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는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혁명적 사건’이다
철학자 들뢰즈에 따르면 이전과 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낯선 기호와의 마주침이다. 생전 마주쳐보지 못한 낯선 기호가 나에게 다가올 때 무의식적으로 해석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본능적인 반응이 따른다. 예를 들어 평온한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 갑자기 물살이 급한 강물이나 파도치는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호수에서 수영할 때 몸이 느끼는 물살이나 수심에 대한 감각적 자극과 강물이나 바다에서 수영하면서 몸이 느끼는 감각적 자극의 강도는 많은 차이가 있다. 파도가 밀려오면서 몸이 느끼는 물결의 세기나 강렬한 햇빛으로 시야가 아른 거리는 느낌도 모두 낯선 의미를 품고 나에게 기호로 다가온다. 그때 강물과 바다에서 수영해 본 경험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다. 그 사건 속에서 이제껏 배워보지 못한 색다른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사건은 낯선 기호를 품고 다가오는 모든 경험이다. 낯선 기호가 많은 강의는 그만큼 한 눈을 팔 수 없다. 몰입해서 온몸으로 들어야 메시지에 담긴 강사의 실천적 의미가 내 삶을 관통하는 색다른 깨우침으로 각인된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서문으로 시작해서 많이 들어봄직한 메시지로 본론을 설명한 다음 화룡점정으로 각인되는 결론을 제시하는 평온한 흐름으로 다가서는 강의는 청중에게 낯선 기호로 다가서지 못한다. 낯선 기호가 없는 강의는 청중에게 새로운 배움과 익힘이 일어나지 않는다. 강의가 하나의 사건이 되려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색다른 경험의 장이 되어야 한다. 색다른 경험의 장이 되려면 청중이 해석해야 되는 낯선 기호가 발신되어야 한다. 강사가 전달하는 낯선 기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해석하는 청중은 그 강의에 몰입해서 들을 수밖에 없다. 낯선 기호가 발생되는 강의의 모든 순간이 사건이다. 사건 속의 사연이 품고 있는 의미의 껍질을 파고들어 해석해 보고 내 삶의 현장에 비추어 재해석하면서 강사가 전달하는 기호의 맥락적 의미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강의는 청중에게 전대미문의 의문을 품고 부단히 질문을 던져 금시초문이 메시지 파워를 공감하고 삶의 현장으로 끌고 가는 공명(共鳴)의 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강의가 품고 있는 5가지 은유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강의는 칼이고 피클이며 등대이자 망치이고, 길이 되는 까닭을 살펴본다.
①강의는 칼이다
어떤 강의와의 우연한 만남은 한 사람 운명도 혁명적으로 바꾸는 결단의 칼이다. 노심초사하던 사안을 뒤로하고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는 방향타가 한 사람의 강의가 될 수 있다. 고심하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단서나 실마리를 강의를 통해 얻을 수 있고, 오랫동안 고민만 하던 화두를 내 던지고 과감한 결단으로 실천에 옮기는 계기가 강의를 매개로 마련될 수 있다. 강의는 청중은 물론 강사에게도 칼이 된다. 강의가 청중에게 결단의 칼을 제공해 주려면 강사 역시 결단의 칼이 될 수 있도록 참신하고 독특한 메시지로 무장하는 칼을 갈아야 하기 때문이다.
②강의는 피클이다
강의는 듣기 전에는 오이였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피클로 바뀌는, 즉 강의를 듣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다. 오이가 피클이 될 수 있지만 피클이 오이로 되돌아갈 수 없는 변화처럼 강의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촉발점이다. 강의는 물리적 변화보다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강사가 전하는 메시지가 단순히 이해를 촉발시키는 전달력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인생 전반을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 펼쳐지는 경계에서 한계를 뛰어넘어 도전이 시작되는 촉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③강의는 등대다
강의는 길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희망의 등불이다. 자신의 무지로 인해 오랫동안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할 수도 있다. 더욱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는 상태로 지내다 우연히 한 사람의 강의를 듣는 순간 새로운 관문이 열리는 경우도 있다. 어둠의 터널 속에서 헤매다 우연한 기회에 한 사람의 강의를 듣는 순간, 그 강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방향을 안내해 주는 등대처럼 다가온다. 등대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우리가 그것의 소중한 존재이유를 모르고 지내는 것처럼 강의 역시 여기저기 존재하지만 나에게 방향타를 던져는 의미심장한 강의는 우발적 마주침으로 생기는 어둠 속의 빛이다.
④강의는 망치다
강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이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각성제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신념을 기반으로 그간의 삶을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그 신념도 통념임을 깨닫게 해주는 각성제가가 강의다. 낯선 생각과 마주치지 않으면 내 생각은 고여있는 물이 썩듯이 고루해지고 진부해진다. 강의는 틀에 박혀 진부한 통념으로 굳어가는 생각의 고치를 깨부수고 새로운 생각이 잉태되게 만든다. 망치로 기성의 틀이나 벽을 깨부수듯 강의는 고정관념이나 통념이 더 견고한 상태로 굳어지기 전에 산산이 부숴버리는 통렬한 자극제다. 강의는 단순한 자극제나 각성제에 머물지 않고 깨우친 대로 몸을 움직여 실천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⑤강의는 길이다
강의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목숨을 걸고 걸어가야 할 삶이다. 글이 삶의 결론으로 나오듯, 강의도 단순한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철학의 문제다. 강의는 내가 살아온, 살아가는 대로 전달되는 삶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살아본 삶을 능가하는 글을 읽거나 쓸 수 없듯이 내 삶을 능가하는 강의를 할 수 없다. 어제와 다른 강의를 하고 싶으면 강의 스킬을 익힐게 아니라 어제와 다르게 살아봐야 한다. 삶이 우여곡절의 굴곡이 많고 파란만장할수록 파란만장한 강연으로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행동을 촉발할 수 있다. 올바른 삶이 올바른 강의를 할 수 있는 기반이다.
강의를 통해 결단의 칼을 제공하고, 오이가 피클로 바꾸는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켜 방황하는 사람에게 등대를 발견하게 하고 고정관념을 통렬하게 깨부수는 망치 역할을 하며 어제와 다르게 걸어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강의를 해야 한다. 대체 불가능한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①강의의 콘텐츠는 내가 살아온 경험이다.
파란만장한 삶이 파란을 일으키는 강의의 재료가 되는 이유다. 강의는 내가 살아온 삶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청중에게 전달되는 반복불가능한 경험이다. 고전을 쓴 작가들이 저마다의 삶으로 건져 올린 경험적 작품을 썼듯이 자기 삶으로 깨달은 경험적 교훈이나 통찰력을 기반으로 강의의 콘텐츠를 창작해야 한다. 나의 이야기가 중심을 잡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부분적으로 변주를 올릴 때, 심금을 울리는 강의로 탄생될 수 있다. 경험으로 창작한 나만의 서사(narrative)가 콘텐츠의 중요한 원천으로 사용될 때, 내가 삶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강의를 할 수 있다. 자신이 직접 겪어본 사례(case)를 활용해서 스토리텔링할 때 임팩트가 훨씬 높아지고 청중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다. 강의에 활용되는 사례는 공감의 원천(source)이다.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강사와 청중은 거리감이 없어지고 급친밀 해지는 느낌이 생긴다. 강의를 보다 재미있고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겪은 에피소드(episode)를 소개하고 거기게 깨달은 교훈을 이야기할 때 몰입도는 물론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에피소드는 강의를 재미있고 의미 있게 만드는 텃밭이다.
둘째, 강의는 전적으로 내가 경험한 이야기만으로 하기 어렵다. 강의는 저마다 살아가는 고유한 삶을 자기만의 언어로 독특하게 번역하는 과정이다. 아무리 독특한 체험을 했어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실하면 강의도 부진을 면치 못한다. 나의 체험적 깨달음을 뒷받침해 주고 지지해 주는 다른 사람의 주장도 적절히 인용(citation)하면서 어휘력은 물론 문장력을 발전시킬 때 강의를 통한 전달력도 높아진다. 다른 사람이 남긴 명언이나 좋은 깨달음이 스며들어 있는 문장을 인용하면 내 주장을 더욱 신뢰롭게 만들어주는 back-up 장치가 된다. 나의 경험에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좌정관천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내가 겪어봤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나, 겪어보지 못한 다른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 깨달은 통찰력도 중요하다. 단순한 인용을 넘어서 다른 사람의 인두 같은 문장을 나의 경험적 깨달음을 추가, 변형해서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할 때 인상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강의의 콘텐츠는 인두 같은 문장을 평소에 메모해 놓았다가 내 강의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에 적절히 변형 적용(paraphrase)할 때 새롭게 개발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문장을 바꿔 쓰기만 해도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놀라운 창작의 지름길이자 비결이다. 가을은 모든 나뭇잎이 꽃이 피는 제2의 봄이다. 까뮈의 말을 바꿔치기(paraphrase)하면 “중년은 모든 역경이 경력이 되는 제2의 봄이다”로 멋지게 재탄생시킬 수 있다.
셋째, 강의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자기다움을 연출하는 연기다
모든 강사는 자신이 겪어낸 독특한 삶을 이전과 다른 자기만의 언어로 콘텐츠를 개발, 기승전결이 살아 숨 쉬는 스토리로 재미있게 풀어내는 드라마 연출자다. 강사는 재미있는 사례나 에피소드에 깨달은 교훈에서 의미를 추출, 심장에 꽂아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러다. 이런 점에서 강의는 누구와도 비교불가하고 대체불가능한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연기다. 강사의 삶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강의도 저마다 다른 삶을 몸으로 보여주는 연기다. 강의는 단순히 입으로 전달하는 메시지의 향연이 아니라 자기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경험적 깨달음이 청중과 교감되면서 공감의 연대망이 구축되는 감동적인 연기이자 실존적 축제다. 강의는 자기만의 컬러를 자기 스타일로 드러내는 실존적 축제다. 강의는 저마다 살아가면서 보고 느낀 깨달음을 자기답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독특한 컬러이자 스타일의 보고(寶庫)다. 음악가나 화가, 소설가나 시인의 악풍이나 화풍 그리고 문체가 다른 이유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독특한 언어로 번역해 낸 창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작품 안에는 창작자의 문제의식과 열망이 숨 쉬고 있다. 삶이 다르면 작품이 다르듯이 강의도 자기다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강의의 재미와 의미는 언어유희(pun)를 통해 극대화된다. 언어유희는 단순한 말장난이 수준이 낮은 아재개그다 아니다. 내 생각을 단순하면서도 보다 임팩트 있게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언어유희다. 언어유희는 의미의 강도와 재미의 깊이를 더하는 각인제다. 역경을 뒤집으면 경력이 된다. 한계는 한 게 없는 사람의 핑계다. 완벽한 때를 기다리다 몸에 때만 낀다. 물건을 훔치면 범인이지만 마음을 훔치면 연인이 된다. 이런 언어유희를 단순 말장난이나 아재개그로 치부하는 사람은 영원히 재미없는 강의를 할 것이다. 언어유희는 넓고 깊은 경험적 깨달음을 근간으로 촌철살인과 화룡점점의 언어적 감각이 융복합되어 폭발하는 고품격 유머다. 유머는 언어적 변주를 통해 빛을 발한다. 대체 불가능한 강사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사실Fact에 강력한Impact를 더해 청중으로부터 존경respect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생각도 단순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전달하는 언어유희나 메타포metaphor, 즉 은유법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해야 한다. 언어유희와 더불어 메타포는 배움의 대포다. 결혼은 왜 양파일까. 추상적인 결혼의 의미가 구체적인 보통명사인 양파와 닮은 점은 무엇일까? 까도 까도 새로운 게 나오거나 까도 까도 눈물이 나는 양파의 극단적인 속성과 결혼의 닮은 점이 발견되면서 사유는 비약적으로 폭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