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문장은 언어로 벼리고 벼린 의미의 미궁(迷宮)이자 자궁(子宮)
경험, 독서, 관계, 사유를 통해 얻은 모든 것을 나만의 언어를 사용하여 나만의 스타일과 방식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정문일침을 주는 짧은 문장이 탄생된다. 이것은 단순히 단어를 배열하는 것을 넘어, 내면의 울림과 개성을 담아내는 예술적인 과정이다. 함민복 시인이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듯, 나만의 시선과 목소리로 표현하는 무한 반복 끝에 반전을 일으키는 짧은 문장이 나온다.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생각이나 감각을 가장 적확하고 간결한 언어로 응축하고 다듬는 과정, 즉 가장 적확한 언어로 ‘벼리는’는 시련 끝에 시금석이 될 만한 짧은 문장이 출산된다. 이때 불필요한 단어를 과감히 버리고, 가장 강력한 단어 하나를 선택, 문장의 리듬과 운율까지 고려해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 같은 ‘한 줄’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지루한 반복과 고통스러운 애쓰기의 산물이다. 데이비드 오길비 카피 롸이터가 말했듯이 끊임없이 ‘테스트’하라고 한 것처럼, 완벽한 문장이 나올 때까지 다듬고 또 다듬는 노력만이 의미심장한 짧은 문장을 낳는 원동력이다.
짧은 문장을 쓰는 일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다
그동안의 경험과 독서와 인간관계로 생긴 생각을 촌철살인의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는 과정이다. 여기서 비로소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진짜 나만의 짧은 문장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겪어본 경험적 지혜, 독서로 습득한 낯선 개념과 색다른 깨우침, 인간관계로 깨우친 인간적 마주침, 그리고 이걸 사유하면서 내면의 깊이로 파고드는 사유의 결과를 촌철살인의 언어로 벼리는 가운데 비로소 대체불가능한 자기다움이 표현된다. 그때 비로소 내가 아니면 누구도 모방하기 어려운 가장 나다운 코나투스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 열린다. 나의 깊은 경험, 단련된 지식, 인간적인 공감, 그리고 날카로운 사유를 세상에 가장 분명하고, 가장 힘 있게, 가장 압축적인 짧은 문장에 담아 언어적으로 ‘존재화’시키려는 불굴의 의지가 코나투스다. 이는 단순히 단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담아 최고의 한 문장으로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는 치열한 노력이 아니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예를 들면 니체의 ‘아모르파티’처럼, 나만의 철학을 단 두 단어로 응축하여 영원히 각인시키려는 안간힘이다.
명사에는 진실이 없다. 진실은 동사가 전해준다
신영복 교수님의 글에는 오랜 기간 감옥에서 보내면서 정련된 단아한 사고의 명증성과 통렬한 아픔이 깨달음의 정수로 담겨있다. 니체는 병마와 싸우면서 몸을 관통하며 지나간 삶의 교훈을 장문의 서사시와 비유, 그리고 음악이 어울려 연주하는 앓음다운 세레나데를 피로 물들인 글에 녹여서 들려준다.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86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 II》에 나오는 말이다. 더 훌륭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더 훌륭한 삶을 살아가면서 삶에서 사색의 샘물을 길어 올려야 한다. 삶이 훌륭하지 않으면 거기서 나오는 글 역시 훌륭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모든 단어에는 자신의 냄새가 있다”(301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단어에는 그 사람의 열정과 혼, 인격과 철학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언어는 삶과 무관하지 않다. 삶의 변화는 언어의 변화로 완성된다. 아무리 격동의 삶을 살았어도 격동의 언어가 부재하거나 부실하면 파란만장한 삶을 담아내는 파란을 일으키는 문장을 건축할 수 없다. 이성복 시인의 글은 정상인 사고방식을 죽비로 내리치듯 깨부수면서 경이로운 생각의 정수들을 새벽녘 마시는 냉수처럼 온몸을 서늘하게 만든다. 신형철 평론가의 글에는 고통으로 느낀 감정의 스펙트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무릎을 치며 깨닫는 언어적 품격이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삶의 무게는 글 쓰는 사람의 경우 단어로 옮겨진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그 사람이 쓴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단어의 무게가 삶의 무게이고 삶의 무게가 곧 단어의 무게다. 글은 곧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자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는 순간 한꺼번에, 여름은 가을로 무너져 내렸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느낀 야생성(wildness)을 계절의 일상성에 비추어 오감으로 감각한 깨달음을 짧은 문장에 담았다. 여름이 무너져 내린 가을은 해거름을 느껴보기도 전에 볕뉘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기도 전에 겨울의 추위가 빨아들여버린다. 겨울로 건너가기 전에 모든 나뭇잎은 마지막 열정을 단풍잎으로 불태운 다음 과감히 땅으로 추락하는 연례행사를 치른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그 순간을 포착했다. 아련한 가을의 빛줄기와 쓸쓸한 햇무리는 여름의 햇발과 햇살에 비해 은은하고 은근하다. “가을은 모든 나뭇잎에 꽃이 피는 제의 봄이다.” 누군가 말했다. “겨울이 목판화(woodcut), 봄은 수채화(watercolor), 여름은 유화(Oil Painting)라면, 가을은 그 모든 것의 모자이크”라고. 사계절이 농축된 가을의 모자이크가 더 아름다운 이유는 칼 베듯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과 혹독한 추위로 살을 에는 겨울이 긴 반면에 두 계절을 연결하는 봄과 가을은 여름과 겨울 사이에서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간다. 지금 이 순간을 붙잡고 만끽하지 않으면 영원히 느낄 수 없는 계절감이다.
어느 계절을 살아가든 4계절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우리들의 습관을 만들어간다. 이른 봄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겨울부터 준비하는 생활습관을 길들여야 하고, 작렬한 폭염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이른 봄부터 작물재배에 근면하고 성실하게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견딜 수 없는 무더위를 벗 삼아 녹음으로 우거진 여름에 고속 성장을 하다 어느 순간부터 성장을 멈추고 내면적 성숙을 기하는 가을과 맞닥뜨린다. 모든 계절이 만나는 일상은 의미의 자궁이다. 삶은 언제 피폐해지고 타성에 젖어가는가. 일상에서 추상명사가 진을 치고 관념이 신념을 대체할 때다. 모든 추상명사는 의미의 감옥이다. “명사에는 진실이 없다. 진실은 동사로 이루어진다. 신이 나 진리를 명사로 가두지 마라.” 이재무의 「동사를 위하여」라는 시의 전문이다. 진실은 부단히 밝혀지는 진행형이다. 오늘까지 밝혀진 진실이 내일은 뒤집힐 수 있다. 진실은 시시각각 움직이며 거듭나기 때문이다. “문장의 진부함을 측정하려면 그 안에 있는 명사를 세어보면 된다. 글 한 편이 너무 명사 위주로 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작가가 독자를 배려하지 않고 옅게 사고한다는 반증이다”(94쪽). 조모란의 《단어 옆에 서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명사는 상태, 정체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은 명사들이 움직이는 동사가 바꾸어나간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또 다른 움직임을 만나 부단히 변신하는 모습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관념적인 명사에는 관능이 죽어 있다
“여름은 동사의 계절/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 얼마 전 광화문 교보문고의 광화문 글판 문구다. 역시 이재무 시인의 시 「나는 여름이 좋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름의 동사가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면 가을은 고개를 “숙이고 익어가며 결실을 맺다 흔들리며 땅에 떨어지다”와 같은 동사로 바뀐다. 삶은 우리가 흔히 쓰는 구체적인 일상의 움직임을 의미하는 동사들이 명사로 대체되면서 일어난다. 특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인 움직임을 지칭하는 동사들이 추상명사의 감옥에 갇히는 순간 역동적인 삶은 적막이 흐르는 정체된 공간으로 변질된다 “‘배우다’가 교육으로, ‘낫는다’가 건강관리로, ‘움직이다’가 교통으로, ‘놀다’가 텔레비전으로 끝없이 바뀌어”(83쪽) 갈 때다.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 모 없게 만드는가》에 나오는 문장이다. 행복한 사람이 매일 어제와 다르게 움직이는 일상에서 만나는 동사를 관능적으로 만끽하지 못하고 카페에 앉아 바깥풍경을 관조할 때 관념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행동하는 만큼 행복해지고 행복해진 만큼 행운도 우리 곁에서 맴돈다. 추상화된 관념이 정제된 명사에는 세상을 다르게 느끼는 관능이 죽어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가장 먼 곳의 대화. 귓바퀴에 맴도는 호흡”(55쪽). 김애란의 《잊기 좋은 이름》에 나오는 속삭임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속삭이다’라는 동사를 사랑이나 애정이나 관심과 같은 추상명사의 관속에 집어넣는 순간 연인들 사이에 속삭이는 작지만 우렁찬 밀어는 관념의 파편으로 공중분해될 것이다.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환경 사이에서 주고받은 상호작용의 동사가 만든 사회적 주고받음의 합작품이다. 사하라 사막 울트라 마라톤에 출전했을 때 내가 느꼈던 사랑은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폭염과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나에게 계속 물을 뿌려 탈진이나 탈수 상태를 막아버려고 안간힘을 쓰는 작은 행동이다. 사랑은 거창한 추상명사 속에 담겨 있지 않고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작은 행동에 스며들어 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건네주다’나 폭염으로 땀에 젖은 몸에 물을 ‘뿌려주다’처럼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 다정함으로 다가가 보살피는 모든 행위동사에 지극 정성이 담긴 사랑이 스며들어 있다. 가까이서 보여주는 작은 행동이 든직하고 구더울 때 타인을 향하는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다가온다.
부사에는 안이함과 동시에 안간힘도 들어있다
이런 동사의 움직임은 부사가 수식하는 모습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너무'라는 부사를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빨리'라는 부사도 조심하세요/'항상'이라는 부사야말로 항상 주의해야 할 물건이지요(…)/동사들이 침묵하는 건 부사들 때문이에요.” 나희덕의 「하느님은 부사(副詞)를 좋아하신다」에 나오는 문장이다. 동사의 운명은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에 달려 있다. 나희덕 시인도 이런 맥락에서 동사가 자기 본분을 다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자신을 수식하는 부사를 잘 못 만나면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사에 결박당한다고 주장한다. 부사는 “설명보다 충동에 가깝고 힘이 세지만 섬세하지 못하다. 부사는 동사처럼 활기차지도 명사처럼 명료하지도 않다. 그것은 실천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만날 큰소리만 치고 툭하면 집을 나가는 막내 삼촌과 닮았다. 부사는 과장한다. 부사는 무능하다. (…) 부사 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 버리는 안이함과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88쪽). 김애란의 《잊기 좋은 여름》에 나오는 문장이다. 김애라 작가에 따르면 부사는 안이함과 안간힘이라는 두 가지 양극단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말이다. 부사는 실천력도 없으면 큰 소리만 치고 동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안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사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동사의 움직임이 지향하는 방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달리다’보다 숨 가쁘게 달린다라고 부사가 수식해 주면 달리는 사람이 지금 엄청 힘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안간힘을 써가면서 달리고 있다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웃다’라는 동사도 언제 어디서 누구 덕분에 웃는지, 웃음의 원인 제공자가 무엇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웃음이 상상된다. 누군가 ‘서글프게 웃는다’라고 하면 그냥 뭔가 좋은 일이 있어서 박장대소하는 큰 웃음이 아니라 웃음 뒤의 슬픔이 전해지는 이면의 모습이나 뭔가 슬픈 뉘앙스를 풍기는 웃음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부사는 동사가 나타내는 행위의 방식, 정도, 시간, 장소, 목적 등을 아주 세밀하게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동사가 단순히 ‘무엇을 한다’를 넘어 ‘어떻게’, ‘얼마나’, ‘언제’, ‘어디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줌으로써, 그 행동이 가진 깊이나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이 바로 부사다. 동사의 행위가 어떤 ‘뉘앙스’를 풍길지는 부사가 제한하기도 하지만 한껏 드높여 위상을 높여주기도 한다. 부사는 동사에게 구체성과 뉘앙스를 더해줘서 단순한 동사를 ‘살아있는’ 표현으로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사로잡으면 서로 잡을 수 있다”라는 문장에서 부사와 동사의 맞물리는 어울림을 보자. ‘잡다’라는 동사 앞에 ‘사로’가 붙을 경우와 ‘서로’라는 부사가 붙으면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부사는 낯선 동사를 잉태한다
굽은 몸을 뒤척이며 밤잠을 설치다 겨우 일으킨 동사가 물음표라는 음표 몇 개 데리고 오늘도 잃어버린 세계로 출근한다. 불협화음 속에 잠자는 화음을 만나고 물구나무서서 나무에게 안부를 전한다. 밤이 저녁을 물들이는 줄도 모르고 나무는 저무는 시간을 붙잡는다. 찰나적 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기 전 동사가 품은 물음표는 화살보다 빠르게 달려가 즉흥적 행위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느낌표를 낳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형용사가 입히는 옷을 거부, 태어난 이름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명사의 사투가 동사의 도움을 받아 다림질을 반복하며 자기다움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대답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線)을 넘어 뜻밖의 선(善)을 실현, 최선(最善)을 다하려는 물음표의 의지와 열정, 좌우로 갈라진 노선(路線)에서 느낌표를 찾지 못하고 오늘도 최전선에서 위험을 무릅쓰며 불안감으로 허기를 채우고 허공에 몸을 던진다. 본래 선은 없었다. “예술은 선을 넘는 것이다. 태초의 세상에 선은 없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스리기 위해 법, 규율이란 선을 만들어 인간들을 가두었다. 넘지 마시오! 하지 마시오! 예술은 그 선을 뛰어넘어 태초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행위다.” 영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에 나오는 명대사다. 선을 넘어야 시선이 바뀌고 시야가 넓어지며 시각이 깊어지고 시점이 독특해진다.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견뎠던 그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권대웅 시인의 「삶을 문득이라고 불렀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두커니, 멍하니, 물끄러미, 문득, 와락이라는 네 개의 부사가 생의 한 단면을 진한 여운과 감동을 주면서 묘사하고 있다. 부사가 과장하고 무능하기도 하지만 부사 자체만으로도 깊은 생각을 몰고 와서 오히려 낯선 동사를 잉태한다. ‘우두커니’ 뒤에 어떤 동사가 오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움직임이 생긴다. ‘우두커니’라는 말은 어딘가 텅 빈 공간에 혼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모든 소리와 생각이 잠잠해지고, 몸은 가만히 있지만 마음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가만히 떠오르는, 그런 먹먹하고 쓸쓸한 고요함이 느껴진다. “창밖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아득한 그리움이 마음을 스쳤다.” 반면 ‘멍하니’는 조금 더 무심하고, 현실과 살짝 동떨어진 느낌이다.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생각의 줄을 놓아버린 듯 정지된 화면 같은 순간이다. 조금은 지쳐 있거나, 마음속에 공허함이 깔려 있는 상태다. “긴 밤을 새운 나는 커피 잔을 든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때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하게 흐려지는 시간이다.
‘물끄러미’라는 표현은 앞에 있는 어떤 것을 조용하고 깊게 바라볼 때 잘 어울린다. 궁금함, 그리움, 애틋함, 신기함 같은 감정이 시선에 담겨 스며드는 느낌이랄까.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고 바라볼 때 자주 쓰인다. “오래된 앨범 속 어린 시절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희미해진 기억들이 다시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문득’은 불쑥 찾아오는 선물 같은 단어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잊고 있던 기억이 순간적으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갈 때, 혹은 어떤 감정이 갑자기 올라올 때 쓰는 표현이다. ‘앗!’ 하는 놀라움이 함께 묻어난다. “걷고 있던 길 위에서 문득, 어릴 적에 즐겨 부르던 노랫가락이 귓가를 스쳤다. 아, 이 노래 정말 오랜만이야!” 마지막으로 ‘와락’은 감정이나 행동이 더는 참지 못하고 한순간에 ‘툭’ 하고 튀어나오는 느낌이 담긴 말이다. 특히 강렬한 기쁨, 슬픔, 화 같은 감정이 치밀 때나, 갑작스러운 포옹 등 물리적 행동이 나올 때 자주 쓰인다. 힘과 에너지가 한순간에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반가운 친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와락 껴안았다.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짧은 문장은 안간힘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나 ‘그러나’보다 일상의 중간에 ‘그런데’라는 접속사가 붙어 있을 때 명사는 물론이고 동사는 반전을 경험한다. 반전을 몸소 겪어본 동사는 앞뒤 부사도 더 자신을 강렬하게 수식해 달라는 주문을 건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사는 ‘와락’ 갑자기 끌어안는다. 당황과 황당 사이를 오고 가다 찰나의 경이로움을 몸소 겪어본다. “논리로 설명 가능한 일은 대부분 ‘그래서’와 ‘그런 뒤’ 다음에 일어났다. 반면 흥미를 끄는 쪽은 ‘그런데’나 ‘한편’이었다(159쪽). 김애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뒤에 따라오는 동사는 평범해도 평범하지 않고, ‘한편’ 뒤에 따라오는 동사는 이전과 다른 반전을 꿈꾸며 갑자기 다른 세상을 꿈꾸며 비상한다. “그런데 그러므로 그리고 왜냐하면/그러나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재무 시인의 「저녁 기차를 탔다」에 등장에 구절이다. ‘그런데’ 반전을 꿈꾸다 ‘그러므로’ 논리적 정당함을 찾아 목소리를 높이다 ‘왜냐하면’을 만나 그렇게 살아가는 합리적 변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대와는 정반대로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나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짧은 문장에 들어가는 접속사의 반전 의도에 따라 의미의 강도도 달라진다.
옥상의 난간에 기대어 물끄러미 새벽을 바라보다 맞이한 낱말 몇 개가 이슬을 맞으며 슬기로운 지혜의 정원에 불현듯 깨달음 몇 마디 심어 놓는다. 한순간도 겪어보지 못한 애달픈 서러움에 한 눈 팔지 않고 내 눈동자에 자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을 건져보려는 배고픈 잠언 한 마디가 문득 생각해 낸다. 유령처럼 거처를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던 방황 한 가닥, 방향을 가리키던 손가락 믿고 깨우침을 몸에 아로새겼지만 가르침으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해거름’이 ‘거름’이 되지 못하는 까닭, ‘허름’한 주막에 앉아 뒤늦게 깨닫고 느닷없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의 발자취에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바람의 흔적에 미지근한 위로를 받는다. 백사장이 토해내는 사연 출력의 소리, 파도가 악상에 맞게 작곡하고 허공의 거미줄에 잡힌 강물들의 속삭임, 복사뼈에 뼈저림으로 아로새긴다. 말없는 의미가 고개 들어 변명하고 시끄러운 여백이 속삭이며 고백하는 괴로운 아우성을 한 군데 모아놓고 한가한 시냇물의 사연을 심장이 우두커니 받아 적는다. 비바람에 놀란 지각과 설명을 거부하는 감각의 텃밭, 오래된 문장의 가지를 자르고 메마른 숨결이 부른 뭉툭한 기억에 기대, 오늘도 애쓰며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안간힘을 원료로 사용하고 애를 쓰면서 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겨우 한 두 줄 문장이 백지위에 얼룩을 만들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짧은 문장은 뇌와 혈관을 파고들다 핏줄의 뿌리까지 도달한다
허공에 내미는 손, 바람결에 바람맞고 메아리는 진리를 훔쳐 달아나고 소리 없는 아우성만 침묵으로 함성을 읊조린다. 오역으로 얼룩진 공백이 기억의 심연에 가라앉은 외로운 독백과 고백들을 흐르는 강물에 맑게 씻어 말린다. 발바닥에 맺힌 땅방울의 고뇌, 바닥에 새겨진 뚝살의 얼룩이 골목의 뒤안길에서 서성이다 낯말 몇 개와 조우한다. 버려진 문장 속에 외로운 주장 한 마디, 회한과 회고의 길목에서 방황하다 내일을 전망할 겨를도 없이 비를 품은 구름마저 시치미를 뗀다. 섬김과 섬광 사이에서 지금에 비추어 지나간 날과 숨 가쁘게 다가오는 내일을 내다보며 격앙된 일리(一理) 하나가 흐르는 시간을 하염없이 붙잡고 하소연한다. 앞다퉈 떠나려는 심장에 박힌 의미의 궤적을 붙잡고 언젠가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올 깊은 밤이 잉태한 뜻밖의 새벽을 말없이 기다린다. 비 오는 늦은 어느 밤, 파고들다 생긴 문장의 상처 부위, 벼리고 벼리다 부어오른 언어의 가장자리를 품고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얇은 주장 하나가 머뭇거리고 서성거리다 기다림의 종착역으로 더디고 느리게 나아가고 있다.
‘백지’가 ‘백지수표’를 남긴다. 백지수표 들고 나타나 백지가 유혹한다. 무엇이든 쓰면 쓰임이 달라질 거라고. 우주보다 더 넓은 공간, 하얀 종이 위에서 무수히 생각하다 절망하고 끄적거리다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 느닷없이 다가온 밤이 적막,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백지는 애쓰다 남긴 한 줄을 이길 수 없다. 천신만고 끝에 한 줄을 얼룩으로 남겼지만 깨진 무릎이 하소연만 늘어놓는다. 여기를 떠나면 종이 감옥을 탈출할 수 있지만 생각의 교도소에서 아득한 출구를 찾다가 반짝이는 감탄사의 천국으로 빠져든다. 깊은 시름 어루만져 생긴 고뇌의 깊이가 무한한 가능성의 텃밭에서 말없는 아우성을 치다 절망의 눈물로 얼룩을 무늬로 그린다. 그리고 깊은 한숨 뒤에 남은 한 많은 세상의 뒤안길, 앞으로 길을 내는 사람이 남긴 한 가지 안간힘, 지나가던 모든 힘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한 움큼의 말을 품고 꼭 쥐고 품고 걸었다. 주문처럼 되뇌었다. 약처럼 삼키고 발랐으며 사탕처럼 빨았다”(231쪽). 메이의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에 나오는 문장이다. 안간힘으로 밀고 나가다 만난 한 문장, 누군가에게는 주문이 되고 힘들 때 힘들어가게 만드는 소중한 약처럼 작용한다. “나는 아름다운 문장 하나를 입안에 쏙 집어넣고 과일 맛 사탕인 양 빤다. 한 잔의 향기 나는 독주인양 홀짝댄다. 그 관념이 내 안에서 알코올처럼 용해되어 뇌와 심장으로 퍼지고 혈관으로 흘러들어 가 모든 핏줄의 뿌리에 도착할 때까지”(10쪽).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나오는 말이다. 뇌와 심장은 물론 혈관을 타고 흐르는 짧은 문장은 한 문장으로 족하다.
짧은 문장은 누군가의 고통을 감내하는 인내심이 들어있다
알베르 카뮈는 《안과 겉》 서문에서 “모든 예술가를 위협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위험, 즉 원한과 만족”이라고 지적했다. 원한은 주로 불만족의 원인이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내가 잘 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 사회 구조나 시스템 또는 다른 환경이나 사람 때문에 원한이 생겼기 때문에 내가 극복하려고 노력해서 뭔가를 만회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에게 해주지 않아서 원한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내가 노력하지 않고 그들의 대가나 보상을 기다린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데 왜 나에게 이렇게 푸대접하는 것인지를 적개심을 품고 분노를 터뜨린다. 이에 비해 만족은 자기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서 세상이 나를 기대 이상으로 평가하고 대접해 준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즉 원한은 문제의 원인이 밖에 있어서 밖으로 시기심의 화살을 날리지만 만족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자화자찬하며 세상이 자신을 너무 잘 알아주고 있다고 내면으로 행하는 자세와 태도를 취할 때 생긴다. 짧은 문장은 원한과 만족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연민과 동정을 넘어 가슴으로 타인의 아픔을 사랑하는 측은지심, 즉 공감과 긍휼의 정신으로 세상을 보살피고 보듬으려는 애틋한 사랑과 존중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짧은 문장을 탄생시킨다.
“문장을 잘 쓰는 일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 다른 사람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잘 만들어진 문장에는 이와 같은 타인을 향한 묵묵한 배려가 스며 있다. 마음을 쓰는 것이다”(161쪽). 조모란의 《단어 옆에 서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어느 순간 짧은 문장이 운 좋게 나왔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마지막 탈고의 시점까지 밀고 나가면서 꾸준히 언어를 벼리고 벼린다. 꾸준한 묵묵함, 늘 아직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겸손으로 세상의 낮은 곳, 어둠으로 가려진 배경으로 내려가 밑바닥에서 들리는 아우성에 귀를 기울일 때 세상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짧은 문장이 나오는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27쪽). 알베르 카뮈의 《안과 겉》에 나오는 말이다. 절망적인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절망적 상황에 처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이 담긴 짧은 문장이 비로소 세상으로 탄생되는 것이다. 짧은 문장은 처절한 절망 경험으로 서늘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작가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면서 독자의 공감대역으로 파고들어 가면서 생긴 앎의 상처다. 비로 내가 경험한 깨달음의 흔적으로 모두 무늬로 번역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하거나 부실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안간힘을 다해 언어와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저자의 사투 덕분에 그나마 짧은 문장의 위력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확신을 부패한다. 질문은 방부제다
“통증이 실제 어떤지를 묘사할 때 말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쓸 모가 있는가? 언어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잠잠해진 뒤에야 찾아온다. 말은 오직 기억에만 의지하며, 무력하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다”(375쪽). 알퐁소 도데의 《알퐁소 도데 작품선》에 나오는 말이다. 17살에 매독에 걸려 1897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 알퐁소 도데는 신경매독으로 번져, 평생을 척수매독 환자로 살아가면서 극심한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와 사투를 벌인 소설가다. 가르침은 곧 고통이며 고통은 곧 가르침이라고 썼던 도데는 펜이 쓰는 것과 마음이 품고 있는 고통이 적나라함 사이의 불균형은 쓰디쓰다고 표현한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한계 지점까지 언어라는 무기로 밀고 들어가 “쥐 떼가 날카로운 이빨로 발가락을 갉아먹는 기분”(379쪽)이라고 할 정도로 《알퐁소 도데 작품선》에 실린 ‘라 둘루(a doulou)’(프로방스어로 고통이나 통증을 뜻함)에 매일같이 계속되는 고문 같은 고통의 실상을 죽기 3년 전까지 낱낱이 파혜쳤다. 알퐁소 도데는 더 이상 고통으로부터 베울 것이 없음을 판단, 메모를 멈추고 3년을 버티다 세상과 영원히 이별하였다. 알퐁소 도데는 언어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좌절감을 맛보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언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겪는 고통의 감각적 실체를 가능하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언어를 찾아 사투를 벌이며 벼리고 벼리는 언어적 담금질을 마지막까지 분투노력한 소설가가 바로 알퐁소 도데다.
짧은 문장은 평범한 일상의 반복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고 모든 순간에 담긴 저마다의 의미 있음을 포착,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왜 거기서 그런 의미를 뿜어내고 있는지 멈춰 서서 관찰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호기심을 가지려면 이문재 시인의 “매번 처음이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시인은 사물의 이면을 볼 줄 아는 견자이며, 이 세계의 온갖 사물에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명명자입니다. 또한,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기꾼이며 ‘역설’과 ‘반어’를 종횡무진으로 구사하는 희대의 범죄자입니다”(238쪽). 이승하의 좋은 시가 지닌 덕목들에 나오는 글이다. 짧은 문장을 쓰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늘 만나는 익숙한 일상이지만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호기심을 갖고 겉으로 보이는 피상보다 사물이나 현상의 이면에서 움직이는 구조적 힘을 통찰하고 새로운 언어로 이름을 지어주는 작명가로서의 정신과 기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늘 만나는 일상의 당연함에도 물음표를 던져 내가 믿고 있는 신념도 나도 모르게 통념으로 바뀌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확신도 부패한다. 부패를 방지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질문이다. 질문은 방부제다.
지식이 관념의 처자라면 지각은 감각의 자손이다
정병근 시인이 《눈과 도끼》라는 시집에서 “내 눈이 닿는 곳마다 폐허가 도사리고 있다”는 말에 이어 “나는 눈이라는 미지의 도끼를 가졌다”라고 주장한다. 기정사실을 인정하면서 기존 시선으로 규정당하는 관점을 거부하고 통념의 덫에서 빠져나오려는 안간힘으로 애쓰기를 거듭할 때 한 두 줄의 문장이 써진다. 내 눈이 닿는 곳마다 고정관념과 타성에 젖은 시선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규정하는 순간 그곳은 새로움이 싹틀 수 없는 폐허가 된다. 눈이 미지의 도끼로 작용해야 하는 까닭은 아직 모르는 세계를 과감하게 깨부수는 도끼처럼 눈은 새로운 시선으로 사선을 넘나들어야 한다.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머무는 순간 기정사실을 인정하거나 고정관념이나 통념이 개입되는 순간 눈은 미지의 도끼로 작용하지 않고 기존 시각에 안주하게 만들 수 있다. 기지(旣知)로 미지(未知)를 판단하고 평가하기보다 비록 무지(無知) 상태지만 무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다른 관점과 시각에서 시선을 재무장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관념의 망토에 싸인 세계를 끄집어내 감각의 촉수 앞에 내민다. 감각의 빛 아래에서 사물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지식이 관념의 처자라면 지각은 감각의 자손이다(223쪽). 오민석의 《이 황량한 날의 글 쓰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관념적 지식으로 채색된 ‘시선(視線)’으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선(死線)’을 넘을 수 없다. “예술은 선을 넘는 것이다. 태초의 세상에 선은 없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스리기 위해 법, 규율이란 선을 만들어 인간들을 가두었다. 넘지 마시오! 하지 마시오! 예술은 그 선을 뛰어넘어 태초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행위다.” 영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 중에 나오는 대사다. 짧은 문장은 ‘시선’이 ‘사선’을 넘을 때 건축된다. 사선을 넘으려는 시선을 틀 안에 가두는 주범은 관념적 지식으로 무장한, 신념을 가장한 통념이다. 정상에 간 사람은 정상이 아니듯, 우리에게 정문일침의 깨달음을 주는 문장은 모두 틀밖에서 뜻밖의 시선으로 사선을 넘나들며 깨우친 감각적 깨우침이다. 지각이 안 된다고 반대할 때 통념으로 무장된 경계선을 넘으려는 야망이나 욕망은 감각이다.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짧은 문장이 탄생되려면 무뎌질 대로 무뎌져 둔화된 관성의 늪에서 벗어나 기존 용기(容器)도 깨뜨리는 용기(勇氣) 있는 결단과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선을 넘어서는 도전과 경계를 넘나드는 결단이 깊은 의미를 품고 있는 짧은 문장을 낳는다.
짧은 문장은 불타는 대장간이다
“글쓰기는 주체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타는 대장간이다”(65). 오민석의 《이 황량한 날의 글 쓰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짧은 문장 쓰기는 주체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불타는 대장간이다. 아직도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어휘 꾸러미 속에서 이런저런 단어를 올려놓고 고심을 거듭한다.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삶의 깊이와 넓이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단련하며 재단해본다. 불현 듯 한 단어가 가고 싶은 위치에 배치해주면 뒤이어 그 단어 옆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싶은 부사나 형용사가 동사를 몰고와 한 문장을 완성한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듯이 그 문장을 통째로 모루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리며 언어를 벼리고 벼리며 비로소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각보다 감각이 먼저 꿈틀거리며 한 문장이 심장에 꽂힌다. 문학은 “공통적인 것을 새로이 표현하는 것”(69쪽)처럼 짧은 문장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의미를 던져주었지만 그걸 바라보는 시선이 사선을 넘으면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낯선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통찰을 준다. 문학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과 소통하는 데 감성은 이성에 비해 지구력이 없다. “쉽게 지치는 감성을 깨울 수 있는 무기는 ‘새로움’ 밖에 없다. 그리하여 문학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자리에서 또 다른 새로움을 찾는 언어이다”(75쪽). 짧은 문장도 마찬가지다. 이미 포화된 의미의 세계에 낯선 욕망을 자극, 색다른 시선으로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미지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의미의 텃밭을 가꾸는 일이, 바로 짧은 문장을 부단히 가꾸려는 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