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4일부터 4월 30일까지의 일주일.
아아, 갔습니다, 120년 만의 미친 무더위가 갔습니다. 타이베이는 대만섬의 가장 북쪽이지만 분지 지형이라서 가장 더운 지역이라고 합니다. 몸이 녹아내린다는 걸 이 두 달 내내 체험했습니다. 노트북 키보드에 손을 올릴 수 없을 정도의 더위도 이제 끝물인지 33도의 기온에도 선선함을 느낍니다.
아래 의식의 흐름들은 써 놓은 지 오래됐는데 식사 기록까지 적는 데에 두 달 거린 것 같네요.
용허또우장은 웬만한 동네마다 다 있는 체인점 같다. 소롱포를 주문했는데 이렇게 나오네. 간장은 없고 소스를 뿌려 먹는다. 하... 정말 먹으면서도 내는 이것을 왜 먹고 있는가란 생각뿐이었다. 맛은 기대하지 않았으나 저 달고 짠 소스를 왜 뿌린 것인가.
슬슬 질리기 시작할 때 즈음.
집 근처에서 요우몐을 파는 가게가 있어 들어가 봤다. 요유몐은 처음 먹어봤다. 큰 특징이 없어 당황했지만 35원이니까~라며 먹었다.
송산역까지 걸어가면 역 안에 프랜차이즈 음식점들이 꽤 입점해있다. 근처 라오허지에 야시장이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주로 일본 음식점들이 입점해있는 것 같다. 카레 전문점인 코코이찌방야 CoCo壱番屋도 있고. 지금 생각해보면 180원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빈곤했던 이 당시엔 180원을 한국 돈으로 계산하고 그럼에도 밥을 이 만큼밖에 안 주다니! 라며 분노했다. 아직 벌어먹고 살기엔 숨 막히는 타이베이의 물가를 잘 몰랐고 유로를 환전해서 쓰던 시절이라 잘 몰랐다.
손님이 기증해주신 칭따오 맥주와 함께 옌쑤지. 캔맥주의 경우 작은 한 캔을 다 마시지 못하는지라 저 큰 캔은 내겐 버거웠다.
원래는 타이베이 역 근처의 유명한 우육면 맛집인 유산동 우육면에 갈 예정이었지만 비가 오는데 대기줄이 좀 있길래 맞은편의 '무사시武藏'라는 일식 요릿집으로 들어가 봤다. 입구부터 내부까지 첫눈에는 상당히 일본식, 약간의 쇼와 분위기가 나는 일본 음식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하나 잘 보면 쇼와의 옷을 반은 일본, 반은 대만스러운 가게였다. 내가 갔을 때의 손님들의 연령대는 다소 높았고 일본인 직장인들이 주변에 많긴 했다. 메뉴를 보니 다소 높은 가격의 요리들, 고심 끝에 눈에 보이는 생선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연어 구이 정식으로 주문했다. 처음엔 전채로 이렇게 찻잔에 챠왕무시茶碗蒸し가 나온다.
처음 챠왕무시를 먹은 건 고3 때 수능 끝나고 일본 대학에 합격한 친구를 통해 4박 5일의 한일 학생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다. 아직도 날짜를 기억한다, 첫 해외 방문이었고 2002년 12월 25일이었다. 마침 12월 20일인가 21일인가에 가군으로 지원했던 대학의 1차 발표가 있었고 나는 전철 안에서 ARS로 대학 합격 소식을 확인하여 이미 대학 입시는 완전히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아주 홀가분하고 기대에 가득 찬 상태였다. 크리스마스였고 아침 비행기였고 휴일이라 아빠가 함께 가는 친구 네(친구 네서 만나 친구 아버지가 공항까지 데려다 주심)까지 차로 데려다 주기로 했던 날이다. 이날은 아침 7시 반 즈음 출발 전에 가볍게 계란 후라이를 먹었으나 갑자기 위가 찢어질 것만 같이 아팠다. 살면서 배가 안 아팠던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적게 먹었는데도 아픈 것도, 이런 통증도 모두 처음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땡겨오는 배를 잡으며 겨우 이동했다. 이후 일정을 소화하면서 느낀 것은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그나마 속이 괜찮아지더라. 5일 동안 처음 해외에 가서 먹은 게 음료수, 수프, 매일 홈스테이 집에서 아침 식사로 나오던 약간의 과일과 샐러드, 그리고 챠왕무시였다.
이때 일본의 고등학생들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나를 담당했던 학생은 나보다 한 학년 어린 남학생으로 동경이 아닌 치바현 나리타시에 살던 친구였다. 역에서 집까지 거리가 있어 아버지가 매번 출근길에 데려다주셨고 동경 시내의 집합 장소까지 가는 데의 차표를 매번 구입해주셨다. 일반 가정 주택이었는데 난방도 없는 다다미방에서 벌벌 떨면서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겨우 겨우 뛰어서 전철을 탔고 둘 다 동경에 도착할 때까지 전철 좌석에 앉아 시체처럼 잠들곤 했다. 그렇게 집합 장소에 도착하는 시간은 매번 30분 정도 이른 시간. 일본어는 간단한 문장 외에는 아예 못 하던 시절이라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다. 그리고 지각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하는 법. 모두가 모이는 시간까지 우리는 보통 총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겨울에 밖에서 졸음과 침묵에 저항하며. 아무튼.
마지막 날 저녁식사를 부모님께서 나를 꽤 큰 일식집에 데려가 주셨다. 우리 집은 외식도 드물었던 집이라 일식이란 걸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코스 요리였는지 처음에 전채로 챠왕무시가 나왔다. 담당 학생이 내게 'Cha-Wan-Mushi'라면서 발음 하나하나를 알려줘서 챠왕무시는 기억한다. 나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챠왕무시 하나 먹고 배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었기 때문이다. 4박 5일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내 배는 점점 악화되었고 한 8일 정도를 밖에 나가지도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집에서 수액 맞으며 죽을 만큼 토하다가(먹은 게 없어 나오는 것도 없다) 결국 3주 동안 입원하게 된다. 4박 5일의 첫 해외 방문 중 유일하게 '식사'로 먹었던 게 챠왕무시.. 라니ㅠㅠ 아무튼 이날 무사시에서 전채로 챠왕무시가 나왔을 때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데 지금 이렇게 또 기억의 한 페이지가 확 치고 들어온다.
이곳에서 대만을 느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저 또우깐이라는 대만의 반찬과 일본의 맛이 아닌 된장국. 연어구이는 내겐 너무 짰다. 250원이라는 싸지 않은 가격이 비싸다고 느껴지는 식사였다.
햄버거(대만식) 패티가 들어간 딴삥.
예전에 매니저님께서 소개해주신 중산 역과 메인 역 사이의 케이크점.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집이었다. 케이크 크기는 무척 작지만 그만큼 가격이 싸 괜히 단 게 땡길 때 가볍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매장에서 먹을 땐 최소 50원 이상 주문인데(케이크 조각 하나가 25~35원인가 그랬던 것 같다) 이날 나는 혼자 140원 이상 주문했다. 티라미스도 괜찮았지만 저 크림 볼! 이 아주 손이 가요 손이 가. 다섯 알 들어있고 65원이란 점이 다소 가격이 세게 느껴지긴 하지만 이후에 저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저 크림 볼을 구입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과 싸우게 된다. 케이크도 종류가 꽤 다양하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에서 가깝지 않고 두 개의 역 사이에 있는지라 굳이 찾아가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타이베이 시내에는 이곳과 커지따로 역科技大樓站에 총 둘, 근처 신베이 시는 타오위엔과 반챠오에도 하나씩 있다. 커지따로 역科技大樓站 지점이 그나마 역에서 덜 걷는 것 같다.
소울푸드는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한다.
지롱 하면 먀오커우 야시장 아니겠는가. 물론 다른 야시장들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영업을 시작해 점심시간에도 무난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일단 예전에 먹었던 곳에 가서 수제비를 먹었다. 길가에 위치한 자리로 안내를 받았고 후딱 먹고 나왔다. 저 미끄덩미끄덩한 식감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수제비만으로는 배가 차지 않아 뭔가 좀 더 먹어보기로 했다. 시장 입구에서 '요우판'을 파는 집을 발견, 잡곡밥과 약식(약밥) 중간쯤 되는 밥을 산처럼 쌓아놓고 파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역시 아무 데나 가서 앉아 요우판 1인분을 주문했다.
맛은 생김새에서 예상했던 잡곡밥+약식+그러나 달지 않고 약간 간장 베이스의 맛으로 나쁘지 않아. 나야 처음 먹어보는 맛이니 현지인들 입맛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커플들도 아이들도 노인들도 가게에서 먹거나 테이크아웃으로 싸가는 것을 보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먀오커우 시장은 다른 야시장들과 다르게 가게 간판에 중국어, 일본어 상호명과 함께 크게 가게 번호가 쓰여있다. 이곳은 10호!
석문에서 단수이로 오는 길은 너무나도 고달팠다. 버스로 30~40분이면 도착한다더니 도로 정체로 80분 정도 걸렸다. 하루에 수 십 km를 대중교통을 이용해 움직이고 있다 보니 보통 지친 게 아니다. 초반 30~40분은 노을이라도 보면서 무료함을 달랬지만 이것도 이내 질려 버스 안에서 숙면 기술을 뽐냈다. 일단 배가 고프니 뭐가 됐든 좀 먹어야겠다 싶어 일단 버스 안에서 골라놓은 집으로 향했다. 일본 웹에서 찾아낸 단수이의 맛집으로 대기 줄이 좀 있다는 후기를 보긴 했으나 돌격. 그러나 막상 도착하니 대기가 꽤 길고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쓰러질 것만 같아 이 집은 포기하고 단수이 라오지에를 돌아다녔다. 단수이에 왔으니 일반 여행객처럼 대왕 오징어를 먹어보기로 했다.
단수이 강변에 쭈욱 늘어선 가게들 중에 적당한 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가게 앞에는 시식 가판대가 있었고 나쁘지 않아 하나 주문했다. 가게 앞에는 각종 소스를 직접 뿌려 맛을 낼 수 있도록 셀프 조리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징어를 위의 사진 뒤쪽에 작게 보이는 은색 접시에 담아 여러 가지 조미 가루를 뿌려 잘 섞은 후에 다시 내 컵에 담아 먹는 시스템이다. 와사비랑 여러 가지 뿌렸던 것 같고 내 사랑 마요네즈 역시 잊지 않고 뿌려주었다.
예전에 갔던 곳에 다시 갔다.(https://brunch.co.kr/@ryuj/85 참고)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전보다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아 남아 있는 과일 중에서 자두를 선택했다.
오징어와 자두를 들고 단수이 강변의 벤치에 앉았다. 밤 8시가 넘은 깜깜한 시간에 가로등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벤치에서 휴대폰 빛에 의지해 벌레에 물리지 않도록 다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강바람을 맞으며 먹었다. 단수이는 매번 늦은 시간에 잠깐 스쳐 지나가듯 오는 것 같은데 언제 한 번 맑은 날 낮에 와서 재밌게 놀다 가고 싶다.
처음에 방문했을 때엔 휴일이라 헛걸음이었고 이번엔 제대로 영업일을 확인했다. 문 여는 순간부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라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필통에서 펜을 꺼내는 소리조차도 신경 쓰일 정도로 조용했고, 조용해서 그런 건지 공부하겠다고 책을 펴서인지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는 것은 고역이었다.
不好意思。一杯美式咖啡。
美式咖啡。熱的嗎?
熱的。
입문용 교과서의 짧은 다이얼로그 정도의 수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가능하게 되었다. 독학이라 성조 무시와 이기적인 발음이 큰 약점이지만(이래서 독학하지 말라고 했는데...ㅠ_ㅜ) 통할 때마다 약간의 신기함을 느낀다.
커피 투어를 하기 위해 지역을 타이난에서 타이베이로 바꾼 만큼, 대만에 온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커피값 법니다.
그나저나 시청화어 1권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가.
1)
그동안 대만은 수교국이 아니라서(그래서 양국 모두 대사관이 아니라 "대표부") 투표소 설치가 불가능했던 나라였지만, 교민들의 지속된 요청으로 올해 3월에 법안이 통과되어 처음으로 투표소가 설치되었다. 나는 조금 이른 4월 27일 투표를 완료했다. 세상 참 좋아졌다, 해외에 사는 사람들도 투표에 껴준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한국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바라는 그것과는 다소 다르겠지만 내 표니까 내가 원하는 세상을 위해, 내가 꿈꾸는 한국을 위해 표를 던지기로 했다. 각 후보들을 사사분면으로 나누어 배치했을 때 나의 좌표는 누구의 사분면에 위치해있는가로 결정했다.
세상이 변하려면 변하고자 하는 이상에 좌표를 찍어야 한다. 그리고 그 좌표는 정확한 방향으로 최대한 멀리 찍혀 있어야 한다. 내 한 표가 비록 당선될 가능성은 낮더라도 좌표를 최대한 멀리 찍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한 표가 되기를 바라며 투표했다.
대선을 앞두고 여전히 토론회가 열린다. 매일 나의 관전 포인트는 방송 중은 모 후보가 오늘은 무슨 헛소리를 할까이고, 방송 후에는 그 후보의 회사의 주가 변동이다. 지지하는 분들도 많다는 건 알지만 내 눈에는 몇 년째 실체 없이 '이미지'로만 자신을 팔고 있다는 점이 수인번호 503과 다를 것 없는 것을 넘어 똑같은 인물로 보인다. 언제 어떤 토론회를 보든 환장스러운 아무 말 대잔치다. 대선 토론에서 물어뜯기 징징대기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산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징징대는 모 후보만 없어도 반은 성공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2)
개인적으로 이번 달은 시작부터 심적으로 힘겨운 한 달이었다. 긴 기다림은 나를 지치게 했고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선 현재 처해있는 환경을 바꾸어야 했고, 이젠 안 하겠다던 일도 먹고살기 위해 다시 시작해야 했다. 꿈같은 시간은 역시나 꿈이었다고, 현실로 돌아오니 냉랭함만이 내 주변에 남아있다.
여섯 달 동안 머리가 많이 자라 염색을 했다. 잘 되긴 했지만 원했던 색과는 다소 달라 다음엔 좀 더 강하게 해볼까 한다.
3)
타이베이 북쪽에 위치한 석문石門이라는 곳에 다녀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총 100 킬로 미터의 긴 여행이라 꽤 많이 지쳤다. 되게 오래된 일본의 시골 동네 분위기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대만은 청량한 여름의 나라라는 걸 새삼 느꼈다.
갑자기 견공 한 분께서 내 앞에 앉는다. 아이폰으로 한 장 찍었더니 이번엔 뒷모습이 보이게 자세를 바꿔주신다. 카메라로 한 장 찍었더니 '다 찍었냐'라는 듯 그대로 가셨다. 다만 담수이로 돌아오는 길이 차가 막혀 힘들었다. 30~40분 정도 걸린다더니 30+40분보다도 많은 약 80분 정도가 걸렸다. 버스를 이용한 장시간 이동이 힘들었는지 멀미가 나서 도중에 내리고 싶었다. 북쪽 해안가 도로는 바다와 석양의 풍경이 좋아 카페, 레스토랑들도 꽤 있었다. 이럴 때 운전면허가 없는 게 참 아쉽다.
5)
해외에 나와있는 일본인들의 공통적인 말버릇 중 하나는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日本ではあり得ない"이라고 말하는 것. 그 뒤에는 늘 "여기 사람들 너무 ~하지 않아? こっちの人ってさー〜過ぎない?過ぎるよね?"라는 말이 뒤따른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이가 없어 (속으로가 아닌)대놓고 웃고 (그냥 넘기지 못하고)한 마디씩 한다.
일본 생활을 시작하던 초반에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속 터지는 게 한 둘이 아니었고, 모든 것에 절차가 있어 모든 것이 느린 그 나라를 이해하려고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곳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나라도 아니고, 문화와 사회는 상대적인 것이라서 그럴 때마다 한 마디씩 하게 된다. "여긴 일본이 아닌데요. ここは日本ではありません。" 혹은 "나도 일본 생활 막 시작했을 때엔 처음엔 나도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뿐이라 놀랐는데, 살다 보니까 한국이랑 일본이랑 서로 신경 쓰고 중요시하는 게 다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私も日本に行ったばかりの時は最初ずっとあり得ないことばかりでびっくりした。そのうち日本と韓国はお互い気にしているところが違うだけだってことが分かった。"라고 답한다.
이건 비단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마찬가지. 해외여행 와서 "(한국은 이런데) 여긴 왜 이래? 역시 한국만 한 곳이 없어." 투덜대는 건 듣고 싶지 않다. 나고 자란 곳이 본인에게 가장 좋고 편한 곳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당연하다는 생각은 안 한다). 한국이 짱짱이라고 느끼는 건 나와 상관은 없지만 맞은편에 앉은 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즐겁고 싶은 시간에 나는 개의치 않는 부분에 대해 불평과 투정을 들으면 내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문화와 환경이 다름에서 오는 차이와 불편의 존재를 모르고 비행기 탄 건 아닐 테지 않은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국 짱짱하고 싶다면 굳이 비싸고 불편하기만 한 비행기 타고 말도 안 통하는 곳으로 갈 필요가 없고 자국 여행 마스터가 되는 것을 추천한다.
새로운 대상을 파악하는 데엔 기존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정보들과 비교하는 것이 가장 쉽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접하는 데에 방해물이 되고 눈과 마음의 필터가 될 수도 있다.
나도 파리 지하철 역의 찌든 내는 싫지만 짜증보다는 왜 그런 냄새가 나게 된 것인지 노숙자들의 문제라면 노숙자들이 왜 생기게 된 것인지, 화장실 시스템의 문제라면 왜 파리 지하철 혹은 공공시설의 화장실은 냄새가 심한 것인지, 배수, 하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럼 왜 시공 당시 그런 시스템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고 왜 현재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는가-가 먼저 궁금하다.
행여 일처리가 느리거나 복잡한 곳들에 있더라도 처음엔 당황스럽지만 이내 그냥 여긴 이런 곳이구나-하고 그러려니 한다. 독일에서 전입신고라는 아주 단순한 관공서 업무를 보기 위해 며칠 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 은행 계좌 개설 역시 예약을 해야 하는 시스템은 경험한 적 없는 일이라 신선하고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게 독일이구나-'하고 왜 이런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가끔 순간적으로는 짜증 날 때도 있지만 결국 그러려니-로 수렴하게 된다. 적어도 한국은 이런데-라는 투정식의 비교는 일본 생활 첫 해에 졸업한 것 같다.
'사고방식',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고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그들의 방향이 내게도 느껴질 때 나는 뇌에 자극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져 집 나온 보람이 있다는 기분이 든다. 사실 일기장에 쓰든 블로그에 쓰든 다 상관은 없는데 내 앞에서 직접적인 육성으로 불평불만을 듣고 싶지는 않다. 일본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일본도 한국, 호주, 대만, 독일 등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 일어나는 곳이라고.
6)
업무에 있어 다소 속상한 피드백을 받았다. 지난 세 달 반 동안 크든 작든 피드백 자체를 받은 적이 없는 상태에서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서 생각지도 못한 피드백을 받아 많이 당황했고, '그럼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는가'라며 작은 불만이 생겼다.
모르겠다, 나 역시 수년을 일을 배우는 신입이었을 때가 있었고 더 많은 시간을 일을 가르치는 트레이너이기도 했다. 매번 내가 가르치고 있는 분들에게 일은 어떤지, 익숙해졌는지, 어떤 점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묻고, 내가 보기에 이런 점은 잘 되고 있고, 저런 점은 이런 식으로 개선한다면 더 이런저런 방향으로 일하기 쉬워질 것이라고 이야기를 나눈다. 아마 처음 서비스업 일을 시작한 곳에서 다들 아는 사람들에게 소개받아 친구들끼리 일하는데 나만 혼자 직원 낙하산으로 꽂힌 사람이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는 사람들도 없는 곳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가시방석에 마음 불편한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조금은 편하게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을 걸기 시작했던 것이 나의 교육 스타일이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교육을 담당했던 분들은 유난히 나를 잘 따라주기도 했고, 나 덕분에 일하는 곳에 마음 편히 적응할 수 있었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난 단순히 수다스럽고 내가 겪었던 외로움이나 심적 압박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이미 세 달 반 동안 단 한 번도 피드백이 없었다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며 일해온 상태라 갑작스러운 피드백은 마음이 다소 복잡해진다.
7)
토론회에서 나왔던 한 마디로 세상이 갈린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아무 말 대잔치에 낚여 나온 말실수였을 수도 있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말 한마디로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가 힘을 얻어 고개를 들었다는 점이다. 한쪽은 속상함과 분함으로, 한쪽은 그동안 입 다물고 있던 본인의 속내를 드러냄으로써 실은 갈려있던 것을 덮어두었던 천이 사라져 본모습이 가시화된 것 같다. 누군가가 쏘아 올린 똥덩어리가 어떤 누군가들에게 생애 최악의 날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아직 대통령일 시절, 미국 연방법원에서 동성 결혼 금지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냄으로써 주 단위가 아닌 미국 전체에서도 동성 결혼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세상의 SNS는 온통 무지갯빛이었다. 혐오를 가진 사람들은 그 무지갯빛 밭을 보며 얼마나 보기 싫고 불편했을까. 인터넷으로만 한국을 보고 있는 나는 마치 지난번 대선에서 503이 당선되자 그동안 여론에 밀려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거봐 우리가 승리했어!'라며 튀어나온 503 지지자들이나(물론 그들이 503에 대한 마음이 여전한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트럼프 대통령(...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실화냐..) 당선 이후 인종차별 자임을 커밍아웃하던 미국인들을 보는 기분이다. 나도 내가 바라는 세상이 있기에 이 반응들은 개인적으로는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 처참함을 설명하자면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 때 '방사능이 옮는다'라고 일본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입국 금지시켜야 한다는 댓글들을 봤을 때의 기분이었다.
8)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씌워진 '죄악' 프레임은 '종족번식'이라는 지구 상 모든 생명체 최대의 '본능'에 반反하며, 가족 단위의 공동체에서는 더 많은 '노동력 생산'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은 사회적으로는 더 많은 '세금'을 걷는 것에 방해하기 때문에 '죄악'의 프레임을 씌워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임을 씌우는 역할을 한 것은 기득권자들로, 어떤 시대에선 종교였을 테고.
약간 비슷한 맥락으로 현재 결혼하지 않는 남성들에 비해 결혼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더 비난이 가는 것은 '임신 가능한 자궁'이 임신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건 남자의 힘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이고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잘 굴러가게 하려면 계속 '조세 대상을 생산'해 내야 하는데 조세 대상 생산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하니 얼마나 환장스럽겠는가.
'임신 가능하여 조세 대상을 생산하는 자궁'이란 시선이 바로 '가임기' 여성들을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시선이다. 그러니까 가임기 지도 따위가 나오는 거고.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 결혼을 거부하는 여성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선 수년 전부터 출생인구, 아이들의 수가 줄어드는 '소자화小子化'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연금 부양 인구 감소를 가장 큰 이유로 들고 있었다. 그 밖의 이유는 생각이 안 날 정도로.
개인의 인권, 선택의 자유가 전체의 이득에 반대된다면, 그것은 무참히 밟고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난 21세기에는 좀 더 희망적인 세상이 올 줄 알았다.
9)
청문회 스타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이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과 함께 진행하는 경제 이야기.
청문회 사이다 이후로 계속 그동안 쓰신 글이나 청문회 이후 출연한 팟캐스트 등 찾아보고 있는데 많은 공부가 되고 있다. 경제 등 돈 굴러가는 시스템(...)은 아예 모르는, 완전한 백지인 나도 정말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주신다. 음색, 톤, 발음 모두 좋아 듣기 편한 소리+조리 있는 말투+논리적인 문장+경제 문외한들에게도 어렵지 않은 단어 선택+흐름을 읽는 판단력+넓은 시각+깊은 전문성. 연금, 부동산, 청년 실업, 교육, 결혼 출산 주거 등 각종 제도들에 관한 이야기들도 올라와있다.
10)
다음 달부터 중정기념관의 문화센터 같은 곳(아마?)에서 다시 수묵화를 배우기로 했다. 개강 직전에 늦게 신청하려니 저녁 시간대+원하는 수업은 이미 마감된 상태라 오전 시간대+딱히 원치 않는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다. 사실 풍경을 배우고 싶었으나 기왕이면 못 하는 거 해보자! 해서 새, 꽃 등을 그리는 반으로 등록했다. 4개월 동안 대만돈 2000원, 한국돈 8만 원 좀 안 되는 가격이다. 한 수업에 30명의 대인원 수업이긴 하지만 일단 매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중요!
11)
이번에 황금연휴를 맞이해 인천 공항이 미어터질 것으로 예상한다는데. 늘 그렇듯 연휴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본인들은 연휴 없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건
공항 리무진 운전기사님, 항공 승무원, 항공기 조종사, 입국 심사, 출국 심사, 검역, 세관, 발권 카운터, 공항 내 안내 및 보안, 관내 청소, 출국 심사대를 중심으로 안과 밖의 많은 상점과 면세점 직원 및 아르바이트생, 라운지 및 공항 내 편의시설 직원, 공항 내 이동통신사, 은행, 여행사, 의무실 직원, 공항 내 수도, 전기, 기타 시설 등 일체를 담당하는 시설관리 담당 직원 등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선(나도 잘 모르지만),
관제탑, 수하물 옮기는 사람, 옮겨 온 수하물 정리하는 사람, 비행기를 띄우는 사람, 활주로 관리, 기내식을 만드는 사람, 기내식을 항공기에 분배하는 사람, 기내 청소 및 정리하는 사람, 그리고 항공기 관리, 항공 정비사 등이 있다. 내부는 아마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대부분이 24시간 3교대 근무로 돌아가거나, 새벽 4시부터 출근하거나. 그리고 이 분들이 있기에 모두가 즐겁고 안전한 연휴를 보낼 수가 있는 것. 커피 한 잔을 받더라도, 출국장에서 '고마워요' '수고하세요' 한 마디에 일하는 사람들도 작게나마 기운을 얻고 서로 기분 좋아질 테다. 사실 내 수족이 이들 중 하나라 더 마음이 쓰인다. 나 자신도 저녁과 주말 있는 삶을 살아본 적 없는 1n 년 서비스 종사자이기도 하고.
인천공항에 제2여객터미널 건설 중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 대한항공 등의 스카이팀이 제2여객터미널로 가고, 아시아나 등의 스타 얼라이언스 및 기타 항공사들은 기존의 제1여객터미널인 듯하다. 스카이팀은 새 집으로 이동하고 그만큼 다른 항공사들이 넓게 쓴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나는 원월드까지 세 곳의 회원이지만 늘 '가장 싼 항공권'을 이용하기 때문에 마일리지가 쌓여있을지는 모르겠다. 쌓여있어도 다 소멸되지 않았을까. 1996년에 영종도 갯벌이 아직 공항이 되기 전에 재학 중이던 초등학교에서 영종도로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당시 교관이 그 해가 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난 비행기를 수 십 번을 탔지만 단 한 번도 비행기를 놓치거나 아슬아슬하게 수속을 마친 적이 없다. 그래서 수속 시간 안에 수속을 못했을 때, 즉 비행기를 놓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비결은 ①애초에 시간이 아슬아슬한 비행기는 예매 안 함 ②못 일어날 것 같으면 안 잠 ③정말 못 일어날 것 같으면 전날 밤에 공항에 가서 카운터 앞에서 노숙을 하고 ④일단 평소에도 공항에 보통 3.5~4시간 전에 도착. 물론 이것은 내가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이 아니라서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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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서 일하고 싶다는 연락 왔다길래 반가워서 중국어는 할 줄 아냐 몇 살 이래 등등 물어보니 "역시 신경 쓰이나 봐. やっぱり意識してんの"란다. '일본인/대만인/사원/주방/남자'인 사람들이랑만 일하는 '한국인/알바/홀/여자'라서 반가웠을 뿐인데 저런 식으로 비아냥대는 것이 불쾌했다. 마치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프레임인 마냥. 너 같으면 안 반갑겠냐. 만날 지들끼리만 어울리고 나는 혼자 입 다물고 묵언 수행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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