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의 《식물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를 읽고
당신은 명령(命令)하는 사람입니까, 명명(命名)하는 사람입니까?
김영희의 《식물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를 읽고
《식물의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를 쓴 김영희 작가는 이름 없던 한 들꽃을 최초로 발견하고 ‘쇠뿔현호색’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명명자이다. “처음 씨앗에서 발아한 1년생 쇠뿔현호색은 잎이 하나입니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하는 어린 식물의 경우, 잎은 끝이 뾰족한 타원형의 모양을 가집니다. 꽤 동글동글하다는 이야기지요. 하나이던 동그란 잎은 해를 거듭하면서 셋이 되고, 나중에는 원줄기에서 다시 셋으로 깊게 갈라진 솔잎처럼 가늘고 긴 잎들이 달리게 됩니다(78-79쪽).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잡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잡초는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대체불가능한 생명체가 된다. 현호색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생식물이 우리나라에만 20종이 넘는다고 한다. 현호색이라는 성씨를 따라 저자가 최초로 이름을 붙여준 ‘쇠뿔현호색’은 저자의 오랜 관심과 관찰, 주도면밀한 가설을 검증하며 드디어 자기 이름을 갖게 된 식물로서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서식하는 한국특산식물이라고 한다. 그렇게 작가의 친구이자 연인이 된 ‘쇠뿔현호색’은 자기 이름에 새겨진 숱한 사연을 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태계의 한 구성원이 된다.
이름에는 주름과 시름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철학자 들뢰즈는 다중체 또는 다양체(multiplicity)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다중체는 말 그대로 다양한(multiple) 주름(pli)이 축적되어서 생긴 한 사람의 정체성(multiplicity)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름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직간접적인 경험의 흔적들이다. 내가 겪으면서 내 몸에 남긴 얼룩과 무늬가 다양한 주름으로 축적되면서 나의 정체성이 생성되고 형성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담긴 사연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만큼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만큼 살아오면서 겪어낸 몸부림과 안간힘의 흔적으로 생기는 주름과 맥을 같이한다. ‘이름’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어낸 ‘주름’과 시름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생긴 사연의 다른 이름이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함께 이름에 담긴 아픈 사연도 사랑한다는 의미다. 작가로부터 처음 자기 이름을 갖게 된 ‘쇠뿔현호색’을 비롯, 며느니밑씻개나 큰개불알풀처럼 입에 오르내리기 거북할 정도로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는 식물도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식물이다.
“식물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며, 곧 그들과 사랑과 빠지겠다는 열린 마음입니다. 이름을 알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은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11쪽). 사랑하면 질문이 쏟아진다. 이 식물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식물 이름에 담긴 독특한 사연이나 있는 것일까? 그 이름에 담긴 역사적 의미가 있거나 지역적 고유함을 담아내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갖가지 궁리를 하면서 관심의 눈길은 급기야 손길을 부른다. 가만히 앉아서 식물의 이름을 관념적으로 연구하기보다 그 식물이 자생하는 곳으로 직접 가서 감각적 눈과 오감을 열고 관찰해 본다. “책 속에서 식물을 깊이 있게 공부했다 하더라도 직접 보는 느낌은 다를 수 있거든요. 꼭 현장에서 식물을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느끼고 사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사람 잡는 선무당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길입니다”(51쪽). 저자는 식물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이름의 사연의 뒤꼍 기를 파고들어 가 학명과 속명은 물론 정식 이름 이외에 다르게 불리는 이명이나 민간에서 오랫동안 불려 오는 지방명인 향명과 우리나라에서만 고유하게 불리는 국명까지도 파고들어 그 어원과 사연을 조사하고 직접 그 식물이 자행하는 현장으로 뛰어들어 샅샅이 확인하고 살펴보며 궁리를 멈추지 않는다.
비슷한 이름이지만 전혀 다른 사연을 품고 있다
저자는 더불어서 식물의 이름만 기억하지 말고 식물의 형태와 생태를 중심으로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함께 기억할 때, 식물이 품고 있는 이름의 본질과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까치밥나무와 까마귀밥나무는 각각 까치와 까마귀에게 먹이가 되는 나무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깊은 산속에서 드물게 자라는 까치밥나무가 마을 주변에서 자라는 까치를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낮은 산지 숲 속에서 자라는 까마귀밥나무는 까마귀 눈에 뜨일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까마귀 밥으로 사용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저자의 추측에 따르면 맛있는 열매인 까치밥나무와 맛없는 열매인 까마귀밥나무에 각각 우리 정서에 맞게 은유한 이름일 것이라고. 관심을 갖고 관찰하다 보면 뜻밖의 통찰에 이르기도 하고 관찰한 결과를 세심히 고찰하며 상상력을 발동시키면 뜻밖의 또 다른 깨달음의 물꼬가 트이는 경우도 있다.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저의 취미이자 특기”(115쪽)라고 생각하는 작가는 큰개불알풀을 보고도 개불알모양으로 보이지 않고 설익은 풋사랑 모습을 띠면서 “뾰족한 아랫부분은 꽃받침 아래에 깊이 감추고, 둥글고 부드러운 부분만을 드러낸 모양”(115쪽)에서 하트모양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이 책의 곳곳에는 사진 없이 식물들의 다양한 사실적 모습을 묘사하고 기술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해당 식물의 양태를 상상하게 만든다. “연영초 잎은 화려한 파티드레스입니다. 허리에서부터 넓게 세장의 잎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잎의 형태를 따라 곡선을 그리며 끝까지 쭉 뻗어 내린 잎맥은 뾰족하게 흐른 날카로운 잎 끝에 닿습니다. 그 큰 잎맥과 잎맥 사이에 사선으로 연결된 작은 맥들이 치맛자락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합니다”(122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 스칼렛 오하라의 드레스에 연영초를 비유하면서 “유혹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는 있으나 쉽게 보이고 싶지는 않은 이중적인 마음”(123쪽)을 드러낸다. “매실과 살구가 그렇고 자두와 복숭아 역시 봄에 꽃을 피웁니다. 뒤이어 배와 사과꽃이 핍니다. 이 중에서 매실, 살구, 자두, 복숭아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고 배와 사과는 잎과 꽃이 함께 나옵니다. 결국 잎과 함께 꽃잎 피는 배나무와 사과나무는 같은 봄이라도 좀 더 늦게 꽃이 피는 셈입니다”(224쪽). 관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세밀한 차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대자연의 위대한 교향곡을 연주한다.
단어에는 그 사람이나 식물이 고유한 향기가 스며들어 있다
늘 만나는 식물이지만 호기심이나 관심을 갖고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저 바람에 흔들리고 비바람과 천둥 번개 맞고 사계절을 따라 새싹과 잎을 만들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가시연꽃과 연꽃은 같은 연꽃 같은데 같은 연못에서도 앙숙으로 살아가는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비밀이다. 한해에는 연꽃이 연못을 지배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다 다른 해에는 가시연꽃의 위세에 눌려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경우가 있다. “눈을 뚫고 피는 꽃을 뜻하는 눈색이 꽃이나 얼음 사이에서도 핀다고 해서 얼음새꽃”(116쪽)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복수초(福壽草)는 원수를 갚는 복수(復讐)와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때로는 한눈을 팔아야 두 눈으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모습 속에 담긴 생명체의 생존 방식과 원리를 간파할 수 있으며 종종 한눈에 반하는 식물의 기이한 모습을 보고 경탄에 마지않는 감탄사를 자기도 모르게 연발하는 경우를 만난다. 한눈을 팔지 않으면 한눈에 반하는 식물의 경이로운 모습을 포착하기도 쉽지 않다.
백리향과 천리향 그리고 만리향은 진짜 향기가 백리, 천리, 만리를 가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직감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다 갑자기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에 더 비중을 두고 알아본다. “백리향은 꿀풀과 이고, 천리향(서향)과 만리향(백서향)은 팥꽃나무과로 과(科)부터 완전히 다릅니다”(27쪽).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향기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생김새나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서 유사한 친척은 아니라고 한다. 백리향은 실제로 향기가 100리(40Km)까지 가지 못하지만, 향기를 100리까지 데려다는 방법은 향수나 화장품 같은 인위적으로 만든 향기를 제거하고 백리향으로 온몸에 스며들게 하고 차를 타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고유한 그 사람 특유의 향기가 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떤 단어를 떠올리면 그 단어와 내 삶의 희로애락이 겹쳐지면서 단어에 담긴 내 삶의 무게감이 묵직하게 다가오면서 특유의 진한 향기가 배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향기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사람은 인간적 신뢰가 없거나 타인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자기 이익에만 함몰된 경우가 많다.
이름은 심층적 의미나 의도를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에 따르면 너도밤나무나 나도밤나무는 모두 밤나무를 닮았지만 이들은 가깝지도 않고 친척관계는 아니다. 둘 다 밤나무니까 가까운 친척사이로 차이점보다 닮은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경우가 식물 이름에는 비일비재하다. 마찬가지로 바람꽃이 있는가 하면 나도바람꽃과 너도바람꽃도 존재한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자기 이름을 가진 식물은 자기 이름값을 하면서 식물 생태계에서 자기 방식으로 살아간다. 고마리라는 풀은 수질 정화에 탁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가축의 먹이가 되어준다는 이유로 ‘고마운 이구나’라는 이유로 고마운 풀이라고 불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걸리적거리나 그만 자라거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받는 풀로도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자연의 모든 식물은 저마다의 존재이유가 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험난한 세상을 원리나 노하우가 있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창포와 꽃창포 역시 소속이 완전히 다른 식물이다. 식물의 이름만 보고 섣불리 사람의 입장에서 재단하고 평가하지 말라는 의중과 의도도 숨어 있다. 예를 들면 수술이 검은색인 다래와 노락색인 개다래와 쥐다래는 열등의 표식으로 사용되는 ‘개’와 ‘쥐’라는 접두어의 의미와 관계없이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인간의 상상력을 능가할 정도로 자기만의 재능과 적성을 자신감 있게 표현하며 살아간다. 이름에 담긴 표면적인 의미는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심층적인 의중이나 의도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 책의 특징 중의 하나는 식물이름과 관련된 사진이 한 장도 없어 저자의 설명이나 해설을 따라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사진을 보면 이미지로 식물의 모습을 쉽게 짐작하고 더 이상 생각의 날개를 펼치지 않지만 사진이 없어서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저자의 설명이나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뇌리 속을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꽃 필 때의 모습이 고봉으로 담은 쌀밥 같아서 붙여진 이팝나무와 좁쌀로 밥을 지어놓은 것과 비슷한 조팝나무를 설명한 부분에서는 시종일관 쌀밥과 조밥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비교하고 비유하면서 두 나무의 차이를 상상하게 된다. 가시가 있어서 찔리는 꽃이서 조심스럽게 꺾을 수 있는 꽃이라는 들장미 찔레꽃과 손으로는 절대 꺾을 수 없는 바다장미 해당화(海棠花) 역시 각각의 장미에 박힌 가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꺾을 수 있는 꽃과 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시가 박힌 해당화를 구분하고 그 차이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어 놓으며 읽기를 멈추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장미는 꽃집에 입성하지만 들장미 찔레꽃과 바다장미 해당화는 왜 꽃집에 아직도 입성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찔레꽃과 해당화에게 물어봐야 될지 꽃집 주인에게 물어봐야 될지는 누가 알려주는지 궁금하다.
오감을 열고 미묘한 차이를 체감하지 않고는 미묘한 차이를 알 길이 없다
그냥 주마간산(走馬看山) 방식으로 주변의 식물을 보면 그게 그거 같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식물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차이를 구분하고 구별해 내기는 쉽지 않다. 진달래, 철쭉, 산철쭉의 차이점을 구분해서 설명하는 챕터 글을 몇 번 읽어도 아리송하다. 진달래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고, 철쭉이나 산철쭉은 잎과 함께 꽃이 핀다고 한다. 색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진달래는 진한 색이고 철쭉은 그보다 연한 색, 즉 빨강 물감에 흰색 물감을 섞었을 때 나오는 분홍색이라고 한다. 또한 철쭉은 잎이 산철쭉보다 크고 잎끝이 둥글고 산철쭉은 잎이 작고 끝이 뾰족하다는 설명을 반복해서 읽어도 관념적으로 조금 이해될 뿐, 내가 직접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산철쭉 앞에 직면하면 뭐가 뭔지 구분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탁월한 설명을 듣고 머리로 이해가 와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 까닭은 내가 직접 세 가지 꽃 앞에 직면해서 감각적으로 느끼는 차이를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식물을 구분한다는 의미는 다른 식물과 분리시켜 독립적인 생명체로 인식한다기보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 주고 내가 너와 어울릴 수 있지만 나만의 대체 불가능한 고유함을 다름과 차이로 인정하고 수용해 달라는 식물들의 항거에 우리가 겸허히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참나뭇과에 속하는 6형제 나무, 즉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를 설명하는 내용은 더욱더 혼돈을 넘어 혼란이 급습하지만 그걸 잠재울 명료한 구분 기준으로 서로의 차이점에 따라 구분하는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갈참나무는 잎을 갈아치운다는 가랑잎과 갈잎에서 유래된 이름이자 모든 나뭇잎이 푸르다는 고정관념을 깨 주는 주인공이 바로 갈참나무인 까닭은 어린 나뭇잎이 꽤나 갈색이다. 신갈나무는 전형적으로 푸른 잎이고 떡갈나무는 붉은빛이 감도는 밝은 색으로 분홍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상수리나무는 앞면보다는 약간 노란색이 감도는 초록색이고, 굴참나무는 앞면은 초록색이고 뒷면은 분녹색으로 흰빛이 난다고 설명하지만 참나무 6형제를 구분해서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육감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내가 직접 참나무 6형제를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육감적으로 그 미묘한 차이를 가슴으로 느껴봐야 참나무 6형제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명명을 바꾸면 운명도 바뀌는 혁명이 일어난다
저마다의 이름에는 각자 살아오면서 겪어낸 사연과 뒷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을 품은 채 해독이나 해석되기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살구나무는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고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자두나무는 자도(紫桃), 즉 자주색의 복숭아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겨울을 당차게 살아내며 겨우겨우 살아남아서 겨우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라는 사연을 들어보면 그 식물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식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사람에게 말 못 할 사연을 남기기도 하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식물은 한 번 씨앗이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뼛속 깊숙이 박혀 있는 생명체다. 예를 들면 물이 좋아 물가에 사는 버드나무는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하다. 하지만 씨앗이 날아가다 바람의 방향을 잘 못 타고 가가 물가에 떨어져 생명성의 보장받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할 수도 있지만 씨앗이 물에 닿지 않도록 털이 있어서 물에 떨어져도 떠내려가다 물가장자리 쪽으로 운 좋게 맞닿아 생명성을 이어가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식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자리 탓을 하는 게 아니라 자세를 바꿔서 자격을 새롭게 취득하는 거다.
이름을 알려고 노력하면서 이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이름은 마음과 생각의 주름으로 남고 이름으로 구분되는 식물의 근원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색찬란한 삶을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식물들에게 아직은 미안한 이야기지만 누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을 쓴 작가처럼 가던 길도 멈춰 서서 늘 만나고 지나쳤지만 어제와 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주변의 식물친구들에게 안부인사라도 전해주고 싶다. 하지만 한 번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고 멀리서 관망하거나 관조하면서 가까이서 살아가는 내 삶의 친구이자 연인인 식물들에게 안부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바쁜 삶의 일과에 매몰되어 살아왔던 적이 더 많지 않았던가. 식물인간에서 식물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내 삶의 철학과 교훈을 배우는 식물사람으로 거듭나며 식물철학자로 재탄생하고 싶은 우리들에게 이 책은 명령보다 명명이 한 사람의 운명도 바꾸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명령하는 사람보다 자기만의 문제의식으로 명명하는 사람이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하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