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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으로 계(戒)를 무너뜨리는
색계(色戒)형 강의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로 상대방의 마음을 훔치는 강의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로 상대방의 마음을 훔치는 강의:

()으로 계()를 무너뜨리는 색계(色戒)형 강의의 10가지 특징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 1》의 첫 문장이다. 재미있는 강의는 엇비슷하지만 재미없는 강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미가 없다는 말로 바꿔 쓰기를 해도 여전히 일맥상통한다. “재미있는 강의는 심장을 공략해 의미심장한 감동을 낳지만 재미없는 강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미가 없다.” 재미없는 강의는 머리를 공격해 이해를 도모하지만 와닿지 않고 메시지가 허공에서 표류한다. 재미있는 강의는 청중의 마음을 훔쳐서 뒤흔든다. 듣다 보면 의미의 깊이도 심화되면서 재미와 함께 힘든 사람에게는 위로의 메시지로 다가가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의 메신저가 된다. 타성에 젖어 사는 사람에게 재미있으면서 의미 있는 강의는 새로운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오만과 자만에 빠진 사람에게는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준다.


나도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 재미없는 강의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나도 모르게 따랐다. 90년대 유학 후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입사, 처음 강의를 할 때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의미를 의미를 이해시키는데 주력했다. 겪어본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에 기대서 내 주장을 피력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청중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고 관심 있는 눈으로 강의에 몰입하거나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얼굴은 화끈거리고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경험도 부지기수(不知其數)로 했다. 이런 곤란한 강의 경험을 3년 정도 겪으면서 한 가지 궁금한 질문이 생겼다. 왜 내가 강의를 하면 집중하지 않고 딴짓을 하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고 표정이 다 굳어지는 것일까? 가끔 줄거나 참지 못하고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정말 예의가 없는 사람이 아니까? 하지만 강의경력이 쌓일수록 내 강의가 별다른 영향력도 없고 자신들의 직무나 삶에 별다른 도움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한 마디로 내 강의는 재미가 없었고 의미가 있었어도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강단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경험으로 깨달은 몇 가지를 거울삼아 어떻게 하면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강의를 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며 부단히 연습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단련해 왔다. 재미없는 의미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고 의미가 없는 재미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다가온다.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의미가 심장에 꽂히는 강의를 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한 가지 해답을 ‘색계(色戒)’라는 영화에서 찾았다. 계(戒)는 색(色)으로 무너진다. 청중의 경계하는 마음은 강사의 독특한 색깔 있는 강의로 무너뜨릴 수 있다. 모든 강의는 자기 삶이 지닌 대체 불가능한 자기만의 스타일과 컬러가 만들어낸 창작품이다. 삶이 사람마다 다르듯, 그 사람이 하는 강연 역시 다른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색깔이 결국 가장 차별적 경쟁력을 지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 나만의 색깔로 청중의 경계하는 마음을 무너뜨리는 10가지 비밀 무기를 찾아가는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첫째, 초반 기선을 제압하는 자기만의 필살기나 독특한 소재로 청중의 관심과 흥미를 북돋우며 기대를 망가뜨리거나 저버리는 내용으로 강의 전반의 내용을 듣지 않으면 나만 손해가 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특히 청중이 많은 강연의 경우 관중에 관망 자세로 흐르기 시작하면 그 강의를 통해 주의를 집중시켜 자기 페이스로 끌고 가기 참으로 어려워진다. 시작은 무조건 흥미진진해야 한다. 특히 성인들은 초반에 강의를 계속해서 들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시작이 평범하고 기대에 부응하는 식상한 방식이면 그 강의는 거의 주의를 집중시키지 못하고 기대 이상의 감동을 끌어내지 못한다. 예를 들면 저는 세계적인 동기 부여 전문가 브라이언 트레이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그리고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의 사진을 제시하고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청중들이 몇 가지 답을 내놓지만 정답은 아니다. 잠시 청중의 주목을 끈 다음, “세계적으로 유명한 3대 용접공”이라는 뜻밖의 답을 제시하면 관중들은 그때부터 호기심 어린 궁금증을 갖고 내 강의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80년대 수도전기공고  다니면서 취득한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보여준다. 뻔한 강의였다고 생각했는데 펀한(fun) 강의로 주목을 끌기 시작할 수 있다.



둘째, 강의는 무조건 내가 겪어본 경험적 사례를 기반으로 재미있는 에피소드, 반례 들을 기반으로 스토리텔링하면서 깨달은 교훈이나 깨우침을 몸의 언어로 번역, 창의적인 방식으로 소통할 때 청중의 몰입도는 높아진다. 남의 이야기로 남을 감동시키는 강사는 없다. 무조건 자신이 직접 겪어본 이야기를 중심으로 본인의 철학과 신념을 전달할 때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다. 원심력에 이끌려 사회가 원하는 기준에 맞춰서 복사본으로 휩쓸려 살아본 ‘체험’보다 내가 직접 겪어본 ‘경험’을 근간으로 구심력으로 살아가면서 직조해 낸 나만의 서사가 있을 때 내 삶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단속적이며 계획적인 체험적 파편보다 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깨달음이 축적되는 경험적 사례나 이야기가 청중들에게 삶의 교훈으로 다가간다는 점이다. 누구나 비슷한 경험은 하지만 그 경험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경험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비판적 숙고나 성찰적 반성이 뒤따를 때 비로소 경험은 내 삶의 주도권을 쥐게 만드는 경전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셋째, 강의를 하는 시종일관 자신의 메시지가 청중에게 먹히는지를 맥락을 파악, 다음에 어떤 메시지를 어떤 방식으로 제시할지를 상황맥락적으로 감지하면서 즉흥적으로 결정한다. 특정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 싸늘하면 바로 접고 다른 메시지로 반전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 강사는 눈치 9단의 맥락적 사유의 달인이 돼야 한다. 인공지능은 숙맥이다. 주변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미리 작성된 시나리오대로 자기주장을 펼친다. 맥락적 사유는 우리말처럼 고맥락 언어일 때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임기응변력이다. 예를 들면 “너 물 먹었니?”라고 물어보는 말은 “Did you drink?”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 조직에서 해고되었니?(Were you fired from your company?)”라는 의미다. 어떤 의도를 갖고 청중에게 심혈을 기울여 설명하거나 설득했지만 예상대로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판단, 다음 메시지의 방향과 성격을 조정하거나 수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전에 준비된 각본대로 인공지능처럼 자기 입장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그 강의는 실패로 가는 지름길로 접어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넷째,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의미를 다른 사람의 주장을 기반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수록 머리가 아프고 느낌이 오지 않는다. 가급적 자신이 직접 겪어보며 깨달은 주관적 신념을 기반으로 감성적으로 설득하면서 의미를 심장에 꽂아야 의미심장해진다. 고수는 설명하지 않고 설득해서 마음을 훔치는 속수무책의 달인이다.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이해시키는데 주력한다. 이에 반해 뱀장사는 아직 모르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감성적으로 설득해서 감동시키는데 주력한다. 머리로 이해하면 고개는 끄덕이지만 밖으로 나가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슴으로 와닿으면 감동받고 행동할 확률이 높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사의 목적은 이해를 추구하는 데도 있지만 사실은 행동을 촉구함으로써 실질적인 삶의 변화를 유도하는 데 있다. 이해가 와야 행동한다는 주장은 신뢰성이 없다. 사실 행동하면서 기존 이해도의 차이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더 현실적이다. 통찰이 행동으로 부르기보다 행동이 통찰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앉아서 생각하고 이해한 다음 몸을 움직여 이해한 대로 실천하기보다 우선 실천하면서 몸으로 겪은 깨달음이 기존 이해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다섯째, 한 가지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접근논리나 관점을 융복합시켜  한 가지 주장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몇 번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풍부한 배경지식을 기반으로 색다른 사유체계를 증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강의일수록 단순한 테크닉으로 무장한 강의를 능가하는 이유다. 상식과 통념상으로 볼 때, 타성에 젖은 생각과 틀에 박힌 관점과 시각에서 벗어나 색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몇 가지 대안적 관점을 하나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와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뜻밖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소나무를 바라보는 상징적 관점은 지조나 절개, 어려운 상황에서도 백절불굴의 의지로 주어진 난국을 이겨내는 독야청청의 인내와 집념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하지만 지식생태학자의 눈으로 소나무를 바라보면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독불장군이다. 신갈나무처럼 다른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며 협동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홀로 외롭게 춤을 추는 독무와 독립적인 창의성, 즉 독창으로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야망과 아집의 소유자다. 건축가에게 소나무는 목재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고, 생물학자에게 소나무는 침엽수다. 이처럼 한 가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두는 강의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을 수 있다.



여섯째, 내 주장을 지지해 주는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명언, 시구절, 영화나 드라마 대사 등을 평소에 메모해 놓고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콘텐츠를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한다. ‘세 얼간이’라는 인도 영화에 보면 교수가 기계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라고 하니까 주인공인 난초가 기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을 기반으로 아주 쉽고 와닿게 설명하니까 교수는 그런 정의를 내리려면 예술대나 상대로 가라고 야단을 친다. 난초의 기계에 대한 정의가 마음에 들지 않은 교수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기계를 정의해 보라고 다시 주문한다. 이 친구는 책에 나오는 기계에 대한 정의를 교과서적으로 그대로 암송해서 토해낸다. 교수의 반응은 훌륭한다는 것이다. 이런 영화 장면을 편집,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정의와 감성적으로 설득하는 정의 중에 어떤 정의가 더 와닿는지를 강의에 활용하면 의미상의 차이가 아주 쉽게 구분된다. 또한 기존 주장을 바꿔 쓰기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변용, 같은 내용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색다르게 전달할 때 청중은 뭔가 다른 강사라는 사실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예를 들면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7쪽)”라는 우치다 다쯔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에 나오는 문장을 바꿔 쓰면 자기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는 방법이 개발된다. “운동을 하지 않는 습관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는 유영만, 김예림의 《부자의 1원칙, 몸에 투자하라》에 바꿔 써서 인용한 문장이고, “책을 읽지 않는 습관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는 유영만의 《독서의 발견》에 재활용한 문장이다.



일곱째, 유머의 8-90%는 언어적 변주에서 비롯된다. 재미있는 강의는 자신의 경험을 자기만의 언어사용방식으로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가공, 촌철살인의 언어나 문장으로 통렬한 깨달음을 준다. 경지에 오른 강사는 언제나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기존 언어 사용방식을 지속적으로 바꿔가며 언어에 대한 공부를 의도적으로 반복한다. 단순한 아재개그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지만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을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촌철살인의 통찰력을 함축하고 있는 자기만의 독특한 역설적 주장이 담긴 명언은 강연의 임팩트를 높이는 소중한 전략 중의 전략이 아닐 수 없다. 흔적이 목적을 만나 축적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곡선의 물음표가 직선의 느낌표를 낳는다. 운동하는 동안은 동안(童顔)이다. 행복은 허리둘레에 반비례하고 허벅지 두께에 정비례한다. 야성이 없는 지성은 지루하고, 지성이 없는 야성은 야만이다. 이런 문장은 직접 겪어본 경험을 운율이 있으면서도 고농도의 의미가 함축된 촌철살인의 깨달음을 언어를 벼리고 벼려서 마침내 문장으로 건축한 깨우침의 얼룩과 무늬들이다.



여덟째, 강의는 내가 살아온 과거의 삶, 살아가는 현재의 삶과 살아가고 싶은 미래를 담아 자기만의 컬러와 스타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연기다. 어제와 다른 강의를 하고 싶으면 어제와 다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내 삶을 능가하는 강의를 할 수 없다. 내 삶을 능가하는 강의를 하는 사람은 탈색 또는 희석된 내용을 위장하거나 포장해서 과장하거나 과시한다. 자기 삶을 능가하는 강의는 메시지의 진실성이 없고 말하는 사람의 진정성이 없어진다. 우여곡절이 많은 삶일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우여곡절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메시지로 담아서 전달할 수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만큼 파란을 일으키는 문장을 건축, 다른 사람의 삶에도 파문을 던지는 스토리텔링으로 감동을 선물로 줄 수 있다. 더 나아가 지금 자신의 삶을 사랑한 만큼 질문도 생기고 자신이 하는 강의도 사랑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사가 감사할 일이고, 모든 게 호기심의 대상이며, 일상이 궁금함의 터전이다. 물음표로 시작하는 하루가 느낌표로 끝나는 감동과 감탄의 하루로 매듭지을 수 있다. 강의도 내가 품은 호기심의 물음표만큼 감동의 느낌표를 선물로 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강의는 기법과 기교의 문제이기 전에 삶에 대한 애정과 열정의 문제다. 자기 삶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강의 기법이나 기교가 어눌하거나 서투르더라도 진실한 삶이 토로하는 묵직한 진정성으로 감동의 무게를 더해간다.



아홉째, 강의를 잘하는 사람을 직접 들어보거나 영상을 통해 벤치마킹은 하되 어설프게 흉내 내지 말아야 한다. 니체가 스피노자를 공부했지만 자기 방식으로 기존 철학을 전복하고 자기만의 철학을 완성했고, 들뢰즈가 니체에 심취했지만 자기만의 문제의식으로 니체를 넘어서는 자기만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구축했다. 저마다의 철드는 방식이 다르듯, 철학적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도가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괴테의 삶이 녹아 있는 문체가 있고, 톨스토이는 자신이 겪어본 삶을 경험적 깨달음의 무늬로 직조하면서 대체 불가능한 자기만의 문체로 문학을 공부하고 글을 썼다. 마찬가지로 대체불가능한 자기만의 콘텐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작품이나 강의를 참고는 하되 그대로 모방하거나 따라가지 않는다. 따라가면 따라잡을 수 없고 영원히 뒤떨어진다. 이류는 가까운 데서 겉모습을 베끼지만 일류는 멀리서 원리를 훔쳐 자기 방식으로 변주한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핵심가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겪어본 작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콘텐츠를 부단히 업데이트한다. 길을 잃거나 딜레마 상황에 빠졌을 때 나에게 나침반이나 북두칠성처럼 길을 안내해 주는 다 섯 가지 키워드가 있다. 바로 열정, 혁신, 신뢰, 도전, 행복이다. 나는 다섯 가지 키워드에 비추어 일과 사람을 선택하고, 딜레마 상황에 빠졌을 때나 의사결정을 할 때 5가지 키워드에 비추어 판단하고 행동하며 작은 스토리를 만들어나간다. 나의 강연은 모두 다섯 가지 키워드가 지칭하는 범주로 묶을 수 있고 쓰는 책도 마찬가지다. 이런 스토리(story)가 나만의 히스토리(history)를 축적하고 그 히스토리가 바로 나만의 길(My Wy)을 걸어가게 만든다.



열 번째, 강사는 늘 낮은 자세로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겸손을 지니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의 변화를 오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변화를 선도하는 강의를 하기 위해서 전공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에 대해 낮은 자세로 배우겠다는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오감을 열고 세상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귀하게 대접받는 사람은 귀를 기울인다. 귀를 기울여 들은 만큼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다. 나는 아직 모른다는 자세로 주변을 관찰해야 나에게 통찰이 다가온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을 나에게 색다른 앎의 길을 열어주는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예기(禮記)에 무불경(無不敬)이라는 말이 나온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존경하지 않을 만한 게 없다는 말이다. 저마다의 존재이유와 가치를 갖고 지금 여기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길가의 돌멩이와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나 풀과 사막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자라는 야생화, 담벼락을 오르는 담쟁이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지은 거미집, 관심과 애정을 갖고 바라보면 그냥 거기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생물은 없다. 모두 저마다의 존재이유를 갖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익숙한 타성의 틀에서 벗어나 틀밖의 사유를 잉태하기 위해서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실력을 쌓아야 한다. 실력은 정체된 명사(名詞)로 존재하지 않고 부단히 움직이며 수정하고 보완하는 동사(動詞)다. 강사를 넘어 사회적 명성을 얻은 모든 명사(名士)는 부단히 자기 변신을 거듭하는 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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