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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철살인의 대가, 시인에게 배우는 의미심장한 짧은 문장

촌철살인의 대가, 시인에게 배우는 의미심장한 짧은 문장


짧은 문장에 의미를 잉태시켜 통념을 깨부수고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게 만들어는 주는 대표적인 작가가 시인이다. 시인은 ‘틀 밖’에서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뜻밖’의 느낌표(!)를 찾는 사람이자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화룡점정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을 포착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세상 만물이 말하는 걸 헤아려서 번역하는 사람이다. 짧은 문장의 본질과 핵심을 배우려면 시를 읽어야 되는 까닭이다. 모든 ‘시인’은 ‘원시인’이다. 원시적 사유로 사물이나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볼 뿐만 아니라 수없이 봤지만 아무도 보지 못한 숨은 그림자를 포착, 탄성을 자아내는 언어로 벼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답지 않은 세상에도 시답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오늘도 안간힘을 쓰며 애쓰는 사람, 바로 시인을 만나 짧은 문장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7가지 역할을 알아보려고 한다. 시인은 “침묵하는 존재들의 입을 열어준다.”오은 시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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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범주를 깨뜨리는 범법 행위를 주기적으로 저지르는 범인이다


시인은 조르주 페렉의 《보통 이하의 것들》에서 말하는 ‘일상적 실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더 이상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고, 우리의 삶을 이루는 진짜 요소들을, 지각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살아(193쪽)는 현상을 말한다. 시인의 상상력의 텃밭은 매일 만나는 익숙한 일상이다. 일상에서 상상력이 폭발하는 시인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우리들은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실종당한 일상적 실명 상태로 살아간다. ”진짜 스캔들은 갱내 가스 폭발이 아니라, 광산에서 행해지는 노동이다. 진짜 ‘사회적 불편함’은 파업기간 동안의 ‘시급한 사항들’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삼백 육십 오일이다“(16쪽). 정상적인 상황이 반복되면 정상적인 존재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뭔가 사고가 나거나 사건이 발생하면 정상적인 일상의 민낯이 드러난다. 하지만 시인이 주목하는 스캔들의 원천지는 스물 네시 간이 이어져 일 년의 시간을 만드는 낯익은 일상이다. 페렉의 《생각하기/분류하기》에 따르면 ‘일상적 실명’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에 있는 것, 거기에 정박되어 있는 것, 지속적인 것, 저항하는 것, 거주하는 것”(48쪽)을 담아내는 글쓰기를 통해 ‘현재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시인들이 주목하는 일상은 특정 언어로 재단되어 고정되어 있는 의미의 덫이다. 한 의미의 덫에 걸리면 다르게 사유할 수 없는, 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말하는 ‘언어적 거세’이자 범주화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특정한 새 종들은 수천 개의 씨앗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자, 우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단어들을 발명하는 방식”(252쪽)이다. 사람에게는 지능을 쓰고 새들에게는 본능이라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새는 사람에 비해 태생적으로 낮은 지능을 갖고 있어서 뭔가 인간보다 우월한 행동을 하는 것은 새의 지능이라기보다 우생학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언어적 거세’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서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다. 인간이 자신을 정상의 위치에 두고 다른 생명체들을 격하시키는 언어적 수법이다. 이렇게 언어를 통해 다른 생물의 능력이나 가치를 의도적으로 낮춰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언어적 거세’다. 시인은 언어적으로 거세당한 자연이나 일상의 야생성을 복원하기 위해 그들의 존재이유를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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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식 <꽃>에 대한 명명에도 반기를 드는 일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순간, 특정 이름으로 명명될 것이고, 명명된 꽃 이름은 분류체계에 따라 범주화의 늪에 갇혀 다른 꽃으로 변신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당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인간 편의주의적으로 분류된 언어적 기호일 뿐이다. 인간의 편의나 편리 관점에서 분류된 물고기처럼 자연이 많은 생명체는 오늘도 인간에 의해 범주화되고 분류당한다. 물고기는 그저 그냥 물에서 사는 수많은 자연 상태의 생명체의 한 가지일 뿐이다. 범주는 과학자들이 거주하기 위해 만드는 안주(安住)나 정주(定住)의 상징이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저주(咀呪)다. 왜냐하면 범주를 만드는 순간 범주 속에 들어간 사물이나 생물은 그곳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내겠지만 범주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저주받은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범주를 깨뜨리는 범법 행위를 주기적으로 저지르는 범인이다. 명명하는 일은 기존에 없었던 기능이나 동작, 현상이나 추세등을 새로운 언어로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다. 하지만 한 번 특정한 이름을 부여받으면, 그 이름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가능성을 봉쇄해 버린다. 한 번 이름이 지어졌고 특정한 분류체계로 범주화되었어도 부단히 범주 밖에서 다른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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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허공에 어망을 던져 바람에 날아가는 물고기를 낚는 무모한 도전자다


“나는 한쪽 눈을 꾹 감고 다른 쪽 눈은 부릅뜬 채 사람과 세상을 향해 언어의 활시위를 팽팽히 당겨 시의 화살을 겨눈다. 그 긴장, 불안, 숱한 좌절, 그리고 아주 간혹 결국 해냈다는, 그러나 온데간데없이 곧바로 사라지는 기쁨, 이 모든 것이 너무나 피곤하다”(145쪽). 심보선의 ‘상상시인론’에 나오는 말이다. 시적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며 활시위를 당겼지만 숱한 좌절 끝에 간신히 몇 번 건지는 시적 언어들, 그나마 좌절의 눈물을 낳는다. 그래도 시인은 허공에 낚시나 어망을 던져 바람에 날아가는 물고기를 낚는 무모한 도전자다. “슬프고 희미하고 신비로우며......인생 그 자체와도 같다.” 시인 데오도르 방빌이 《보바리 부인》을 쓰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작품에 보낸 찬사다. 모든 시인은 슬프고 희미하고 신비로우며 인생 그 자체와도 같은 문장을 쓰고 싶은 사람이다. 슬프고 희미하지만 신비롭기에 그 신비로움의 일부라도 밝혀내고 싶어 사는 인생을 시어로 번역해 내려고 오늘도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세상이 불안한 사람들의 심리와 결탁, 좌절과 절망, 분노와 적개심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난국 속에서도 살아내지 않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에서 밝힌 것처럼 무사유, 곧 ‘사유할 능력이 없음’을 지닌 사람의 순간적인 판단착오가 온 세상 사람들의 힘겨운 아픔을 낳는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상일수록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 자체도 쉬운 해결책을 용납하지 않는다. 넓고 깊은 지성의 폐활량으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실타래 문제를 지적 인내심을 발휘하며 풀어내야 한다. 하지만 현실세계는 서두름과 조급함을 넘어 질주와 촉급함을 온몸에 갈아 넣는 광풍으로 휘몰아친다. 자기중심이 없이 사회가 원하는 원심력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보면 자기 생각 없이 찰나적으로 떠다니는 정보와 이미지의 바다로 침몰하기 일쑤다. 2024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을 정했다. 본래 월든의 작가 데이빗 소로우가 쓴 말이지만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의 숏츠나 릴스와 같은 짧은 영상만 반복해서 보면서 뇌가 이제 사유능력을 잃고 썩어가고 있다는 심각한 경고 메시지다. 이럴 때일수록 시적 산문이나 시를 읽으며 세상과 우주의 섭리가 담긴 촌철살인의 인두 같은 문장에 아로새겨진 주장을 지금 나의 상황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사유능력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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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머리가 심장으로 들어간 느낌을 적확한 언어로 낚아채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현재 글을 쓰는 사람 숫자만큼의 환자들이 늘어나 넘쳐날 것이다”(166쪽). 이병률의 ‘글을 쓰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현재 글을 쓰는 사람 숫자만큼의 환자들이 넘쳐날 것’이라는 글에 나오는 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시를 쓰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현재 시를 쓰는 사람 숫자만큼의 환자들이 늘어나 넘쳐날 것이다”라는 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글을 쓰려면 책을 읽어야 하는데 책을 읽지 않고 범람하는 정보 파편이나 이미지의 홍수에 도취당한 채 뭔가를 붙잡고 그 의미심장함을 심장으로 느끼며 깊게 사유하지 않는다. 이런 시기일수록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건져 올린 언어꾸러미에 담긴 사유의 보물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발견하는 노력을 게을리 지 하지 말아야 한다. 사막에서도 폭염을 뚫고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의 파란만장한 삶을 직접 살아보며 몸으로 감각한 느낌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철학자는 사막 속의 개미가 뜨거운 여름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심장이 머리로 들어간 사람보다 머리가 심장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느낀 점을 적확한 언어로 낚아채서 쓰는 사람이다. 반면에 철학자나 과학자는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져 세상의 이치에 맞는 이야기나 존재의 의미를 분석,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객관적인 증거를 들이대며 말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스스로 우여곡절이라는 절에 자주 들려 자신의 겪어본 경험적 얼룩을 시적 무늬로 조탁하는 사람이다. 시(詩)라는 말도 절(寺)에서 벼린 언어(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나를 살린 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어. 다시 한 걸음을, 항상 똑같은 한 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것 말이야.” 생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말이다. 난국에 겹쳐 설상가상으로 힘든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일상을 이어가지 않으면 또 다른 비상시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 오늘의 평범한 한 걸음의 보행이 뒤집혀 미래의 위대한 행보가 될 밑거름이 될 수 있으니까.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진보도 항상 그때그때의 일보만이 진보이며 2 보도 3 보도 n+1 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일보 없이 어떤 진보도 불가능하다는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1》에 나오는 말이다. 위대한 변화는 위대하게 시작하지 않는다. 작은 발걸음 일보가 이보를 불러오고 이보가 지속되는 보행을 가져오며 그게 결국 힘든 상황에서도 행복을 부르는 원천이다. 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 걸음 내딛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더 힘들어질 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사실 더 힘들어지면 또 사라진다”(19쪽).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에 나온다. 지금보다 더 힘든 상황이 올 것이라고 앉아서 걱정하기보다 힘든 상황을 극복하며 힘을 기르면 힘든 상황이 와도 힘을 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삶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으므로 살아가야 했다”(271쪽).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4》에 나오는 말이다. 나의 주체적 의지와 관계없이 삶은 오늘도 나를 살아가게 만들고 내일도 살아가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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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야 다른 삶을 읽을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의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 시 첫 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길을 잃은 게 실수나 판단착오의 산물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결정한 본인의 의지의 결과다. 앞만 보고 달리면서 목적지나 목표달성을 위한 최단코스를 설정, 중간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고 가급적 가장 빨리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속도와 효율이 기계처럼 작동한다. 디지털 기술은 출발지와 목적지만 존재하는 이분법을 각인시킨다. 과정은 없고 결과만 존재하는 세계다. 가고 싶은 목적지가 생기면 내비게이션에게 최단거리로 도작하는 길을 물어보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간다. 뇌는 존재이유를 상실하고 기계나 기술이 대신 뇌기능을 대신하기 시작한다. 생각하는 뇌는 명령하고 답을 기다리는 뇌로 전락한다. 궁금하고 답답하면 뭐든지 인공지능에게 물어본다. 긴 글을 요약해 달라고 질문하고, 중요한 문장을 발췌해 달라고 말한다. 그동안 뇌는 호기심 어린 눈을 뜨고 답을 찾아오는 인공지능의 신기함에 감탄한다. 머뭇거리고 서성거리며 망설이는 시간은 비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힌다. “인간의 걸음은 망설임에서 우아함을 얻는다. 결연함이나 서두름은 인간의 걸음에서 우아함을 깡그리 앗아간다”(17쪽). 한병철의 《관조하는 삶》에 나오는 말이다.


“빠름은 시의 적이다. 그리우므로, 그리움으로, 그리움에로 씌워져야 할 서정시의 적이다. 그리움의 전략은 느림이라는 전술을 동반해야 한다”(569쪽).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에 나오는 말이다. 느림이 그리움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곡선주로에서 달리는 속도전을 멈추고 길을 잃고 가려는 길을 찾아보는 기다림의 곡선 에움길이 필요하다. 시인이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라고 결단을 내린 이유는 더 이상 누군가 길이라고 알려준 그 길이 과연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인지를 의문시해 보고 다른 길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남들이 알려준 직선 주로로 달려가 목적지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심장은 뛰지 않고 다리만 심하게 떨리며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온몸을 감도는 까닭을 심각하게 찾아보려고 하지 않고 잠시 떨리는 다리를 끌고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세상이 옳다고 믿는 도덕을 따라 결정하고,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관례나 기준에 따라 어제보다 더 바쁘게 살아가지만 뿌듯하지 않고 늘 빠듯하다. 철도에서 KTX나 SRT를 타고 더 빨리 달려가고 고속도로에서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전용차선으로 달려가서 목적지에 도달하면 그만큼의 여유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여유시간만큼 더 서둘러서 뭔가를 추구하며 성취하는 성장기계는 효율과 속도를 먹으며 더 빨리 돌아간다. 시를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가고 있는 길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방황하기 위해서다. 어제와 다른 방황이 또 다른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여지를 알려준다. 길을 잃고 방황해 봐야 상수(常數)만 있는 게 아니라 수학의 실수(實數)도 실수(失手)를 하고, 분수(分數)가 분수(分數)를 모르는 일도 많아서 뜻밖의 변수(變數)를 만나 미지수(未知數)를 풀어야 하는 난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 ‘미지수’는 ‘무리수(無理數)’가 ‘미지’의 길로 안내해 주는 희미한 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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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다시 길을 잃어야겠다. 길을 잃어야 다른 길에서 다른 삶을 읽을 수 있다. 길을 잃어버려야 그동안 옮다고 믿었던 신념체계도 통념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각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지금까지 통용된 방식도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답습해 온 관습이나 관계일 뿐이라는 점도 알게 된다. 길을 잃어봐야 뇌리를 지배하던 기존 진리를 따라가는 삶도 무리가 될 수 있음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다. 길을 잃어봐야 되는 이유는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의 ‘길’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길’이라는 시에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는 구절이 연이어 나온다. 사람이 길을 만든 게 아니라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해서 늘 길 위해서 길을 잃어버리게 한 다음 다른 길을 찾아 나서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이 길을 찾아 만든 게 아니라 늘 길을 잃은 사람에게 다른 길이 다가와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가르쳐주는 덕분에 길은 책이자 인생 학교다.


내가 가는 길이 곧 길이다! 길은 앞에 있지 않고 뒤로 생긴다. 뒤로 생긴 길은 누군가 처음으로 걸어간 길이다. 처음으로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이 남긴 길은 앞에 있지 않고 뒤로 생긴다. 뒤로 생긴 “길을 만든 사람은 길을 벗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격월간 발행되는 일본의 라이프 스타일 잡지, 2017년 87호 FILT의 표지 문구다. 정규영의 《일본어 명카피 핸드북》에 소개된 문구다. 길 안에서 또 다른 길을 만들 수 없다. 길을 만들어 처음으로 자기 길을 걸어간 사람은 모두 세상에서 반드시 걸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정상 코스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인생에, 쓸데없는 시간을.” 일본의 OTT 플랫폼인 U-Next의 2021년 옥외광고 카피다. 쓸데없는 시간에 소일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목적 없이 방황하다 불현듯 스쳐 지나간 아이디어 하나가 쓸모 있을 때가 많다. 쓸데없다고 생각한 것도 쓸 때가 온다.


시답지 않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어야 되는 이유 또는 시인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를 시인이 발휘하는 역할에 비추어 음미해 보면서 난관을 돌파하는 혜안과 안목의 정수를 시를 통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의미의 결정체가 압축된 짧은 문장을 쓰는 시인의 역할을 통해 그들이 쓰는 짧은 문장의 기발한 발상과 상상력을 충전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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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역발상의 귀재-시각 교정자이자 생각의 물구나무서기 선수


시를 읽어야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역발상을 통해 짧은 문장에 담긴 의미를 배우기 위해서다. 시인은 관점의 배반자이자 생각의 물구나무서기 선수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25쪽).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에 나오는 말이다. 시인은 기대를 저버리고 정상적인 발상을 뒤집어 역발상을 시도하면서 우리에게 낯선 생각을 잉태하게 만들어준다. “망치가 못을 친다/못도 똑같은 힘으로 망치를 친다.” 이산하 시인의 ‘사랑’이라는 시의 일부다. 망치만 못을 치는지 알았더니 똑같은 힘으로 못도 망치는 친다는 역발상을 깨닫는 순간, 못을 박는 망치도 못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준엄하게 알려준다. “이타심利他心은 이기심利己心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이 아니다.” 황지우의 시집 《게눈 속의 연꽃》에 실린 '산경(山徑)'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타심이 다른 사람으로 향하는 사랑인 줄 알았더니 결국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욕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를 통해서 깨닫는다. 이타심을 바라보는 시각 교정자이자 이기심에 대한 나의 확신을 배반하는 문장이다. 역시 이기적이라야 기적이 일어난다. “술은 아직 나를 마셔준다. 나는 술의 기호품이다”(79쪽). 이영광의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의 명정수첩-이영광 에세이 중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셔준다는 역발상이 내가 술의 기호품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다.


“늘/강아지 만지고/손을 씻었다/내일부터는/손을 씻고/강아지를 만져야지.” 함민복 시인의 ‘반성’이라는 시다. 강아지를 만지고 나서 손을 씻지 않고 손을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강아지를 대하는 소중한 교훈을 일러준다. “윗물이 맑은데/아랫물이 맑지 않다니/이건 아니지/이건 절대 아니라고/거꾸로 뒤집어 보기도 하며/마구 흔들어 마시는/서민의 술/막걸리.” 함민복 시인의 ‘막걸리’라는 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발상의 뒤집은 역발상의 전형적 사례다. 시인의 임무는 생각의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이 정한 판단기준이나 가정을 뒤집어 거꾸로 생각해 보는 데 있다. “얼마나 아팠을까? 이 뾰족한 가시가 모두 살 속에 박혀있었다니.” 반칠환 시인의 ‘갈치조림을 먹으며’에 나오는 시구절이다. 몸의 중심을 잡고 지탱하는 뼈를 가시로 바라보는 시인의 역발상이 갈치조림을 먹는 마음에 진한 측은지심을 아로새긴다. “사랑인 줄/알았는데/부정맥”(97쪽).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말이다. 심장이 뛰어서 사랑인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 부정맥이라는 판정을 받은 어르신은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플 것이다. “심쿵했다고/말하면 심장질환/의심받는다”(102쪽). 《그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라는 시집에 나오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심쿵이 심장질환으로 급 역전 되면서 웃픈 현실의 안타까움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용접의 시’를 쓰는 최종천 시인에 따르면 “사랑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잘 못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용접을 30년 해본 결과 쇳덩어리가 녹아있는 상태는 물불이 아니라 불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물을 가리지 않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시인의 주도면밀한 경험적 역발상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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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언어의 연금술사-익숙한 언어의 낯선 사용과 조합


시를 읽어야 되는 두 번째 이유는 평범한 경험적 깨달음도 다른 언어로 표현, 짧은 문장을 건축하는 언어사용방식 배우기 위해서다. 시인들의 언어는 평범한 언어적 사용방식을 진부한 언어사용 문법으로 해석한다. 언어적 사용방식이 진부해지면 시어 자체도 타성에 젖어 참신한 발상을 가로막는 장본인으로 행세한다. “나이테는 그 여름의 연서이자/그 겨울의 난중일기이다/나이테는 밑동 잘린 고목의 유고 시집.” 반칠환의 ‘둥근 시집’에 등장하는 나이테에 관한 날 선 생각으로 출산한 낯선 언어다. “시는 독자를 소스라치게 만드는 귓속말, 시는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혼잣말“(87쪽)이다. 이성복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독자를 놀라게 하면 틀에 박한 언어적 점성을 깨부수어야 한다. 나뭇가지의 절규, 그림자의 안간힘, 서글픔의 경전, 고개 숙인 물음표, 그믐달의 상처불길의 멱살처럼 이제껏 만나보지 못했던 단어 간의 낯선 만남이 낯선 사유를 잉태한다. 성선경 시인의 ‘분필을 잡은 딸에게’라는 시에 “애들은 원래/잘한다, 잘한다 그러면 훌쩍 자란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잘한다’는 칭찬이 ‘자란다’를 북돋아주는 언어유희적 표현이다. “우리 마누라 옛날엔 미녀/지금은 마녀”(64쪽). 《그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라는 시집에 나오는 말이다. 미녀였던 그녀, 지금은 마녀라는 언어유희를 통해 극적 반전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악기에 비유하자면 시는 관악기쯤 될 것 같다. 소설이 현악기처럼 끊임없이 사설을 토해놓고, 희곡이 타악기처럼 단속적으로 갈등을 주고받는다면, 시는 구멍, 곧 뭔가 빈 것을 통해 말한다”(310쪽). 권혁웅의 《미래파》에 실린 <사이들>에 나오는 글이다. 소설은 현악기이고 희곡은 타악기이며 시는 관악기라는 놀라운 은유적 상상력은 양자 간의 유사성에 대한 깊은 관찰이 낳은 통찰이다.


“더 이상/덤이 없는 곳/그러니까/이 생은 덤이라는 뜻.” 복효근 시인의 ‘무덤’이라는 시다. 무덤을 무(無)덤으로 해석했다. ‘덤’이 없는 곳을 ‘무덤’으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인 결과다. 언어를 재창조, 재조합, 재연 결해서 익숙한 언어를 전혀 다른 청중들에게 설명해 보라고 한다. 익숙한 언어를 낯설게 의미화시키는 천재가 시인이다. 시인은 “의식의 바늘귀에 언어를 통과시키는 엑스터시를 느낀다”(161쪽). 전경린의 ‘의식의 바늘귀에 언어를 통과시킬 때’에 나오는 말이다. 시인은 보고 느끼며 온몸으로 감각하는 과정과 결과를 언어로 번역하고 해석하며 낯선 통찰의 과정을 날 선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마침내 자연과 우주의 섭리는 하나의 진리로 드러낸다. “우리가 변화라고 하는 것도 ‘언어의 변화’ 혹은 ‘변화의 언어’ 일뿐이다”(88쪽). 이성복의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이성복 시인은 같은 책에서 언어와 삶을 매개하는 문학적 표현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언어는 삶의 가장 먼 곳과 가장 미세한 곳과 가장 어두운 곳을 살피는 망원경이며 현미경이며 내시경이다. 요컨대 모든 삶은 언어로서의 삶이며 언어는 삶 이상으로 고결할 수도, 삶이하로 추악할 수도 없다”(126쪽). 결국 모든 시인은 “특별한 말을 골라 쓴 다기보다 말을 특별하게 쓰는 것이 시다(29) 쪽.” 이영광의 《홀림 떨림 울림》에 나오는 말이다. “종이컵 말고 머그컵 사라/그러면 북극곰이 살아/비닐백 말고 에코백 사라/그러면 고래가 살아/물티슈 말고 손수건 사라/그러면 거북이 살아/조그만 노력으로/우리 모두 사라, 살아.” 윤채민 시인의 ‘사라, 살아’라는 시다. 사는(buy) 걸 바꾸면 사는(live) 것도 바뀐다는 점을 절묘한 언어적 운율에 비추어 생태학적 통찰력을 주는 시다.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다. 그중에 적어도 ‘네 시간은 네 시간’으로 쓰라는 이정록 시인의 네 시간이라는 시도 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기 번호표를 뽑아 무심하게 기다리는 대신 대기 단어표를 제안하는 시인이 있다. ‘어떤 인문학적 제안’이라는 시를 전병석 시인이다. “감사, 사랑, 평화, 배려……/띵동 순간 나는/감사가 되고 사랑이 된다/기다리는 순간에도/생각하는 사람이 된다/아, 저 사람은 평화였구나/오, 저 사람은 배려였네.” 이런 상상 속에서 대기 단어표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1번과 2번 대신, 감사와 사랑을 들고 자기 볼일을 보러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만 상상해도 가슴이 출렁이고 행복하지 않느냐라고 시인이 물어본다.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견뎠던 그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권대웅 시인의 ‘삶을 문득이라고 불렀다’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우쿠 커니가 멍하니를 만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깨닫고 와락 눈물을 흘린다. 평범한 우리말의 연결이 놀라운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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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질문술사-확신은 부패하고 질문은 방부제


시를 읽어야 되는 세 번째 이유이자 시인들이 발휘하는 세 번째 역할은 궁극의 본질이나 평범한 일상에 대해 호기심의 물음표를 품고 질문을 던지게 만들어 원래 또는 물론 그렇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정을 의심하게 만드는 짧은 문장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데 있다. 당근은 언제부터 당근색으로 자기 몸을 물들였을까, 사과는 저렇게 빨간데 왜 속은 저렇게 새하얄까? 딱따구리는 나무를 저렇게 열심히 찍어대는데 왜 두통에 안 걸릴까, 대추는 파랗게 시작해서 언제부터 자신의 몸을 빨갛게 물들이는 걸까? 자동차의 경적은 어떻게 세월의 흐름을 역주행하고 있을까? 형용사의 덤불 속에 가려져 숨죽이던 명사가 왜 갑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반란을 시작하는 것일까? 시인은 평범한 일상의 틀에 박힘에 가려진 삼라만상의 존재이유를 일일이 물어보며 안부인사를 건네는 사람이다. 그냥 거기 존재하는 생명체든 비생명체든 없다. 저마다의 이유와 사연을 품고 지금 여기 위치에서 자신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품고 세상의 울림에 떨림으로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장석주 시인은 시집, 《꿈속에서 우는 사람》에 나오는 ‘내일’이라는 시에 “구부러진 못은 왜 시가 안 되는지” 질문이 나온다. 그 해답을 놀랍게도 착한 망치가 계단 아래서 물어보고 있다. 시인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물어볼 질문이 아니다. 시인이기 때문에 망치로 얻어맞어 구부러진 못의 아픔을 물어본 것이다.


시인의 물음에 울림으로 반응하거나 시인의 울림에 떨림으로 반응할 때 물음표의 곡선은 직선의 느낌표로 달려오면서 순간적인 깨달음의 향연이 펼쳐지는 데 시인은 스 찰나적 순간을 그냥 만끽하지 않는다. 언어창고에 들어가 기존 언어사용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언어로 그 시적 순간을 포착, 물음표가 품은 느낌표의 감동을 포착해 낸다. 질문은 사랑과 동격이다. 사랑하면 궁금증이 폭등한다. 알고 싶다는 느낌은 사랑과 동격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상대는 그 순간부터 질문의 텃밭에서 나의 호기심을 기르는 농부가 된다.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64쪽). 이성복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당연한 것들이야말로 질문을 던지면 감추고 있던 신비한 존재이유를 드러내는 신기한 것들이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정재찬 교수 역시 같은 맥락에서 말한다. “우리는 신기에 흘려 신비를 잊는다”(112쪽). 세상은 호기심 천국이다. 물음표가 없어지는 순간, 불가사의한 신기는 기정사실로 바뀌고 신비는 세계 7대 불가사의정도만 남는다.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을 거부하는 그릇은 왜 없을까?” “갈참나무에서 탈출한 도토리는 무슨 용기(勇氣)를 사용했을까?” “구름은 왜 하늘을 가리는 직업을 가졌을까?”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속도위반으로 CCTV에 찍히면 어떤 마음이 들까?” “우리가 머리를 감을 때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은 어떤 유언을 남길까?” “질문은 자기가 질문이라는 걸 알까?” 황인원 시인의 《무엇을 숨겼을까》에 나오는 질문이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존재 자체가 질문의 대상이며 현상(現像)도 질문을 품은 사상(思想)의 보고(寶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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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측은지심과 역지사지의 달인-눈물의 사제가 되어 슬픔을 배달하는 집배원


시인은 독자의 즐거움보다 괴로움, 기쁨보다 슬픔이나 아픔, 돋보이는 밝은 전경보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배경, 성공보다 실패, 희망보다 절망을 노래하는 작곡가다. 시인은 그래서 측은지심과 역지사지의 달인이자 천재다. 시인이 짧은 문장은 건축하는 원동력은 대체로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측은지심이나 역지사지의 정신에서 나온다. 거의 모든 시는 입장 바꿔서 생각하며 고뇌의 시간을 보내다 문득 다가오는 시적 순간을 포착해서 출산한 시통(詩痛)의 산물이다. “낙엽은 가을이라는 물질 위에 쓴/나무의 유서다.” 이기철의 ‘가을이라는 물질’에 나오는 시구절 중의 일부다. 시인이 낙엽이 되어 흩날리는 가을바람의 쓸쓸함에 젖어 창백한 시간을 보내면서 낙엽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 측은지심의 산물이자 역지사지의 부산물이다. 시인이 시적 순간을 포착하는 과정에는 상대가 겪는 아픔과 슬픔을 나의 아픔처럼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측은지심이 스며들어 있고 역지사지의 지혜가 관여한다. “내 마음의 비밀번호는 이제 당신이랍니다.” 함민복 시인의 ‘마음은행’이라는 시의 마지막 행이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마음의 문이 닫혀 있어서 그 문을 여는 유일한 방법은 내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마음이다. 비가 맨땅에 떨어질 때 가장 아프기 때문에 “맨땅에 풀이 돋는 것은/떨어지는 비를/사뿐히 받아 주기 위해서다.” 이준관 시인의 비라는 시의 일부다. 시인은 맨땅에 떨어지는 비의 아픔을 역지사지로 생각한 다음, 비로 인해 풀이 자라는 게 아니라 비의 아픔을 막아주기 위해서 풀이 자라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열십자(十)를 산부인과 의사에게 보여주면 배꼽이라고 보고 교통경찰은 사거리, 목사는 십자가나 적십자로 해석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기 직업에 틀어 박히면 틀에 박히기 때문이다. 틀어 박히면 측은지심과 역지사지를 통해 타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공감능력이나 긍휼감은 생기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가 교통경찰처럼 열십자(十)를 사거리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잠시 의사를 휴업하고, 교통경찰 신발을 신고 직접 사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해봐야 한다. 공감능력은 책상에서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라 현장에 몸으로 익히는 과정에서 생기는 시인의 미덕이자 능력이다. “꽃게가 간장 속에/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꿈틀거리다가 더 낮게/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저녁이야/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의 일부다. 꽃게가 간장 속에서 사투를 벌이다 점점 깜깜해지니까 어미 게가 알들에게 유언을 남긴 말이 이 시의 마지막 두 줄이다. 어려울수록 시를 읽어야 되는 이유는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이면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결단하기 위해서다.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오늘 몸이 먼저 안다/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이 온다/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이 온다/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정일근의 ‘자연론’이라는 시의 일부다. 죄를 모르고 살다가 내가 무심코 자연을 대상으로 저지른 작은 행동조차도 죄라고 인식되는 순간 불안해지는 시간, 그 순간부터 비로소 사람도 자연이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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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희망의 전도사-위로 메시지 전달자이자 고통번역자


시를 읽어야 되는 다섯 번째 이유이자 시인들이 발휘하는 다섯 번째 역할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잉태할 수 있는 위로 메시지를 짧은 문장에 어떻게 담아내는지를 배우기 위해서다. 김강태 시인의 ‘돌아오는 길’이라는 시는 특이하게 말없음표(……)로 시작해서 물음표로 끝난다. “…… 춥지만, 우리/이제/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채소 파는 아줌마에게/이렇게 물어보기/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 정사익의 ‘희망 한단’이라는 노래로 작곡되기도 했다.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채소 한 단 사주는 일이 희망이다. 채소를 다 팔아야 집에 갈 수 있는 행상에게 희망 한 단 사주는 것이다. 내 희망만 찾을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희망을 건네주는 게 시인의 진정한 존재이유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을 때,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희망을 갖고 용기 있게 도전하게 만드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굴하는 고통번역자가 바로 시인이다. 우리가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되어봐야 하는 다섯 번째는 시인이 희망의 전도사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라는 시가 있다. “가장 낮은 곳에/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며 이 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걸 배울 수 있는 섬이 그래도(島)라는 섬이란다.


최상진 시인도 ‘가을’이라는 시에서 같은 의미를 전달해 준다. “살아가는 일은/어제의 상처로 내일을 여는 일/제 몸을 태워야 완성되는 삶.” 어제의 상처로 내일을 여는 과정에서 상처는 아물고 앓음 다운 흉터로 남는다. 그 흉터가 내 삶을 지지하게 만드는 버팀목이 자라는 곳이다. 시인은 시작(始作) 하기 전에는 시작(詩作)할 수 없다. 시인은 일단 시작(試作)하면서 시작(詩作)하는 방법을 온몸으로 강구한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139쪽).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이다. 방법을 아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온몸을 던져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만 구가할 수 있다. 지금보다 더 사랑의 불꽃을 피우 수 있다는 희망은 있지만 그 방법은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 속에서만 찾아진다는 진실을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래서’라고 논리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라고 기정사실을 거부하면서 불가능과 한계에 도전할 때 삶의 혁명이 일어난다. “희망은 우리에게 마지막 여권, 뿌리칠 수 없는 종신형.” 김승희 시인의 《희망이 외롭다》라는 시집에 쓴 시인의 말이다. 비록 우리가 희망의 종신형으로 구속되어도 피와 땀과 눈물이 뒤범벅되어도 희망의 종류를 바꿀 수 있는 용기로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근육을 믿는 까닭이다. 변론답변서라는 글에서 잭 길버트는 고집스러운 기쁨을 언급한다. “이 세상의 무자비한 용광로 속에서/기쁨을 받아들이려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 절망적이고 좌절을 강요한 시답지 않은 상황에서도 희망의 종류를 바꾸는 용기를 발휘하면 여전히 주변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기쁨을 포기하지 않는 고집이 있을 때 만날 수 있는 살맛 나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눈발이라면/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편지가 되고/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새살이 되자.” 안도현 시인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시의 일부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진눈깨비로 흩날리지 말고 사람이 사는 가장 낮은 곳에 온기 품고 떨어지는 따뜻한 함박눈이 되자는 의미다.


내 몸은 눈물의 총 본산지/유영만


용접을 하기에는

밤하늘이 너무 황홀했다

하늘을 바라볼 수 없어서

군불로 끓인 눈물

고개 들어 눈 속으로

다시 밀어 넣는다


하염없이……

볼 수 없는

어둠 속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까닭은

시간과 바람이 희석시켜

내 몸의 어딘가에

짙은 얼룩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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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기호 해석가-세상의 만물이 전하는 소리나 기호를 해석하는 경청의 귀재


여섯 번째 짧은 문장의 의미를 시를 통해서 배우려는 여섯 번째 목적은 세상이 보내는 소음도 소리로 번역하는 시인들의 놀라운 감각을 배우기 위해서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의 시, '그날'의 마지막 구절이다. 생로병사의 순환을 거쳐 생명체도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내는 생명체든 비생명체든 수많은 신호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간과하거나 무시하기 일쑤다. 시인은 “새벽 물안개에 떠밀려 나타난 굶주린 당신의 언어들”은 도대체 무슨 사연과 사유를 품고 나타났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기다리던 겨울밤”, “서가에 너무 오래 꽂혀 있어서 다리가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책들의 소리”, 삭풍을 견디는 돌멩이의 서글픈 가슴 등이 보내는 무수한 생존신고는 그 자체가 살아있음의 기호다. 누군가에게는 사고한 신호로 다가오지만 시인은 낯선 의미를 잉태한 기호로 해석, 소음도 소리로 번역하고 해석하는 경청의 귀재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라는 책이 있다. 심장이 뛰어서 사랑이라고 해석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정맥이었다는 해석의 이면에 담긴 의미를 반추하는 순간 세월의 무게가 주는 서글픈 웃음이 난다. “홀딱 반했던 보조개도 지금은 주름 속”,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보조개와 데이트의 의미가 역전되어 지금은 주름 속에 파묻힌 세월의 시름이 되었으며, 손을 잡는 애정표현은 이제 혼자서 거동이 힘들기에 부축하는 의미로 기호가 재해석된다.


현실과 이상, 여기와 저기, 바닥과 정상, 절망과 희망, 걸림돌과 디딤돌 사이를 오고 가는 고통을 즐기는 사람, 심증과 물증, 농담과 진담 사이에서 상담하는 사람, 생과 사, 빛과 그림자를 오고 가며 침묵의 항변을 쏟아내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 없고 받아주는 세상이 없을 때 절망의 뒤안길에서 막다른 골목을 만나는 세상만사는 얼마든지 있다. “시곗바늘이 12시부터 6시까지는 우파로 돌다가/6시부터 12시까지는 좌파로 돈다/미친 사람 빼고/시계가 좌파라고,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아무리 바빠도 벽에 걸린 시계 한번 보고 나서 말해라.” 김승희 시인의 ‘좌파/우파/허파’ 중에 나오는 시구절의 일부다. 시곗바늘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를 6시를 기점으로 좌파와 우파로 해석하며 허파를 갖고 있는 모든 생맹체들에게 좌파냐 우파냐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신랄하게 나무란다. 시인이 어른이고 어른이 곧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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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보일러에서 끓고 있는-물은 물에 저항한 만큼 따듯하다”(103쪽). 함민복 시인의 산문집, 《눈물을 왜 짠가》에 나오는 문장이다. 끓고 있는 물을 온도가 되어서 끓고 있다고 해석하지 않고 물에 저항한 흔적이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물이 끓고 있는 기호를 끓을 때가 되어서 끓고 있다고 당연한 현상으로 여기지 않고, 물의 저항강도만큼 뜨거워진다는 시적 해석이다. “마찰을 두려워하지 마라. 마찰은 열이 된다. 그 열만이 열정이 된다.” 2016년 도요타 GAZOO RACING 잡지광고다. 현실에 저항하는 만큼 힘든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저력이 생기고, 기존의 주류와 부딪치는 마찰만큼 통찰의 위력이 생긴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으로 유배된 자들이 내게 띄우는 편지다.” ‘비정성시(非情聖市)’라는 김경주 시인의 일부 구절이다. 고통은 대체 불가능한 일인칭 언어다. 아무리 설명해도 고통의 저면에 흐르는 아픔의 기류를 이해시킬 방도는 없다. 오로지 본인만이 온몸으로 알고 참고 견뎌야 하는 통증이다. 바람이 띄우는 편지를 받아보아도 그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여전히 해독 불가능하다. 짧은 문장의 위력은 100% 이해가 안 되어도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의미 해석 체계에 따라 다르게 해독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나온다. 애월(涯月)에선 출렁이는 바다도 문장이다. “애월(涯月)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서안나 시인의 ‘애월 혹은’이라는 시의 첫 문장을 바꿔 쓴 문장이다. 낮의 적막이 배경으로 질주하다 수평선의 안간힘에 밀려 절망한다. 바다의 몸부림이 파도의 발자취에 취해 슬픔의 답안지에 물음표를 찍는다. 고달픈 바람이 파도 소리를 듣고 기억의 근육으로 물음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도 짧은 문장에 담긴 의미는 계속 미끄러지며 또 다른 해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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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상상력 잉태자 - 일상에서 비상하며 연상하는 경험주의자


일곱 번째 짧은 문장의 의미를 시를 통해서 배우려는 마지막 목적은 상상력으로 짧은 문장을 건축하는 시인의 시선을 배우기 위해서다. 곡선이 직선으로 바뀌면서 생명체는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덫에 걸린다. ‘곡선들’의 시를 쓰는 안도현 시인에 따르면 “추어탕집 양동이에 미꾸라지들이 우글거”리며 “미끄러운 곡선들만 뒤엉켜” 있었지만 “그 곡선들 위에/주인여자가 굵은소금을 한 줌 뿌”리는 순간 “하얀 배를 뒤집으며, 소금과 거품을 뱉어내며” “미꾸라지들은/곧바로 몸에서 곡선을 떼어낸다/그러고는 축 늘어져 직선으로 뻣뻣하게 일자(一字)로 눕는다.” 미꾸라지 입장이 되어 측은지심으로 풀어낸 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시적 순간은 시인의 상상력이다. 물론 상상력의 출발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는 측은지심이다. 곡선으로 휘몰아치던 미꾸라지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주인 여자가 뿌린 소그 한 줌에 뻣뻣한 일자 직선으로 급전환된다. 곡선이었던 미꾸라지는 직선으로 바뀌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곡선의 생명력이 직선을 바뀌는 순간, 그 순간은 더 이상 살아있는 힘을 느낄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하는 시점이다. 상상력은 일상을 관찰할 때 비상한다. 시인의 상상력은 책상에서 관념적으로 생각해서 생기는 공상이나 허상, 망상이나 몽상이다. “작가란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현실을 소설 위에 세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304쪽). 양귀자의 《모순》에 나오는 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시인이란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현실을 시로 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이다.


용접 기능사 시험을 고2 시절, 용접기 온도 조절을 잘하지 못해서 철판에 구멍이 뚫어진 아픈 경험이 있다. 어차피 시험에 불합격될 게 뻔하기 때문에 그동안 준비하면 기울인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순간, 엉뚱한 오기가 발동했다. 어차피 불합격된 시험인데 용접봉을 녹여서 철판에 구멍을 크게 뚫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 후로 철판만 생각하면 보름달이 연상된다. 철판구멍을 보고 보름달이 연상되는 원동력은 철판에 구멍을 뚫어본 아픈 경험 덕분이다. 상상력은 이런 점에서 경험적 상상력이다. 경험해보지 않고 일어나는 상상이 공상이나 허상, 몽상이나 망상을 전락하는 이유다. 상상력(力)에만 힘‘력(力)’자가 붙어있지 않은가. 공상력, 허상력, 망상력, 몽상력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상상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책상에서 관념적으로 연결되어 일어나지 않고 일상(日常)에서 비상(飛上)하며 비상(非常)하게 연상(聯想)된다. “시적 상상력이 변형시킨 고통은 상상력이 빚은 사리”(163쪽)다. 경험으로 생긴 고통 속에서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는 새로운 상상력의 자궁이 된다. 그 자궁에서 어떤 시적 짧은 문장이 잉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고통의 자궁 속에서만 감동을 주고 감명받는 짧은 시작 문장이 탄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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