아들어 있다. 비록 언제까지 의미심장함을 지닐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혼탁한 세상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부단히 자기반성과 성찰을 반복한다. 비록 미완성의 철학이자 이론이지만 눈물과 땀으로 마무리하고 갈무리하면서 탄생시킨 자기만의 성장이론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진저리 쳐지는 고통스러운 경험 속에서 우연히 떠오른 실마리를 만나 마무리를 하는 와중에 탄생되는 부산물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책상머리에 앉아 저 요리조리 잔머리 굴린 결과로 탄생되는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격전의 현장에서 무거운 현실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실을 밝혀내려는 한 사람이 이리저리 몸으로 체득한 신념의 부산물이다.



관찰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사고 없는 관찰은 맹목이다


예를 들면 전문가적 실천을 반복해서 관찰하고 고찰하는는 가운데 전문가의 병폐나 역기능, 치명적인 약점이나 문제점을 일정한 패턴으로 구분, 범주화시킬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은 경험이 있다. 《세상을 지배할 지식인의 새 이름, 브리꼴레르》 책에서 제시한 네 가지 전문가 유형이 이런 범주화에 해당된다. 첫째, 멍 때리는 전문가다. 한마디로 멍청한 전문가다. 멍청한 전문가는 정해진 규율, 기존의 제도와 관행과 절차만 따를 뿐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해야 하는 도덕적 판단력이 없다. 큰 탈 없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주의 전문가다. 둘째, 자기 분야 외에는 무지한 전문적 문외한, 즉 답답한 전문가다. 한 우물 파다가 자기가 판 우물에 매몰된 전문가다. 셋째, 골 때리는 무늬만 전문가, 즉 사이비 전문가다. ‘전문가에 따르면’이라는 말을 따라가 보면 사실은 전문가가 아닌 무늬만 전문가인 경우다. 넷째, 능력은 있으나 이유 없이 밥맛없는 안하무인형 재수 없는 전문가다. 똑똑한 전문가지만 차가운 이성 이외에 따듯한 가슴이 없어서 측은지심이 없는 전문가다. 멍청한 전문가, 답답한 전문가, 사이비 전문가, 밥맛없는 전문가는 반복적인 관찰을 통해서 얻은 귀납적 범주화다. 하지만 귀납적 관찰로 얻은 결론의 한계는 결론적으로 얻은 주장이 언제나 오류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귀납적으로 얻은 결론은 언제나 잠정적으로 일리 있는 이야기다. 오류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사례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반대되는 사례가 나타나 지금까지 얻은 결론이 뒤집어질 수 있다. 


귀납적 이론에 대조되는 이론이 바로 연역적 이론 또는 이론적 삼단논법이다. 연역적 이론은 이미 알려져 있는 일반적인 주장이나 이론으로부터 가설을 설정하고 그걸 검증하는 과정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이론이다. 예를 들면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기존 이론이나 논리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는 명제를 놓고, 관찰하고 경험한 결과 소크라테스도 사람이므로 죽는다는 결론을 얻는 경우다. 이론적 삼단논법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논리적으로 정확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①대전제: 모든 인간은 죽는다

②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③결론: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도 죽는다



이론적 삼단논법은 다른 말로 연역법이다. 이론적 삼단논법은 일반적인 사실이나 보편적인 명제(예를 들면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서 출발, 특수한 다른 원리나 연역적인 결론(예를 들면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도 죽은다)을 제시하는 추리법이다. 이론적 삼단논법은 굳이 관찰이나 실험을 하지 않고도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론적 삼단논법의 치명적인 약점은 소크라테스도 죽는다는 결론이 이론적으로 옳다고 해도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원리를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의 죽음을 몸소 겪어보지 않고서는 내 생각과 나의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성공방정식이나 처방전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내가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겪어보지 못한 보편적 성공 처방전은 나에게 별다른 대안을 마련해주지 못한다. 남의 지식이 나의 지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체적 개입을 통에 몸을 관통하는 마주침의 흔적이 축적되어야 한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엮어서 자기 고유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구축되는 이론이기 때문에 귀납적이면서 동시에 귀납적으로 얻은 결론이 맞는지를 현장을 매개로 부단히 실험하고 모색하며 언제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모든 주장은 언제나 잠정적 가설이기에 부단히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비판적 사고 방법이 있다. 다름 아닌 실천적 삼단논법이다.


관찰을 열심히 한다고 자기만의 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관찰결과를 기반으로 비판적 사고를 비롯해 집요한 사고과정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할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구절이 있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생각의 시대》를 쓴 김용규는 이 문장을 관찰에 대입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들었다. ”관찰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사고 없는 관찰은 맹목이다“(220쪽). 사고를 거듭하다 통찰에 이르게 되는데 그 출발은 관찰이다. 특히 직접 행동하면서 행동하기 전후의 미묘한 차이를 관찰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통찰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관찰을 기반으로 사고할 때 통찰로 연결될 확률이 높다. 관찰은 반복하면서도 기록하지 않거나 관찰 과정이나 결과를 기반으로 깊이 사고하지 않으면 관찰은 관망이나 관조 수준에 그칠 수 있다. 자기만의 이론은 결국 관찰과 사고의 합작품이다.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사고 파트는 《생각을 뛰게하라》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삼단논법을 활용한다. 추후에 논의할 자기만의 성장 방정식 y=er²t/l에서 t가 바로 실천적 삼단논법이다. 기존 가설이 단순히 맞거나 틀린다고 증명한다고 이전과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실천적 지혜는 부각되지 않는다. 지혜는 특성상 내 몸이 구체적인 현장에서 직접 뭔가를 실천하는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실험하는 가운데 부각된다. 이런 점에서 지혜를 생산하는 방법은 이론적 삼단논법이 아니라 실천적 삼단논법이다.  



실천적 지혜를 창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실천적 삼단논법이다


실천적 삼담논법은 과학자의 논리적 사고를 대변하는 이론적 삼단논법이나 연역적 추론보다는 일어 벌어지고 있는 현장 속으로 파고들어 가, 직접 몸으로 부딪쳐가면서 해법을 모색하는 길을 따른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다음 3단계를 따라간다.


①대전제: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다

②소전제: 그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③결론: 실천을 위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목적-수단-행동의 3가지 변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는 논리전개방법이다. 대전제인 목적은 무엇을 알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고, 소전제인 수단은 목적으로 설정된 대전제를 어떻게 알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마지막으로 결론에 해당하는 행동은 설정된 수단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가의 문제다. 목적이 분명한 데 수단이 불확실하거나 수단은 찾았는데 행동하지 않으면 목적은 달성할 수 없다. 또한 목적이 불분명하면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과 행동도 자연스럽게 불명확해진다. 실천적 삼단논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목적과 수단과 행동이 모두 가설이라는 점이다. 가설을 설정한 다음 검증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해서 실행하면서 목적 자체도 수정할 수 있다. 이론적 삼단논법에서 가설은 선행연구결과에서 나오지만 실천적 삼단논법에서 가설은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에서 나온다. 암묵적 지식은 알고는 있지만 그 앎을 적확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체화된 지식이다. 예를 들면 엄마의 김치 담그는 노하우를 매뉴얼로 만든 것은 명시적 지식이지만, 그대로 김치를 담근다고 엄마의 김치맛이 그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그 김치맛의 차이가 바로 암묵적 지식이다. 암묵적 지식은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의 몸에 육화(肉化)되어 있어서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몸으로부터 분리시켜 문서화시킬 수 없는 지식이다.


선행연구결과에서 나오는 이론적 삼단논법의 가설은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지 못한다. 이미 선행연구결과에서 증명된 사실을 다시 한번 논리적으로 증명할 뿐이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이론적 삼단논법에서 새로운 지식이 창조되지 않는 이유는 논리적 정합성 여부만 판단할 뿐, 모르던 지식을 새롭게 알게 해주는 깨달음의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론적 삼단논법은 결론적으로 행위를 유발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맞다는 사실만 기술하는 반면에, 실천적 삼단논법은 결론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수단을 실행하고 특정한 행위를 지시한다. 한편 실천적 삼단논법에서 나오는 가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다. 때문에 실천적 삼단논법에서 채택되는 가설은 무엇을 알고 싶은지(목적), 어떻게 알 것인지(수단),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행동)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실천적 추론방식을 반복하는 가운데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과정으로 이끌어간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창조하는 방법이다. 미덕을 갖춘 최고 경지의 전문성은 한 마디로 옳은 판단을 올바르게 실행하는 능력, 또는 행동하면서 성찰하는 능력, 즉 실천적 지혜다. 실천적 지혜는 공감과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의사결정이 올바른 판단인지를 숙고함과 동시에 올바른 판단을 기반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직관적 통찰력이자 임기응변적 상황판단력이다. 



실천적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현실적 문제의식이나 위기의식을 목적의식으로 바꿔 진술한 궁극적 지향점이다. 예를 들어 이상적인 전문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될 인재상이 대전제인 목적으로 설정되면 이상적인 전문가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소전제, 즉 수단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이 트인다. 관찰 없어 통찰 없고 통찰 없이 통렬한 깨달음도 없다. 자기만이 성장이론도 대전제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최적의 전략과 수단을 선정해서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반복해서 실험하고 모색하는 실천적 행동 속에서 담금질되는 것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영감을 적바림한 결과가 아니다. 내밀힘을 기르기 위해 비사치거나 깨단하는 경우가 생길 때마다 떠오른 영감이 휘발되기 전에 붙잡아서 적바림한 결과가 바로 자기만의 성장이론이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불가능에 가까운 목적함수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매체를 선정하는 과정을 통해 부단한 혁신을 거듭하는 과정과 일맥상통한다(윤석철, 2011). 운석철 교수의 《삶의 정도》에 따르면 “목적함수란 인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방향이며, 수단매체란 목적함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means)적 도구(medium)이다”(5쪽).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는 말은 수단매체와 목적함수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수단매체의 한계가 목적함수 달성 가능성의 한계를 결정한다. 대전제에 해당하는 목적함수가 정해지면 이것을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매체를 선정하고 실행하는 시행착오 과정에서 목적함수는 현실로 구현된다. 목적함수 없는 수단매체는 목적지 없이 표류하며 사투를 벌이는 배와 같고, 수단매체 없는 목적함수는 전략이 없는 비전과 동일하다. 호시우보(虎視牛步)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호랑이처럼 원대한 목적함수를 품고 앞을 내다보고, 소처럼 수단매체를 우직하게 실행에 옮기면서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꿈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호시(虎視) 없는 우보(牛步)는 목적함수가 부재한 상태에서 수단매체만 고도화시키려는 무모한 노력이며, 우보(牛步) 없는 호시(虎視)는 수단매체를 고도화시키지 않으면서 원대한 꿈만 꾸는 허망한 상황이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행동하면서 생각하는 실천적 성찰과정을 따른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사물적 발상이 아니라 행위적 발상의 산물이다. 사물적 발상은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처럼 떨어지는 사과를 본 사람의 주관이 사라진 객관적인 표현이다. 반면에 행위적 발상은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다’는 문장처럼 행위가 중심이 되는 표현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구체적인 장면을 목격한 주체의 주관이 특정 상황적 맥락에 반영된다. 사물적 발상이 사람과 무관한 객관적인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데 반해서 행위적 발상은 사람이나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인간 경험과 관련된 생각이다. 사물 자체는 오늘도 내일도 동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행위는 언제 어디서 누가 하느냐에 따라 늘 다르게 다가온다. 행위는 언제나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는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수들의 구체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어제와 다르게 일어난다. 행위는 언제나 어제와 다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대체불가능하며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책상에서 논리적으로 맞고 틀리는지를 검증하는 관념적 사고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실천적 삼단논법은 누군가의 성공비법이나 처방전도 검증대상에 올려놓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내가 직접 실험하고 모색하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체화 또는 육화 시키는 접근방법이다.


실천적 삼단논법은 행위적 발상을 기반으로 행동하면서 생각하는 실천적 성찰과정(reflection-in-action)을 중시한다. 깊이 생각하거나 완벽한 계획을 수립한 다음 행동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행동하면서 행동하는 결과를 순간순간 생각하고 개선방안을 모색하는 임기응변력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면서 매 순간 성찰을 통해 다음 실천의 방향을 결정한다. 방향을 미리 결정한 다음 출발하지만 다음 목적지로 가는 방향은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통찰력을 기반으로 결정된다. 생각이 통찰을 낳지 않고 행동이 통찰을 낳는 까닭이다. 행동하면서 생각하는 사람은 사물의 객관적인 속성을 따지기보다 사물이 다른 사물이나 환경과 어떤 관계 속에서 보이고 있는지를 관찰하면서 생각한다. 행동하면서 생각하는 행위적 발상은 정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객관적인 존재의 독립적 속성을 파악하기보다 역동적인 상태로 움직이는 가운데 특정 상황적 맥락에서 다양한 변수들이 상호작용하는 와중에 맺어지는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생성되는 생각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은 사물들이 고정된 실체로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정적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매 순간 부닥치는 역동적인 현실은 다양한 변수들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예측불허의 우발적 상호작용을 통해 끓임 없이 움직이는 유동적인 관계성이 만들어간다. 한 마디로 행위적 발상은 인간을 정태적인 있는 존재(being)로 파악하지 않고 동태적으로 되어가는 존재(becomming)로 파악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관찰-고찰-통찰-성찰의 선순환적 깨달음의 과정에서 탄생되는 자료-정보-지식-지혜가 현실에서 진실을 밝혀내고 진실에서 일리 있는 원리와 법칙을 개발하는 과정과 연결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기 주체성과 정체성을 밝혀내는 진리를 찾아 나서는 지루한 탐구과정을 살펴보았다. 비록 지금 몸담고 있는 경험의 바다가 난리법석이고 진저리가 쳐진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몸부림치는 직간접적 경험이야말로 비록 영원히 미완성이지만 자기만의 철학과 성장이론을 구축해 나가는 밑거름이 된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자기만의 규칙과 원칙, 자기만의 원리와 법칙이 집대성되어 자기 주체성이나 정체성을 자기만의 방식과 방도로 드러내는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개발하는 소중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진저리는 저절로 마무리나 갈무리가 되지 않는다. 실마리를 잡으려는 안간힘과 몸부림 속에서 내 몸을 관통한 깨달음의 흔적과 얼룩을 씨실과 날실로 직조하는 가운데 대체불가능한 자기만의 성장이론이 하나의 진리로 탄생된다. 하지만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언제든 공격받고 위협받을 수 있는 불안한 진리이자 미완성된 철학적 신념이다. 방황 속에서 방향을 찾고 방법을 개발하며 나만의 방도를 찾아 나서는 경험의 바다에서 낯선 사람도 만나고 지적 자극을 깨우쳐주는 타자도 만나면서 어제와 다른 언어로 자아를 부단히 재서술하며 재창조하는 힘들지만 가슴이 뛰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다.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구축하는 성장 방정식을 만나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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