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보다 종이책을 읽어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코나투스》는 나에게 어떤 책인가?
오늘은 용기 크리에이터, 유니스 배 샘과 같이 “흔들려봐야 뒤흔들 수 있다”는 주제로 아쿠아픽 이계우 회장님의 공간협찬(아쿠아픽 ‘코이노니아’) 으로 저마다 다른 코나투스가 모여 교류, 교감, 교제하며 교육하는 강연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온라인 강의를 아무리 들어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인간적 접촉감의 상실은 아무리 현란한 메시지를 화상으로 전달해도 전달자는 물론 수강생 역시 화상(畫像)이 될 수도 있다. 코나투스가 통하는지의 여부는 우발적으로 마주쳐봐야 알 수 있다. 오프라인 공간에서 나의 경험과 개념을 융복합, 내 삶의 컬러가 스며든 나만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몸의 언어로 번역한 사투의 산물이다. 그 메시지에 감전된 사람은 몸으로 반응한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전율하는 감동이 급습하면서 온몸으로 스며드는 의미심장함은 심장박동을 부추긴다. 설명적 강의와 다르게 설득적 강연은 몸으로 깨달은 교훈이나 통찰이 몸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달되면서 연사의 에너지가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몸으로 와닿는다. 접속 체험보다 접촉 경험이 더 강렬하고 몸에 깊은 울림의 흔적으로 각인된다. 책상머리에 제조된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땀과 눈물을 매개로 걸러진 몸의 언어라서 심금을 울리며 강인하게 신체적으로 각인된다. 접속중심의 화상강의로 도달할 수 없는 접촉중심의 현장강연이 주는 매력이다.
우치다 다쓰루가 쓴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에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책이 나온다. 지금 읽고 싶은 책, 당분간 읽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언젠가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책, 읽을 마음은 없지만 내가 읽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해 주길 바라는 책이 그것이다. 우치다 다쓰루에 따르면 진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지식과 실용적인 정보를 얻으려고만 책을 읽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뭔가 부족하고 결핍된 욕구가 있으니까 책을 선택하기보다 아직 여기에 없는 결여를 기준으로 책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 책을 중요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우리를 책으로 향하게 합니다”(126쪽).
물론 코나투스를 읽으면 당장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고뇌하고 있는 현안 이슈를 파고들어 하나의 실마리나 단서를 주기도 한다. 코나투스 책이 더 의미 있는 책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지금 당장은 무슨 메시지를 던져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이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조차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살아가면서 직면했던 살아가는 이유나 나의 존재의미를 근본적으로 파헤치는 놀라운 사유체계를 건축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불확실한 확실성’을 심어주는 책이라서 소장가치가 있는 사고의 보고(寶庫)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책은 저자의 사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있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관문으로 우연히 나를 인도해 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책이다.
책은 가보지 못한 곳을 바라보게 만드는 창문이자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지게 만드는 지적 자극제다. 어떤 책을 만나면 그 책의 제목부터 포스가 다르고 목차에 흐르는 저자의 숨결이 느껴지면서 책 전반의 행간마다 심상치 않은 공기가 급습하거나 은은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그 사람의 자아상이나 현실적 욕망을 드러내는 상징적 증표다. 주식이나 돈과 같은 부자가 되는 방법을 중심으로 서가에 책이 꽂혀 있는 사람은 경제적 자산가치 증식에 대한 욕구나 욕망으로 자신의 현재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드러내고 싶은 욕망의 주체다. 스피노나의 《에티카》나 유영만의 《코나투스》가 꽂혀 있는 책장은 명랑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나에게 아픔이나 슬픔보다 기쁨의 정서를 가져다주는 만남이나 일을 중심으로 자기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어떤 욕망이나 능력을 갖춰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책장에 꽂아두는 책은 읽고 싶은 책도 있지만 아직 읽지 못해서 언젠가는 읽어야 되는 책이 많다. 전자책과 다르게 종이책을 서가에 꽂아두면 그 책은 나에게 지속적으로 항의를 하거나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도대체 언제쯤 나를 읽어줄 것인지 재촉하거나 심리적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나는 그런 책을 볼 때마다 매일 죄책감을 느끼면서 하루라도 빨리 지금 읽던 책을 끝내고 저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먼지에 쌓여 왜 샀는지 모를 정도로 나에게 흐릿한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가는 책도 있다. 하지만 다시 꺼내서 저자의 숨결을 들어보면 내가 책을 사게 된 까닭이 목차의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내가 산 책은 나의 지적 편향성을 증명해주기도 하지만 내가 왜 어떤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어떤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자기 정체성의 얼굴이다.
책은 물질성을 띄고 일정한 공간성을 차지하면서 특정 인간에게 포착되는 순간 시간성의 흐름 위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종이책은 가시적 공간성에 비치되어 있거나 배치되어 있어서 인간이 시간을 투자해서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코나투스》 종이 책과 전자책의 치명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종이책이 서가에 꽂혀 있거나 눈에 보이는 곳에 배치되어 있으면 그래 꼭 읽어야 된다는 절박함이나 부담감을 꾸준히 인식시켜 줌으로써 지금 읽고 있지 않는 나를 질책하는 효과를 갖는다.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왠지 저 책은 꼭 읽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미지의 호기심과 당대의 시대적 불화감을 저 책이 어느 정도 해소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리게 만드는 책이 《코나투스》 종이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이에 반해 《코나투스》 전자책은 공간적인 점유를 하지 못함으로써 우발적 접촉을 통해 맞닥뜨릴 확률이 거의 없다. 이런 점에서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일상적으로 압박해 오면서 절박감을 주는 지적 자극이 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전자책은 책을 읽고 사람의 자기 정체성을 상대방에게 드러낼 수도 없고, 나는 언젠가 이 책을 다 읽어야 할 사람이라고 스스로 다짐하게 만드는 자기 교화의 단서로도 작용하지 않는다. 서점이나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숙명적으로 다가가 손에 잡히는 책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스며들면서 우발적으로 마주칠 운명이 있지만, 전자책은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종이 책에 비해 전자책이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나 어려움은 “지금 어디를 읽고 있는지 모른다(196쪽)”는 사실이다. 종이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페이지를 넘길수록 ‘읽어가는 나’와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 읽고 기다리는 내’가 거리를 좁혀가면 마침내 만나기까지의 지적 긴장을 맛볼 수 있다. 우치다 다쓰루에 따르면 “추적하는 독자와 도망치려는 작가 사이의 숨 막히는 박진감에는 남은 페이지 수가 깊게 관여”(197쪽)한다. 종이 책은 내가 지금 책 전체 중에서 어디쯤 읽고 있는지, 남은 이야기는 얼마나 남았는지를 책을 읽어가면서 책의 무게감으로 알 수 있다. 반면에 전자책은 지금 내가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읽은 앞장과 읽지 않은 남은 양은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얼마나 읽었는지, 또는 얼마나 더 읽어야 되는지에 따라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가 책의 어느 정도 위치에서 제시되는지에 따라 그 의미심장함의 강도가 달라진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남은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실감과 함께 이야기의 흐름도 전반부와 중반부와 다르게 저자가 화룡점정하려는 메시지의 숨결이 긴박감을 더해가면서 드디어 다 읽어간다는 안도감이 진한 감동으로 온몸을 전율하게 만든다.
이런 종이 책을 구입하는 동기나 이유는 지금 당장 읽고 싶어서 사는 책도 있지만 언젠가는 읽어야 되는 책을 선정, 그 책이 품고 있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성숙도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릴 때 책을 사는 경우가 많다. 스피노자가 쓴 《에티카》라는 책도 바로 그런 책이다. 지금 당장 읽고 싶어서 산 책이 아니라 저 책을 내가 언젠가 읽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과 저 책에 담긴 스피노자의 사상적 기반을 파고 들어가 지금 여기서 나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해석해 보겠다는 지적 도발심이 《에티카》를 늘 종이책으로 사서 서가에 꽂아두는 이유다.
만약 내가 《에티카》를 전자책으로 샀다면 그 책이 지금 어디에 저장되어 있거나 어느 디지털 창고에 비치되어 있는지 알 길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나 절박한 긴장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으로 눈앞의 서가에 꽂혀 있거나 책상 위에 쌓여 있어서 가쁨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지속적으로 내 의식을 자극할 때 책을 꺼내서 제목과 목차라도 반복해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다 그 책이 품고 있는 공기가 나를 급습해서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빠져들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불확실한 확실성’을 굳게 믿고 그날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여러분에게 《코나투스》 책은 언젠가 읽어야 할 난공불락의 책이 아니라 언제라도 내 삶의 빛과 불이 되어 내 몸을 전율케 만드는 감동을 주는 선물이 되면 좋겠다.
《코나투스》는 코나투스 대로 살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될 수 있다거나 성장 방정식대로 똑같이 따라하면 성공 비법을 개발할 수 있다는 실용적 가치나 이익을 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코나투스는 지금까지는 복사본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의 성공 스토리나 비법, 또는 인사이트에 중독되어 휩쓸리며 살아왔으니 지금부터라도 대체불가능한 나만의 방식, 원본대로 살아가면서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권하는 책이다. 주류적 흐름이나 사회가 정한 판단기준대로 살아가는 원심력에 휩쓸리지 말고, 내가 삶의 주도권을 잡고 구심력으로 살아가라는 책이다. 지금 여기서 틀에 박힌 방식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한 번도 되어 본적이 없거나 가본적이 없는 곳으로 과감하게 몸을 던져 부딪혀보지 않으면 마주침을 통한 깨우침은 생기지 않는다. 주류적 사고 방식에 위화감이 생겨 딴길로 새어보려는 안간힘에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공기를 만난다. 그 공기가 비로서 나를 숨통 트이게 만드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숨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